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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우러져 살아라' 토평천이 낳은 우포늪

'국내 최대 내륙습지'의 함의 창녕 우포늪은 우리나라 내륙습지 가운데 가장 크다. 우포·목포·사지포·쪽지벌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포는 127만8285㎡, 목포는 53만 284㎡, 사지포는 36만4731㎡, 쪽지벌은 13만9626㎡다. 모두 더하면 231만 2926㎡, 대략 70만 평인데 2012년 2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면적은 주변까지 포함하여 3배가 넘는 850만㎡다. 우포늪은 토평천이 낳았다. 토평천은 창녕에서 가장 높은 화왕산과 그 북쪽 열왕산에서 흘러내려 고암면 청간마을에서 물줄기를 제대로 이룬다. 토평천은 비탈진 골짜기를 빠르게 흐르다가 고암면 중대·도야마을에서 중대천·도야천을 만나면서 느려진다. 함께 흐르던 흙·모래·자갈·돌들이 쌓여 평평하고 너른 벌판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논밭으로..

가본 곳 2020.04.17

광려천을 둘러보았더니

[하천과 문화] (10) 너른 품에 철새들 노닐고 대부분 하천과 달리 북동진 삼계·원계서 폭 더 넓어져 노거수 많은 삼풍대 눈길 아파트 들어서며 인구 증가 곳곳 정겨운 풍경 만나지만 수질정화 방안도 고민해야 광려천은 광려산에서 시작한다. 창원시 마산회원구·마산합포구와 함안군을 동서로 가르는 경계 구실을 하는 산이다. 산마루에서 북동쪽 직선으로 1㎞ 지점에 광산사가 있다. 그 옆에 보면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있다. 세상에 알려진 광려천의 첫 모습이다. 마산 내서읍 신감리까지 북동진하다 오른편에서 감천을 받아들이며 정북을 향해 흐른다. 우리나라 하천은 대부분 서쪽이나 남쪽으로 흐르는데 광려천은 그 반대다. 광려천은 삼계·원계 마을에 들면서 너비가 확 넓어진다. 비탈진 산지를 벗어나 평지에 이른 ..

가본 곳 2020.04.16

밀양강은 정자보다 별장

[하천과 문화] (9) 밀양 명문가, 풍경 좋은 곳에 별장 경영 달 비치는 연못 '월연대' 비경에 감탄 오연정은 서원으로, 반계정은 '소박함' 밀양강 하면 영남루가 너무 이름높아 밀양에는 다른 누각이나 정자는 잘 눈에 들지도 않는다. 영남루가 둘도 없이 멋지기 때문이다. 에는 영남루가 영남루인 까닭이 둘 나온다. 하나는 영남사(嶺南寺)의 누각이었는데 절이 없어진 뒤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1365년 고쳐 지으며 절간 이름을 갖다 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조선 초기 고관대작 신숙주(1417~75)의 기록이다. "어느 고을이나 누각이 있기 마련인데 대체로 무엇이 보이는지에 따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이 누각만 '영남'이라 했는데 이는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이다." ◇밀양 명문..

가본 곳 2020.04.16

경치 빼어난 요충에 자리잡은 삼랑창

[하천과 문화] (8) 1765년 설치된 조세창고 낙동강·밀양강 한눈에 해질 녘 노을·물새 '장관' 아전·뱃사공 규정 무시해 환곡 사채놀이 등 전례도 ◇조선시대 경남 내륙 조세 창고 조선 시대 조세 창고가 경남에는 셋이었다. 창원 마산창, 사천 가산창, 밀양 삼랑창이다. 삼랑창은 1765년, 마산창·가산창은 1760년 설치되었다. 삼랑창은 낙동강 강가에, 나머지 둘은 남해 바닷가에 있다. 조세로 받은 물품을 운송하는 수단이 주로 배편이라 그랬다. 김정호가 1860년대 작성한 에는 이렇게 나온다.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여섯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여 서울로 보냈다. 밀양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만호가 거느리고 가 바쳤다." 은 당시 정황을 1765년 11월 14일 자..

