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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매립과 보전이 맞서는 갈등의 광포만

김훤주 2020. 4. 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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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만 잿빛 대지에 피어난 생명의 보고

 

1999년 새로 생겨난 지명

광포만은 사천 곤양면 중항·환덕·대진리와 서포면 외구·조도리로 둘러싸여 있다. 사천만의 서쪽 부분에 해당된다. 조선 시대에 곤양군이었던 지역을 움푹하게 파고들었다.(사천시가 대체로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통·폐합으로 곤양군과 합해지면서다.)

 

광포만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묵곡·목단·곤양·서포천 넷이다. 지금은 광포만이라는 지명이 횟집이나 부동산소개업체 상호에도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광포만은 낱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사천만의 일부였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광포만으로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맞은편 조도(새섬) 쪽에서 바라본 광포만.

말의 흥망성쇠는 필요에 따라 일어난다. 필요하면 만들어지고 널리 유통되는 것이 말이다. 사천만·광포만 일대를 살피면서 환경 보전에 힘을 쏟는 사람으로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살리는전국교사모임 대표가 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사천환경운동연합 의장을 맡기도 했다.

 

윤 대표는 광포만이라는 낱말을 처음 쓴 때가 1999년이라 했다.

서포면 서포중학교로 부임해 왔는데 당시에는 광포만이라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사천만조차 진주만이라 일컬어지고 있었다. 생태 측면에서 광포만만의 독자적 가치에 주목하게 되면서 광포만이라는 낱말을 만들어 쓰게 되었다. 광포만에서 광포는 안쪽 깊숙한 곤양면 대진리에 있는 포구인데 풍경이 인상 깊고 일대를 대표할 수 있을 듯해서 가져다 썼다.”

 

광포마을은 옛적에는 고령토를 비롯하여 하동·곤양·단성·산청·함양 일대에서 나는 물산을 부산·마산으로 실어 나르는 화물항이었다. 물론 고기잡이배를 부리는 어항 구실도 했다. 화물항은 무거운 동력선이 드나들 수 있어야 하므로 물 밑 수로가 깊어야 한다.

 

동네 어른들은 40년 전인 70년대 중반만 해도 세 길이 넘도록 깊었다고 한다.(깊이가 얕아진 까닭은 아무래도 가화천을 통한 남강댐 방류에 있다.) 지금도 광포에 가면 한 때 제 구실을 톡톡히 했던 창고 건물이 황폐해진 채로 포구에 바짝 붙어 있다.

광포 선착장에 매여 있는 노배. 광포에서 광포만 이름이 나왔다. 옛적에는 고령토 등 하동 이북 내륙에서 나는 산물을 실어나르는 포구였다.

(사천만이 사천만이 아니고 진주만이었다는 것이 지금 보면 이상하다. 하지만 지금 사천의 동쪽을 이루는 옛 사천과 서쪽을 이루는 옛 곤양이 고려·조선 시대에 진주로 편입됐던 적이 있고 1895년에는 사천·곤양 모두 진주부 소속이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지금 사천시의 정중앙에 있는 축동면은 1914년 행정 통·폐합 때까지 진주에 포함되는 지역이었다. 당시 행정지명은 축곡면과 부화곡면이었다. 지금 삼천포 일대도 진주 소속이었다.)

 

사천만 매립과 광포만

윤병렬 대표는 광포만 작명이 사천만 매립을 뚜렷이 인식한 결과라고 말했다.

당시는 산업단지 조성을 위한 갯벌 매립이 사천만 동쪽 부분에 집중되어 본격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천시청은 사천만 바깥에 있는 서포면의 비토섬 일대 갯벌(그때 이미 경지 조성을 위한 매립으로 일부 망가져 있기는 했지만)이 빼어나다고 홍보했다.

맞은편 조도(새섬) 꼭대기에서 바라본 광포만. 광포만 갯벌은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크기다.

사천만 바깥쪽에 있는 비토갯벌 홍보는 사천만 안쪽은 동쪽 부분만 아니라 서쪽 부분까지 합해서 갯벌 전체를 포기하자는 속셈을 담고 있었다. 경관이 그럴 듯한 비토섬 일대만 보전하자는 취지였지. 우리는 그에 맞서 갯벌이 남아 있는 서쪽 부분이라도 제대로 지키자는 심정으로 여기에 광포만이라 이름을 붙이고 널리 쓰기 시작했다.”

