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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산을 넘어 바다로 내려가는 가화천 물길

김훤주 2020. 7. 2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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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 희로애락 담고 산을 넘는 남강 물길

낙남정맥을 넘어 사천만으로

가화천 상류. 바위에 뻘흙이 묻어 있다. 원래는 너비가 좁았지만 방류수 때문에 넓어졌다.

앞에서 살펴본대로 진주는 오랜 옛날부터 상습수해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1936년 8월 26~28일 병자년대홍수가 가장 심했다. 장대·봉곡동에서 제방이 터지고 진주성까지 일부 무너졌다. 그 바람에 읍내 칠암·본성·남성·동성·장대동 가옥 5500채가 물에 잠겼다. 이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1920년과 1925년, 1933년과 1934년에도 진주는 시가지가 최대 80%까지 침수되는 홍수 피해를 겪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간단한 이치 때문이었다. 진주 북서쪽에는 백두산에서 뻗어내려온 지리산과 남덕유산의 고봉준령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다. 그 고봉준령 남동쪽 기슭에 떨어진 빗방울은 지형상 어쩔 수 없이 진주 쪽으로 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남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물줄기가 덕천강과 경호강 둘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바로 남해로 빠져나갈 수 있으면 수해가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낙남정맥에 가로막혀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대신 진주 직전 광탄진(廣灘津=너우니. ‘여울이 널찍한 나루’라는 뜻인데 남강댐으로 수몰되었다.)에서 합해져 비로소 남강을 이루게 되었다. 낙남정맥에 남쪽이 막힌 남강은 이 어름에서 물길을 동쪽으로 잡는다. 여기서부터는 낙남정맥의 북쪽 비탈에서 굴러 내려온 빗물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남강이 이처럼 수량은 더욱 많아지면서 진주는 상습수해지역이 되었다.

가화천 중류. 바닥에 갈라진 바위가 기울어진 채로 길게 뻗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게다가 남강은 낙동강에 합류하면서 곧바로 병목을 만나게 된다. 함안과 의령을 남북으로 가르면서 동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가는데 바로 그 아래 밀양 삼랑진~양산 물금 20km 가량이 병목 구간이다. 강폭이 500~800m로 좁기 때문에 흐름이 더욱더 느려지는 것이다.

 

그래도 평소에는 별 탈이 없지만 홍수로 수량이 크게 늘어나면(바다의 밀물 시기와 겹쳐지면 더욱더) 상류와 지천으로 강물이 역류하면서 범람해 피해를 키웠다. 이미 터 잡고 사는 주민들을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는 노릇이라면 남강물을 남해로 빼돌리는 궁리를 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강은 ‘산을 넘는 물’이 되었다. 낙남정맥 산줄기를 넘은 것이다. 남강댐=진양호를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방수로 이야기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낙남정맥 고갯마루를 깎아내어 북쪽 물줄기를 남쪽에 있던 개천 가화천과 하나로 이어붙인 것이다.

 

낙남정맥 산줄기가 낮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무리 높아도 해발 800m가 안 되는데 지금 남강댐 방수로가 있는 일대는 특히 낮아 200m에도 미치지 못한다. 남강댐 바로 아래 방수로에 걸쳐져 있는 다리 유수교에서 서쪽 직선으로 2.2km 지점에 있는 태봉산(내동면 내평리)이 190m이고, 동쪽 직선으로 3.2km 떨어져 있는 실봉산(정촌면 대축리)은 185m이다.

남강댐에서 가화천으로 물이 넘어올 수 있도록 만들어진 방수로. 남강댐은 다리 너머에 있다.

뿐만 아니라 두 산 사이에는 물줄기까지 남과 북으로 하나씩 안겨 있었다. 진주 내평·삼계리를 거쳐 남강과 합해지는 삼계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사천 가화·반용·검정·가산리를 거쳐 사천만으로 들어가는 가화천이 남쪽으로 흐른다. 고갯마루를 조금만 깎아 내면 저절로 물길이 이어지게 되는 지형지세였다. 남강댐 방수로가 생겨나면서 삼계천은 자기 이름을 잃고 가화천의 일부가 되었다.

 

220년 전에도 있었던 방수로 뚫자는 주장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조실록> 1796년 5월 8일자 기사를 보면 장재곤(張載坤)이 용동궁(龍洞宮=정조 어머니 혜빈 홍씨)에게 바친 말이 나온다.