가본 곳 2020.04.15

왜적과 62대 1로 싸운 자리 작원잔도

[하천과 문화] (7) 300 조선군, 2만 왜군 막는 자리 서울~동래 길손 묵던 시설 '작원' 낭떠러지 외길에 왜군 진격 막혀 침략-방어 부딪친 '전략 요충지' 밀양 사람들, 작원관전투로 일러 당시 의기 기리며 위령탑도 세워 좁은 길 내는 데 흘린 피땀 느껴져 앞서 창녕 남지와 함안 칠서·칠북 일대 낙동강은 임진왜란을 겪은 영웅과 선비들이 장하게 뱃놀이를 한 자리라고 일렀다. 남강이 낙동강에 합해지는 용화산에서 곽재우 장군이 말년을 지낸 망우당이 있는 창암에 이르기까지다. 용화산이 마주 보이는 기강나루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 승전지이기도 하다. 거기서 하류 쪽으로 내려서면 곧장 삼랑진이 나온다. 낙동강이 동쪽에서 밀양강을 받아들인 직후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군 진격을 막은 첫 자리 작원 ..

가본 곳 2020.04.14

이어지는 선인들의 낙동강 동범문화

[하천과 문화] (6) 맑게 놀았으니 멋진 이야기 남기지 않으랴 낙동강 뱃놀이 즐겨 절경 보고 시문 짓기 임진왜란 영웅들의 풍류 그뒤 꾸준히 언급 1607년 정월의 용화산 동범은 대단한 것이었다. 함안·창녕 일대 낙동강에서 벌인 뱃놀이는 용화산 동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그런데 용화산 동범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에는 이전 뱃놀이가 나오지 않는 반면 이후 뱃놀이 기록에는 용화산 동범이 빠짐없이 나온다. 그만큼 용화산 동범이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창녕·함안 두 고을에서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을 맞아 분투한 한강 정구, 젊은 나이 당대 우뚝한 학자였던 여헌 장현광, 임진왜란 왜적에 맞서 싸웠던 경술 박충후 당시 함안군수가 이끌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가본 곳 2020.04.14

탈원전 반대, 미래세대에 득일까 독일까

두산중 위기와 탈원전 두산중공업 구조조정 사태를 두고 정당과 후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있다. 두산중공업 본사가 있는 창원 성산 선거구에서 보면 이렇다. 미래통합당 강기윤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정책으로 두산중공업과 협력사가 심각한 경영위기를 맞고 있다"며 "'탈원전 피해 보전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기호 2번이다. 기호 6번 정의당 여영국 후보는 "정부는 더는 기업 결정에 개입하긴 어렵다는 무책임한 말로 피하지 말아야 한다"며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기업 보상을 위한 '에너지 전환 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기호 7번 민중당 석영철 후보는 "총수 일가가 경영 책임을 인정하고 사재 출연으로 경영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며 "국가도 발전산업과 원전사업을 민영화함..

임진왜란 영웅들의 유쾌한 뱃놀이

[하천과 문화] (5) 간결한 술상에 상하 구분 없어 400년 전 선비들 용화산 아래 뱃놀이 청년 조임도 글로 남겨, 숙연 화목했다 낙동강은 모래로 유명하다. 경남에서는 지류인 황강이나 남강 유역에 모래톱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다만 본류는 창녕 남지와 창원 동읍 본포 일대가 예전에 그랬다. 4대 강 사업으로 바닥이 6m 파이고 보에 흐름을 막히기 전에는. 400년 전에 일대 선비들이 낙동강에 크게 모여 뱃놀이를 벌였다. 1607년 음력 1월 27~29일이니 임진왜란 끝나고 8년 2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좌장을 맡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1552~1611)·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

가본 곳 2020.04.13

망우당 곽재우의 강, 정암강과 기음강

[하천과 문화] (3) 곽재우 기강나루서 첫 승리 정암진'대첩'으로 희망 안겨 지역민, 정암루 만들어 기억 광탄·정암강·풍탄·기음강 남강 이름 지역마다 달라져 주변 풍경·물 흐름 등 영향 ◇지역 따라 바뀌는 강 이름 물줄기의 이름이 지역마다 달라지는 시절이 있었다. 남강도 그랬다. 경호강과 덕천강 두 물이 합해지면 광탄(廣灘)이 되었다. 토종말로는 너우내가 된다. 지금 남강댐으로 수몰된 진주시 판문·귀곡동 일대가 합수지점이었다. 광탄을 지나면서 이름이 남강(南江)으로 바뀌는데 진주성을 남쪽으로 휘돌아 흐르기 때문이었다. 진주를 지난 남강은 함안과 의령을 남북으로 가른다. 그렇게 20리쯤 흐르면 솥바위나루=정암진(鼎巖津)에 이른다. 의령의 관문인데 1935년 정암철교 준공 이전에는 배편이 유일한 교통수단이..

