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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114

민간인학살을 다룬 하아무 소설 '꽃분이'

소설가 하아무와 함께 2008년 함양에서 민간인학살 피해 전수조사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가 나왔다. 하아무 소설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직후의 혼란상, 한국전쟁 보도연맹 학살, 빨치산 토벌과정의 학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중의 억울한 희생이 있었다. 소설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이 겪은 고통에 초점을 맞췄다. 같은 작업을 했지만 나는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그 아픔을 디테일하게, 그러면서도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 덤덤한 문체가 오히려 읽는 이의 마음을 더 아프게 후벼 판다. 만해문학상에 빛나는 조갑상의 에 이어 민간인학살을 다룬 또 하나의 명작 소설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하아무의 .

검찰의 돌변한 태도, 민간인학살 유족들이 참 걱정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여러 분야에서 비상식적인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태도다. 얼마 전 한 유족을 만났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발발 후 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끌려간 후 학살되었는데, 이후 알고 보니 군법회의에 회부돼 국방경비법 위반이란 죄명으로 학살됐다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불법 학살이라는 진실규명 결정을 했고, 대한민국 사법부 역시 재심을 통해 국방경비법 위반죄를 무죄로 판결한 바 있다. 그게 불과 2년 전인 2020년의 일이다. 당시 대법원은 형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검찰은 이들 희생자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 역시 당연히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사건에 대..

민간인학살 희생자 창원 위령탑 건립취지문에 대한 설명

민간인학살 희생자 창원위령탑이 2022년 11월 26일 제막됐다. 참 오래 걸렸다. 72년만에 희생자 이름이 비석에 새겨졌다. 건립취지문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기에 이렇게 말씀드렸다. -반갑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매년 합동추모제를 지내면서 학살 희생자의 성함이, 천에 인쇄된 글자로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면서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최근 이태원 참사 합동분향소에서, 위패와 영정도 없이 ‘사고 사망자’라는 글자만 놓여 있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이처럼 그 죽음의 책임자는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걸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유족들이 한데 모이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학살이 일어난지 무려 72년 만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이름이 새겨진 비석과 비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꽃다발 들고 황점순 할머니 찾아뵙는 날

모처럼 반가운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지난달 이 지면을 통해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이귀순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제기한 형사 재심청구 소송이 검찰의 재항고로 인해 7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망백(望百)이 넘은 할머니들이 끝내 판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탄식이었죠. 그 후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도 대법원에 호소문을 냈더군요. “특히 4명의 피고인 중 제일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망 이용순의 처 황점순 할머니’는 돌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노파로 지금 한 요양원에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는데, 남편의 형사 재심 재판이라도 보고 세상을 떠나실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길 호소합니다.” 이런 글이 대법관들에게 전해..

황점순 이귀순 두 할머니 이야기

황점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찾아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진동 애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김 기잡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 김 기자가~" 하며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27년생인 할머니는 올해로 만 93세가 되셨다. 열아홉에 진동면 곡안리로 시집와 스물둘에 아들 이상섭을 낳았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과 함께 남편 이용순과 아들을 한국군과 미군의 학살로 잃었다. 그때 남편은 스물네 살, 아들은 고작 두 살이었다. 남편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학살 현장에서 잃었다. 시조부, ..

일본군 '위안부'와 민간인학살은 다른 사건이 아니다

“4283년(1950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1960년 7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가 국가를 상대로 낸 고발장) “김영명(23) 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조사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공공연한 성폭행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부’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

1950년생 황정둘의 경우

1950년생 황정둘. 우리 나이로 70세. 그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죽었다. 20세였던 엄마 이귀순은 지금 90이 되었다. 열일곱 살에 마산 진전면 곡안리로 시집와 정둘을 임신했을 때 남편 황치영을 잃었다. 남편 나이는 22세였다. 남편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열서너 마지기 농사를 지으면서도 멀리 고성의 저수지 조성공사 현장까지 막노동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고 7월초 진전지서에서 부른다며 집을 나선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내 지서 갔다가 저녁 때 (실안골에 풀어놓은) 소 찾아 오꾸마.” 이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가 지서에 불려간 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맹원이기 때문이었다. 흔히 보련원이라 불렀다. 이승만 정권은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

기자들도 몰랐던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의 진실

‘거창사건 등’이 아니라 ‘산청·함양·거창사건’이다 지난 5월 11일자 인터넷판에 아래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역사 속 오늘] 58년 전인 1960년 5월 11일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유가족, 사건 당시 면장 살해제목대로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였다. 문제는 본문의 이 대목이었다.“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거창군 신원면에 이어 거창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등 일대 8개 마을로 퍼져갔다.”명백히 틀린 사실이다. 이 사건은 국군 11사단이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에서 395명을 학살하면서 시작된다. 이 군인들은 이어 함양군 유림면으로 넘어가 310명을 학살한다. 이렇게 산청과 함양에서 705명을 죽이고 난 후, 이틀 뒤인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을..

기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는 용기

얼마 전 친구가 페이스북에 링크해준 기사를 읽다가 황당한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역사를 엉터리로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오늘'이라는 코너에서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을 다룬 기사였는데요. 바로 이 대목이 문제였습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거창군 신원면에 이어 거창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등 일대 8개 마을로 퍼져갔다." 명백히 틀린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국군 11사단이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에서 395명을 학살하면서 시작됩니다. 이 군인들은 이어 함양군 유림면으로 넘어가 310명을 학살합니다. 이렇게 산청과 함양에서 705명을 죽이고 난 후, 이틀 뒤인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을 죽인 것입니다. 따라서 3개 군의 학살을 모두 합쳐 '산청..

민간인학살에 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할 몇 가지

좀 민감한 이야기이긴 하다. 최근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가 제주4.3 관련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 4.3만이 오롯이 독립되어 홀로코스트의 유일무이성에 필적한다고 생각한다면, 죽음 간의 위계를 만들어 다른 죽음을 경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말이 좀 어렵게 들릴 수도 있겠다. 쉽게 말하자면 올해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가 목표로 삼고 있는 '4.3의 전국화와 세계화'는 역설적이게도 '4.3만 내세워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는 부연했다. "여순 사건과 예비검속 사건, 형무소 재소자 사건, 보도연맹 사건, 부역혐의자 사건, 군경토벌 관련 사건, 미군 사건, 적대세력 관련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난 모든 보복성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들을 모두 연결해 하나의 제노사이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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