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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양산 영축산 단조늪

1000m 고원에 어린 옛 사람들의 고단한 몸부림 우리나라 최대 규모 고산습지 단조늪은 영축산 산마루(1081m)에서 시작한다. 산마루는 북쪽을 향해 단조봉~신불재~신불산~간월재~간월산으로 이어진다. 동쪽과 남쪽은 둘 다 깎아지른 벼랑이다. 차이점이라면 동쪽으로는 울산이라는 도시가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불보사찰 통도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정도뿐이다. 반면 서쪽은 평평한 들판이다. 떨기나무와 덩굴나무가 둘레를 에워싸고 있으며 가운데는 억새가 무리지어 흔들리고 있다.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지대인데다가 바람까지 사철 드세게 불어 큰키나무는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다. 단조늪은 길이가 영축산 마루에서 단조봉까지 1100m 남짓이고 너비는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300~500m 정도 된다. 우리나라 고산습지 가운데 ..

가본 곳 2021.09.22

17. 창녕 화왕산 정상의 습지 용지

수많은 애환 말없이 보듬은 산정 억새평원 의병장 곽재우와 창녕 화왕산 창녕에 가면 화왕산(火旺山·756m)이 있다. 남쪽과 서쪽·북쪽이 모두 가파르고 동쪽은 다른 높은 산들과 이어져 있다. 산성이 사방을 대부분 두르고 있는 화왕산 정상부에 이르면 북쪽에 꼭대기가 남쪽에 배바우가 솟아 있다. 홍수로 천지개벽이 되었을 때 배(船)를 묶어두었다는 배바우에는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 갈라진 틈이 있다. 의병장 곽재우의 전설이 서려 있는 장소다. 곽재우는 1592년 4월 14일(음력) 임진왜란이 터지자 같은 달 22일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거름강(기강)나루와 솥바위(정암)나루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낙동강 기강나루는 의령과 창녕을 이어주고 남강 솥바위나루는 의령과 함안을 이어준다. 곽재우는 당시 물길을 타고 의령..

가본 곳 2021.09.21

16. 함안 연꽃테마파크와 옥수홍련·옥수늪

대접받아 마땅한 토종 연꽃의 1100년 고향 옛 습지에 들어선 새 습지 함안에 가면 함안연꽃테마파크가 있다. 가야읍 나들머리에 자리잡은 함주공원과 가깝다. 가야동늪지 또는 가야습지라 이르던 곳이다. 함안군청은 일대 10만9800㎡에 2008~2013년 100억원을 들여 공원을 새로 꾸몄다. 가야동늪지는 아라가야의 왕궁 자리로 알려져 왔다. 공원 조성에 앞선 문화재 발굴에서 관련 유적이 나오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왕궁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대신 제방 유적이 나왔다. 왕궁을 둘러싸는 토성으로 짐작되어 왔던 것이다. 바로 옆 신음천에서 여기로 물이 들지 못하도록 막는 구실을 하는 제방이었다. 1500년 전 안팎 가야시대 것이었다. 함안군청은 개발·활용보다 현상 보존이 낫다고 여겨 흙으로 다..

가본 곳 2021.09.20

15. 함안 성산산성과 아라홍련

700년간 작은 씨앗 품은 생명의 어머니 가야 옛터 함안 성산산성 성산산성은 함안군 가야읍 광정리 조남산(해발 136m) 정상에 있다. 1.4km남짓을 돌로 쌓아 둘렀다. 무진정(이수정)에서 오르면 10분 안팎이 걸려 동문 자리에 이를 수 있다. 맞은편 서쪽이 가장 높고 그 다음 높은 북쪽에서 낮아지기 시작하여 가운데에 평지를 이룬 다음 남쪽으로 가면서 높아진다. 높지는 않아도 여기 능선에 서면 사방으로 트인 풍경이 눈에 담긴다. 한복판은 옴폭하게 꺼져 분지를 이루고 동쪽으로 골짜기가 나면서 열려 있다. 성산산성 자리는 지금 보아도 요충이다. 함안 이쪽저쪽 골짜기에서 남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여러 물줄기들과 그것들이 펼쳐놓은 들판까지 한 눈에 장악되는 지점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1991~2016년 조사..