가본 곳 2020.04.13

함안 용화산 일대의 낙동강

[하천과 문화] (4) 빼어난 정취 품은 '느린 흐름' 남지·용화산서 보면 산야가 에워싼 호수 닮은 강 경양대 주변 상선·나그네 행렬 선비·의병이 쉬며 수양한 정자 곳곳에 ◇호수 같은 낙동강 남강은 낙동강의 가장 큰 지류다.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경남 서부와 남부를 흘러내린다. 이렇게 여러 물줄기를 쓸어담은 남강은 함안과 의령을 남북으로 가르며 낙동강에 들어선다. 남강이 낙동강에 보태는 수량은 전체의 25%가량을 차지한다. 남강을 받아들이면서 낙동강이 호수같이 잔잔해지는 까닭이다. 게다가 남해바다의 밀물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는 지금도 바닷물고기인 웅어가 잡힐 정도다. 강물이 밀물에 막혀 흐름이 더욱 느려지는 것이다. 낙동강은 풍경조차 호수와 닮았다. 멀리 바다를 향하는 물줄기는 동남쪽으..

가본 곳 2020.04.12

50년 전 대한민국 야생 표범의 최후

'표범' 하면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특히 30대 이하 젊은 세대는 아프리카에나 사는 동물 정도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표범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경남에. 야생 표범이 마지막으로 잡혀 죽은 데가 바로 경남이기도 하다. 3월 4일은 그로부터 딱 50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숨을 거둔 최후의 한국 표범을 기리는 마음을 이 글에 담았다. 그것은 경남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대한민국 야생에서 잡힌 최후의 표범이었다. 1970년 3월 6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함안에서 18세쯤 되는 수표범이 잡혀 화제. 지난 4일 상오 10시쯤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뒷산에 노루 사냥갔던 설욱종씨(50·부산시 서구 부민동1가 18) 등 3명은 범의 발자국을 따라..

시쓰고 노래하며 토종씨앗 지키는 청년 김예슬

경남 합천 황매산 자락 가회면 목곡마을에는 서정홍이라는 시인농부가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로 유명한데 그밖에도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내었다.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을 했고 90년대부터는 농민운동을 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으로 시작하여 1998년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었으며 2001년 도시로 돌아와 우리농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을 하다가 2005년 다시 농촌에 가서 지금껏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아내와 함께 소농을 하면서 뜻맞는 이들과 공동체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실공동체라 했다가 2008년에 열매지기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었다. 열매지기는 열매를 지키는 농부들이라는 뜻이다. 2020년 현재 합천군 가회면의 대기·원동·동대·연동·목곡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아홉 가구 스물일곱..

개항기 마산 문헌 하나 찾았다 '마산번창기'

오래 전부터 이름 정도만 알고 못 찾았던 자료인데 이번에 드디어 찾았다. 慶南志稿第一編 馬山繁昌記. 明治41年, 1908년 마산의 耕浦堂에서 발행한 책으로 저자는 諏方武骨.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헌인 馬山港誌(1926)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은 광고면 등을 포함해 148면 분량으로 서언, 마산의 대관, 관공서, 지질및기후, 위생및의사, 교육기관, 신도및종교, 교통, 호구, 경제사정, 마산잡록잡황, 마산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안내서 성격이다. 1900년대의 마산에 대한 일본 문헌으로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 여러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자료가 처음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

일제강점기 마산의 일본 사찰 앞에 서 있던 누각의 정체?

넓은 공터 왼편으로 이층 누각이 서 있고 그 너머로 마산만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완월동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曹洞宗 福壽寺라는 절에서 본 풍경이다. 예전에 이 사진을 보면서 복수사는 일본 사찰인데 저 이층 누각은 뭐지? 분명히 조선식인데? 원래 저 자리에 있었던 건물인가? 저런 건물이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곤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고 있다가 최근에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누각은 원래 鎭東에 있었는데 '진동학교조합'에서 이 절에 기부 이건하였고 복수사는 이를 山門으로 삼아 觀海樓란 이름을 붙이고 1928년 5월에 낙성식 및 관음제를 성대히 열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판매할 정도로 당시 마산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하게 됐다. ..