“진주 광탄(廣灘)과 지소두(紙所頭)에서 물길을 뚫어 물을 사천 바다로 흘러가게 하면 함안·창원·초계·영산·양산·현풍·김해·칠원·의령·창녕·밀양·진주·성주 열세 고을의 허다하게 침수되던 곳이 훌륭한 농지가 될 것입니다. 바다와 2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뚫어 통하게 할 거리도 한 마장(馬場)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수교에서 남강댐 쪽으로 바라본 모습. 공룡 등의 화석이 많이 나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정조는 비변사를 시켜 경상도관찰사로 하여금 알아보게 하였다. “보좌관을 보내 특별히 탐색하고 수령들을 착실히 살펴보게 했더니 지역의 형세와 백성들의 뜻이 전혀 달랐습니다. 장재곤이라는 성명은 호적에 실려 있지도 않으며 행동이 허황됩니다.” 말하자면 시대보다 앞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삼계천이 흐르는 골짜기를 당시 수통골이라 했다. 남강댐 방수로가 나면서 물(水)이 고개마루를 넘어 서로 통(通)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삼계리 별명 수통골이 현실이 되었다고들 했다. 가화천 상류 진주 유수리를 두고도 말이 나왔다. 원래는 물(水)이 흐르지 않았지만 방수로가 뚫리면서 흐르게(流) 되었다는 것이다.

 

수통골은 맞지만 유수리는 틀렸다. 유수리는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진주군 축곡면 유동(柳洞)과 수거촌(樹巨村)에서 첫 글자를 따왔다. 流水가 아니라 柳樹였던 것이다.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

남강댐 방수로 공사는 뜻하지 않게 선물도 하나 안겨주었다. 1997년 천연기념물 제390호로 지정된 ‘진주 유수리 백악기 화석 산지’이다. 1억년 전 지층으로 너비는 150m이고 길이는 2㎞이다. 방수로를 내려고 고갯마루를 깎는 바람에 그 아래 화석 지층이 드러난 것이다.

 

손가락뼈·발가락뼈·궁둥이뼈·이빨 등 공룡 화석이 100점 넘게 나왔다. 오래된 토양층, 나무화석(규화목), 불탄 나무(숯) 화석, 중생대 여러 생물들의 생활흔적 화석도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에서 공룡뼈 화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장소로 옛날 공룡의 서식환경과 화석화 과정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 밝히고 있다.

 

화석들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역의 바깥에도 숱하게 나와 있다. 초당 최대 3250t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방류수에 지정 지역 안에 있던 화석들이 휩쓸려 떠내려간 때문이다. 또 때로는 그런 방류수에 바닥이 파이면서 새롭게 드러난 때문도 있다.

 

가화천 바닥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바위 모습. 하얀 부분은 굴껍데기화석이다.

30년 전만 해도 가화천 어귀 사람들은 여기서 구한 규화목이 하나둘 정도 없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굴껍데기나 공룡알의 화석처럼 보이는 것들이 곳곳에 있다. 여기에 와서 화석이 박혀 있는 일대 바위들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노닐면 아득한 옛날로 쉽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가화천 일대 사람살이의 자취

가화천은 조선 말기에 이미 육상 운송과 해상 운송이 서로 전환되는 지점이 되어 있었다. 영조는 1760년에 진주목 가산리(가산리는 축동면에 있다. 축동면이 지금은 사천시 소속이지만 당시는 진주였다.)에 가산창을 세웠다. 진주·곤양·하동·단성·남해·사천·고성·의령 여덟 고을에서 거둔 조세물품을 여기 쌓았다가 이듬해 봄이 되면 바닷길을 통하여 서울로 실어 날랐다.

 

이 가운데 진주에서 거둔 것들은 광탄(너우니) 나루를 먼저 건넌 다음 삼계천을 거슬러 낙남정맥을 넘었다. 그러고는 가화천을 타고 가산창에 가서 짐을 풀었다. 가산창은 1002호 지방도 옛 도로가 가화천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 동쪽의 민물과 짠물이 뒤섞이는 언저리에 있었다.

 

가화천은 바닷물의 영향 아래 있(었)다. 붉은발말똥게라든지 새롭게 이름을 얻은 총알고둥·비틀이고둥이 살고 갯가에서는 갯질경이 등이 자라는 것이 상류에서도 확인되었다. 민물이 왕창왕창 쏟아져 내리는 지금도 이처럼 바다 생물이 산다. 더불어 가화천에는 버들강아지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버들강아지는 민물 습지에 있을 뿐 소금기가 있는 바닷가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는 해마다 봄이면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다.