가본 곳 2021.09.19

내가 경남도민일보를 조기퇴직한 까닭

안녕하세요? 29일 주주총회를 끝으로 전무이사직을 마친 김주완입니다. 아직 계약직으로 할 일이 좀 남아 있지만, 정규직으로선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요. 1990년 3월 기자질을 시작한지 햇수로 32년이 되었군요. 그중 22년을 경남도민일보에서 일하면서 참 많은 덕을 입었습니다. 기자의 가장 큰 행복은 ‘소신대로 마음껏 취재할 자유’를 보장받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경남도민일보는 저에게 최고의 직장이었습니다. 또한 도덕성과 기자윤리에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언론사에서 일한다는 것도 저에겐 엄청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 언론사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무한한 영광이었고요. 2010년 몇 개월간 잠시 회사를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준 동료들에게도 큰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

20세 나이에 경찰 총알에 숨진 3.15의거 조현대 열사가 알려진 계기는?

어제(3월 15일) 경남신문에 3.15의거 61주년 기획으로 '조현대 열사를 찾아서'라는 기사가 나왔다. 읽던 중 쓴웃음이 나왔다. "~조사를 벌인 결과 3·15의거기념사업회가 조 열사의 사망 소식을 확인했다"라는 대목에서였다. 사실 조현대 열사의 희생 사실이 알려진 것은 1997년 경남매일 취재와 보도에 따른 것이다. 3.15의거기념사업회와 마산보훈지청은 경남매일 보도 이후에야 조현대 열사의 신원과 묘소, 가족 찾기에 나섰고, 결국 신원과 희생사실은 확인했지만, 묘소와 가족은 찾지 못한 채 2002년 3.15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모시게 되었다. 또한 당시 경남매일은 기획연재기사를 통해 '12열사'가 아니라 조현대, 김동섭 열사를 포함해 '14열사'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생의거'가 아니라 '시민..

자치단체 언론 홍보예산 집행 기준이 절실하다

이제야 지역사회에서 자치단체의 홍보 광고비 지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공무원노조가 앞장섰다. 민언련도 한 목소리를 냈다. 공무원 노조는 지난 2월 2일 경남도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경남도·각 시군 광고비 지급기준 마련 △사이비언론 광고비 지급 중단을 촉구했다. 이어 경남민언련도 8일 성명서를 통해 "경남도와 도의회는 자치단체 홍보, 광고비 지출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시급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남도청과 각 시군청은 조례나 규칙을 만들어서라도 제발 그렇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경남민언련 성명서 전문. [성명서] 사이비 언론 준동을 막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지난해 10월 진주의 한 언론사는 지자체에 행정정보공개 청구를 남발하였다. 반면 해당 언론사..

코로나19가 가져온 '저녁이 있는 삶'

내가 참여하고 있는 한 모임은 며칠 전 줌(Zoom)으로 화상 송년회를 열었다. 회원들은 미리 받은 먹거리 꾸러미를 풀어 맥주를 마시며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얼굴을 마주했다. 원래 공부 모임이다 보니 한 시간은 화면공유 기능을 통해 파워포인트를 보며 강의를 들었고, 이후엔 각자 근황과 내년 계획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세 시간 정도 걸렸는데, 술집에서 왁자지껄 보내는 송년회보다 오히려 의미와 재미가 더했다. 코로나19는 올 한 해 우리 일상에 많은 변화를 줬다. 한 지인은 요즘 웬만한 회의도 줌이나 구글 미트(Meet)로 한단다. 덕분에 단 한 시간 회의를 위해 왕복 10시간 이상 서울을 오가는 일이 사라진 게 너무 좋단다. 나도 올 하반기 들어 세 개의 강의를 영상으로 녹화해 보냈고, 두 번의 강의..

3.15의거기념사업회는 변할 수 있을까

‘마산 4.11민주항쟁은 4.19혁명의 첫날입니다.’ 이 문구에 3.15의거기념사업회(3.15사업회)가 발끈했다. 알다시피 4월 11일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떠오른 날이고, 분개한 마산시민이 총궐기해 이승만 독재를 붕괴시킨 계기가 되었다. 3.15사업회 측이 발끈한 이유는 이랬다. “4.11이 첫날이라면 3.15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냐?” 이후 이 단체 김장희 회장과 해당 문구를 쓴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김영만 상임고문이 9차례에 걸쳐 지상논쟁(경남도민일보)을 벌였고, 급기야 지난 6일 열린 3.15사업회 주최 심포지엄에서도 이 문제를 공식주제로 다뤘다. 나도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참석했는데,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3.15만 홍보해오다가 이제는 4.11도 ..