코로나 보도, 제발 기본이라도 좀 지키자

어이없는 코로나 사태 언론보도 "다 너 때문이야, 나와 딸이 감염된 건, 다 너 때문이라고." 윤다혜 기자가 2월 13일 송고한 기사의 첫 문장이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중국 저장성에 위치한 '코로나19' 격리 병실에 울린 여성의 외침엔 원망이 가득했다. 아내와 딸을 감염시킨 장본인은 의사로 일하고 있던 남편 양모 씨였다. 그는 후난성과 후베이성이 접하고 있는 작은 도시의 의사였다." 좀 어이 없지 않은가? 뉴스 발신지가 '서울=뉴스1'으로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윤다혜 기자가 중국 특파원도 아니고, 기사 속 그 작은 도시의 격리병실을 방문취재한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이 여성의 외침을 직접인용부호(" ") 속에 담을 수 있을까? 기사 속에 "현지 의료진은 전했다"는 대목이 나오긴 하는데, 그 ..

2만 5000원 짜리 희망연대 백서의 의미

포털 다음이나 네이버 검색창에 ‘친독재’라는 키워드를 넣어본다. ‘다음 책’에서는 유일하게, ‘네이버 책’에서는 6권의 책 중 맨 위에 가 나온다. ‘친일’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약 70종의 책이 나오는데, 물론 그 속에도 이 책이 포함되어 있다. 클릭하면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등 8개 인터넷서점에서 판매 중이라는 안내와 함께 책 소개, 저자 소개, 목차, 출판사 서평 등이 펼쳐진다. 이 책에는 ‘열린사회희망연대 20주년 기념 백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백서(白書)’란 말은 17세기 영국 정부가 발간한 외교정책 보고서에서 나왔다. 즉 정부가 펴낸 공식보고서의 표지가 흰색이었던 데서 비롯됐다. 이후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단체가 내는 활동보고서에도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화했다. 지역사회..

일본군 '위안부'와 민간인학살은 다른 사건이 아니다

“4283년(1950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1960년 7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가 국가를 상대로 낸 고발장) “김영명(23) 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조사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공공연한 성폭행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부’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

'디지털 박물관'도 없는 경남의 12개 시·군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다 '디지털 향토문화 전자대전'이라는 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창원시의 경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주시의 경우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되고 있지요. 예를 들어 '민주성지 마산'이라는 문구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네이버는 '지식백과', 다음은 '백과사전' 항목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민주 성지가 된 마산'이라는 글이 뜹니다. 그걸 클릭하면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의 해당 글이 열리죠. '마산 민간인학살'이라는 검색어를 넣어봅니다. 그러면 역시 백과사전 항목에 '마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과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글이 상위에 뜹니다. 이 또한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올려져 있는 콘텐츠입니다. 현대사의 두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디지털문화..

유시민 알릴레오에 대한 KBS 성재호 사회부장의 반박

애초부터 출연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구성물도 아니고, 취재였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취재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는 뉴스를 하려는 것이었지, ‘시청자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게 아닙니다. MB 집사가 아무리 MB를 감싸며 말을 하더라도 ‘DAS’는 MB 것이라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보도하는 게 저널리스트라 생각합니다. 맥락을 왜곡했다고 합니다. 우선 당시 녹취록 전문을 첨부합니다. 꼭 한 달 전이네요. 지금은 많은 사실 관계가 더 드러났지만 당시 조국 장관과 부인은 사모펀드 투자과정에서 운용사의 투자처와 투자 내역 등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 사전에 알고 돈을 넣었다면 자본시장법이나 공직자윤리법 등의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인터뷰 취재 과정에서 부인 정 교..

괴물 기자, 망나니 검사

경남도민일보 창간 전 몸담았던 신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워낙 낮은 임금에다, 그마저도 체불되기 일쑤였다. 편집권 독립은커녕 최소한의 자율성도 없었다. 중요한 기사를 빼거나 키울 권한은 모두 사장에게 있었다. 기자 출신이었던 사장은 직접 사회부장이나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내가 입사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비밀리에 노동조합 결성이 추진됐다. 회사 인근 다른 빌딩 강당을 빌려 기습적으로 창립총회를 열었다. 나는 '무임소 부장'이란 직책을 맡았고, 수개월간 사측과 갈등을 거쳐 전면파업에 들어갔을 땐 사무국장이 되어있었다. 당시 노조가 내세운 구호는 '부실자본 축출, 독립언론 건설'이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지지방문이 이어졌다. 한 달 후 파업이 끝났을 땐 사주가 바뀌었고 월급이 올랐으며, 제한적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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