 

또 가화천 하류에서는 밀물이 드는 때에 맞추어 배를 띄웠다. 지금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그랬다. 어물 같은 바다 산물을 싣고 상류로 올라와서 부려놓고는 돌아갈 때는 들과 산에서 나는 산물을 배에다 실었다. 배가 닿는 나루터 근처에는 당연히 주막도 있었다.

가화천(사천 축동면 반용리729-1일대) 옛날 가마. 쌓여 있는 흙덩이 너머에 그을음이 있다.
가화천 바로 옆 산비탈에서 발견된 막사발 파편.  ©김덕성

질그릇을 굽는 가마도 있었다. 산간과 바닷가로 두루 팔려나갔을 것이다. 이번에 축동면 반용리 729-1(반룡길 26-174) 언저리에서 가마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대는 차진 황토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사이로 그을음이 검게 끼인 흙구덩이가 보였고 주변에는 질그릇 조각이 여럿 흩어져 있었다.

 

여기 지역 사람들은 이렇게 차진 황토를 '쫀대흙'이라 한다. 쫀대흙으로 만든 그릇을 잿물도 입히지 않고 구웠다. 황토로 만든 그릇 황옹(黃甕)은 양반이나 부잣집에서 쓰는 도자기가 아니었다. 상놈·천민이 막 쓰는 거친(荒) 질그릇(甕)이었다. 그래서 황옹(黃甕)은 동시에 황옹(荒甕)이기도 했다. 가화천 양옆에는 대숲도 우거져 있다. 여기 대나무로 만든 죽물(竹物)은 1970년대까지도 가화천 물줄기를 타고 아래위로 많이 유통되었다고 한다.

 

사천만에 미친 악영향

무엇이든 100% 좋기만 한 것은 세상에 없다. 좋은 구석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구석도 있게 마련이다. 남강댐 사천만 방수로도 마찬가지다. 남강·낙동강 유역에서는 상습 수해를 없애고 황무지를 농지로 일굴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사천만 바다에는 악영향만 크게 끼쳤다.

 

가화천을 타고 내려오는 남강 민물은 바닷물 소금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옛적 사천만은 바닷물고기가 넘쳐나는 바다였다. 하지만 방수로가 생긴 뒤로 바닷물고기가 제대로 살기 어렵도록 바뀌었다. 조개도 짠물에서 잘 자라는 녀석들은 사라지고 소금기가 덜한 데서 잘 자라는 대합·재첩이 많아졌다.

 

바다에 사는 물풀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잘피 같은 물풀은 사천만을 남해 으뜸 물고기 산란장으로 유지시켜 온 일등공신이었다. 사천만은 물풀이 망가지면서 물고기 산란장 기능을 작지 않게 잃어야 했다.

가화천 바닥에 있는 크고작은 바위들. 작은 자갈이나 모레는 방류수 거센 물살에 떠내려갔다.

남강댐 방류수는 바닷물 흐름도 느리게 하고 수심도 바꾸었다. 중선포천과 사천강은 사천만에서 가화천보다 더 육지 쪽 깊숙한 데에 있다. 이 두 강물은 바다로 들어서면서 가화천 방류수를 만나 곧바로 흐름이 막힌다. 따라서 물살이 느려지고 함께 실려온 흙·모레·자갈들도 덩달아 멀리 가지 못하고 가까운 데 가라앉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바닥이 높아지면서 사천만 이쪽저쪽은 항구 기능도 상당히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천 어민들은 남강댐 방류 반대 해상 시위를 해마다 벌인다. 그래도 가화천을 통한 남강댐 방류는 이어진다. 남강댐을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는 나아가 사천만 방류수량을 더 늘리려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제2방수로까지 꾀했다가 반대에 부딪히자 지금 자리에 수문을 2개 더 내고 수문 크기를 키우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사천 사람들이 남강댐관리단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지금에서 더 늘리면 공생이나 상생에서 어긋나는 일이지 싶다. 그렇다 해도 진주 쪽 홍수 피해를 예방하려면 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가볍게 여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사천만은 여태껏 지금 있는 방수로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앞으로도 계속 겪어야 할 고통이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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