3.15의거사에서 4.11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 발언록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전무이사 -저는 서익진 교수님이 3.15기념사업회 이사이고 학술출판분과장이라는 사실을 발제문 보고 알았다. -그리고 4.11에 대한 성격규정이 이렇게 예민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3자의 입장에서 볼 때,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쪽에서는 당연히 4.11을 높게 평가할 것이고, 그렇게 홍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음. -저도 당시 거리에서 그 현수막을 보고, ‘아! 지금까지 3.15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4.11의 의미를 저렇게 부각하는구나’, 4.19혁명의 첫날입니다는 문구도 ‘카피를 참 잘 만들었네’ 하는 정도로 생각했지, 그게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다뤄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주의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보면, 역사를 보는 관점이나 해석도..

믿었던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한동안 페이스북에 아무런 글도 올리지 않았더니, 몇 지인들로부터 '뭔 일이 있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두 달째 내 페이스북은 멈춰 있다. 첫 계기는 지난 5월 '윤미향 사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윤미향의 죄를 미리 단정해놓고 그를 향해 독기 서린 증오 글을 올린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들이 윤미향을 증오한 근거는 당시의 언론보도였다. 내가 믿고 존경해왔던 분들이었고, 평소 누구보다 조중동류의 보도 행태에 분개해왔던 이들이어서 충격이 더했다. 두 달 뒤 박원순 사건 때도 그랬다. 정확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이는 너무나 쉽게 망자의 편에 섰고, 다른 이는 고소인의 편에 섰다. 윤미향을 날 선 언어로 욕하던 사람이 이번엔 박원순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무..

14. 산을 넘어 바다로 내려가는 가화천 물길

인간사 희로애락 담고 산을 넘는 남강 물길 낙남정맥을 넘어 사천만으로 앞에서 살펴본대로 진주는 오랜 옛날부터 상습수해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1936년 8월 26~28일 병자년대홍수가 가장 심했다. 장대·봉곡동에서 제방이 터지고 진주성까지 일부 무너졌다. 그 바람에 읍내 칠암·본성·남성·동성·장대동 가옥 5500채가 물에 잠겼다. 이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1920년과 1925년, 1933년과 1934년에도 진주는 시가지가 최대 80%까지 침수되는 홍수 피해를 겪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간단한 이치 때문이었다. 진주 북서쪽에는 백두산에서 뻗어내려온 지리산과 남덕유산의 고봉준령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다. 그 고봉준령 남동쪽 기슭에 떨어진 빗방울은 지형상 어쩔 수 없이 진주 쪽으로 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본 곳 2020.07.28

꽃다발 들고 황점순 할머니 찾아뵙는 날

모처럼 반가운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지난달 이 지면을 통해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이귀순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제기한 형사 재심청구 소송이 검찰의 재항고로 인해 7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망백(望百)이 넘은 할머니들이 끝내 판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탄식이었죠. 그 후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도 대법원에 호소문을 냈더군요. “특히 4명의 피고인 중 제일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망 이용순의 처 황점순 할머니’는 돌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노파로 지금 한 요양원에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는데, 남편의 형사 재심 재판이라도 보고 세상을 떠나실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길 호소합니다.” 이런 글이 대법관들에게 전해..

황점순 이귀순 두 할머니 이야기

황점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찾아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진동 애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김 기잡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 김 기자가~" 하며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27년생인 할머니는 올해로 만 93세가 되셨다. 열아홉에 진동면 곡안리로 시집와 스물둘에 아들 이상섭을 낳았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과 함께 남편 이용순과 아들을 한국군과 미군의 학살로 잃었다. 그때 남편은 스물네 살, 아들은 고작 두 살이었다. 남편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학살 현장에서 잃었다. 시조부, ..

13. 인공 남강댐에 생겨난 자연 습지들

사람 발길 끊기니 물총새 둥지로 물풀 고향으로 남강댐=진양호의 역사 경남 또는 진주에 살면서도 남강댐=진양호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냥 있다는 사실만 안다. 어떤 사연을 품었으며 어떤 곡절을 겪었는지는 모른다. 남강댐은 박정희 시절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8년 공사 끝에 저수용량 1억3630만t으로 1969년 준공되었다. 계획홍수위를 40.5m에서 46m로 5.5m 높여 저수용량을 3억920t으로 2.3배가량 늘리기 위하여 보강공사를 벌인 때는 1989~2003년이다. 남강댐은 또 진주·사천·고성·통영·거제·하동·남해에 연간 생활·공업용수 2억2440만t과 농업용수 2억2680만t을 공급한다. 전기생산량도 한 해에 4130만kWh에 이른다. 홍수 조절 기능도 한다. 200년에 한 번..

가본 곳 2020.06.09

12. 노무현 길러낸 김해 화포천의 넉넉함

빼어난 습지 경관 화포천 물줄기는 김해 진례면에서 시작된다. 진례면은 김해가 창원과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대암산·용지봉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펼쳐 내리는 지역이다. 이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진례저수지 등에 들렀다가 골짜기를 빠져나오기까지 3km 정도 걸린다. 여기서 낙동강까지 화포천은 너른 들판을 끼고 북동쪽으로 15km 남짓을 또다시 구불구불 나아간다. 골짜기를 벗어나 들판과 함께하는 화포천은 크게 둘로 나뉜다. 진영읍 본산리까지 상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 100m 안팎으로 좁다. 반면 본산리에서 낙동강까지 하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가 최대 700m에 이를 정도로 널찍하다. 화포천습지라고 일컫는 부분은 하류쪽 두 번째 구간이다. 하천 바닥에 이루어진 하상(河床)습지로서는 ..

가본 곳 2020.06.08

11. 매립과 보전이 맞서는 갈등의 광포만

사천만 잿빛 대지에 피어난 생명의 보고 1999년 새로 생겨난 지명 광포만은 사천 곤양면 중항·환덕·대진리와 서포면 외구·조도리로 둘러싸여 있다. 사천만의 서쪽 부분에 해당된다. 조선 시대에 곤양군이었던 지역을 움푹하게 파고들었다.(사천시가 대체로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통·폐합으로 곤양군과 합해지면서다.) 광포만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묵곡·목단·곤양·서포천 넷이다. 지금은 ‘광포만’이라는 지명이 횟집이나 부동산소개업체 상호에도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광포만은 낱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사천만의 일부였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광포만으로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말의 흥망성쇠는 필요에 따라 일..

가본 곳 2020.04.21

10. 사라질 뻔했던 마산만 봉암갯벌

다양한 생물 삶터로 경남 연안 첫 습지보호지역 갖은 욕설 내뱉던 개발업자 1999년 7월 19일자 경남도민일보 1면 머리기사는 봉암갯벌에 대한 것이었다. 기사 첫머리는 이랬다. “마산만의 유일한 갯벌인 봉암갯벌이 공장용도로 매립될 예정이어서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같은 해 5월에 삼원준설 등 4개 업체가 레미콘·콘크리트제품 공장 건설을 위하여 마산시 회원구 봉암동 21 지선 공유수면 1만3700평 남짓에 대한 매립 면허를 마산지방해양수산청에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삼원준설 대표는 경남도민일보에 대하여 갖은 욕설을 섞어가며 항의했다. “텅텅 빈 채 놀리고 있는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매립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갯벌에 오염물질도 없앨 수 있는데 반대만 한..

가본 곳 2020.04.19

9. 검포갯벌, 오랜 세월 쌓인 삶의 흔적

작은 가야? 센 가야! 고성군은 땅 모양이 반도(半島)처럼 생겼다. 북서쪽으로 육지와 이어져 있고 나머지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고성반도는 알파벳 ‘T’자를 대충 오른쪽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뉘어 놓은 ‘T’자의 북동쪽 끝이 동해면 외산리와 내산리이고 옆으로 뻗는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가 고성읍이며 남쪽으로는 통영시로 이어진다. 고성읍은 고성군의 중심이다. 읍내에는 송학동 고분군이 있다. 어지간한 동네 야산 정도로 커다랗다(실제 무기산舞妓山이라 했던 적도 있다). 2000~1500년 전 고성 일대를 쥐락펴락했던 지배집단의 무덤이다. 고려시대 스님 일연은 에서 고성에 있었던 가야를 일러 ‘소가야(小伽倻)’라 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고성을 두고 ‘작은’ 가야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가본 곳 2020.04.18

8. 마동호갯벌, 역사·문화 모두 풍성한 생태계

해방 이후 전국 최초 간척 마동호 갯벌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작점은 간사지교가 적당하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마을과 거류면 거산마을을 잇는 다리다. 여기 오면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조그만 빗돌이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다. 김정실(1904~69)은 고성읍 출신으로 1950년 6.25전쟁 직전인 5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성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1988년 2월 세웠다는 비문을 보면 김정실의 공적은 이렇다.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제 땅을 갖도록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 제2대 국회의원이 되자 곧 1951년 피난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당시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인 고성 간척지 조성사업을 온갖 열정을 다해 마침내..

가본 곳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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