 

사천만 매립을 통한 산업단지 조성은 80년대에 시동이 걸렸다. 삼성항공과 대우중공업이 비행기 생산 공장을 사천에 짓기로 결정한 때가 80년대 후반이다. 삼성항공·대우중공업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천으로 들어왔다.(그러다 1997IMF 외환금융위기를 맞아 이 둘에 현대우주항공까지 아울러 1999년 합해진 것이 지금 사천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한국우주항공산업이다.)

갯벌에서는 항아리도 게나 조개 따위를 잡는 도구가 된다. 밀물 때 안에 들어간 게나 조개는 썰몰이 되어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사천제1일반산업단지(사천외국인투자지역 포함, 1991)와 사천제2일반산업단지(사천임대전용산업단지 포함, 1997)가 사천만 동쪽 부분 사천읍·사남면·용현면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밖에 2014년 착공한 용현면 일대의 종포일반산업단지도 해당 지역 갯벌은 이미 매립이 끝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표는 비토갯벌과 광포만 일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비토갯벌은 철새가 잘 찾지 않는 반면 광포만 일대 갯벌을 찾는 철새는 많았다. 철새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하여 먼 거리를 날아다닌다. 철새들 먹을거리가 비토갯벌보다 광포만 갯벌에 더 많다는 얘기다. 철새들이 주로 먹는 크고 작은 조개··물고기는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랫부분을 이룬다. 아래가 망가지면 그 상부 구조는 절로 망가진다.

 

대추귀고둥이 지킨 갯벌

환경운동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광포만이 사천만의 일부이지만 그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값어치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이 곧바로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포만 매립이 추진되면서였다.

길게. 광포만 일대는 길게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사천시청은 2006년부터 대우건설·씨앤중공업 등과 민관 합동(3섹터)방식으로 특수법인을 만들어 광포만일반산업단지를 조성하려고 했다. 2007~12년에 걸쳐 모두 3912억원을 들여 광포만 일대 2598270를 메우고 조선기자재 단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200878일 열린 국토해양부 중앙연안심의위원회에서 공유수면매립계획이 승인받지 못했다. 부결되게 만든 힘은 환경단체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사천환경운동연합과 환경과생명을지키는경남교사모임이 나서 멸종위기야생생물을 광포만에서 찾아내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멸종위기야생생물은 1급이든 2급이든 야생생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호대상이다. 그래서 그 서식지에서는 매립도 개발도 사실상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결과는 대단했다. 노랑부리백로(1검은머리갈매기·흑두루미·재두루미(2),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문화재로 보호를 받는 황조롱이·원앙·검은머리물떼새·매 같은 새들이야 속성상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까 그렇다 쳐도 포유류와 무척추동물에서 예상을 뛰어넘었다.

포유류에서 수달(1(2), 무척추동물에서 기수갈고둥·대추귀고둥·붉은발말똥게·흰발농게·갯게(2)가 살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대추귀고둥은 1000마리 넘게 발견되었다.

 

이런 결과 덕분에 연안심의위에 제출되어 있던 매립 안건이 부결되었고 이는 신문·방송을 통해 지역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게다가 이태 뒤인 2010년에는 광포산단 실시협약 당사자 씨앤중공업이 파산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현실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곡절을 거쳐 2011년부터는 국토해양부(지금 해양수산부)에서 연안습지보호지역 지정을 위한 우선조사 대상지 10군데 가운데 하나로 광포만을 꼽고 관련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 위에서 2017323일에는 경남의 보물 광포만, 생태관광 자원화와 보호구역 지정 가능한가?’를 주제로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사천시청 관계자가 함께한 주민간담회(경남환경운동연합·경남시민환경연구소 공동 주최)가 곤양면사무소에서 열리기도 했다.

 

우리나라 제일 넓은 갯잔디 군락

광포만에는 다른 갯벌과 달리 갯잔디가 아주 넓게 자라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어림잡아도 1만평을 웃돌 것으로 보이는데 낙동강 하구는 물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이보다 넓은 갯잔디 군락은 찾아볼 수 없다.

곤양천 하류 서포면 외구리의 광포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갯잔디 군락지다.

갯잔디는 밀물 때는 잠기고 썰물 때는 드러나는 땅에서 잘 자란다. 해안선이 콘크리트로 망가지지 않고 자연 상태인 갯가에서만 볼 수 있다. 갯잔디는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가장 아래에 놓이는 생물들을 품는다.

 

기수갈고둥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크기는 손톱만하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살고 있는 조개다. 이것들이 먹이가 되어 주어서 세계적인 희귀 철새들이 광포만을 찾는다.

 

갯잔디 군락은 이처럼 철새한테 먹이터·쉼터가 될 뿐 아니라 물고기와 조개·게가 알을 낳는 산란장과 그 어린 새끼들이 자라나는 유치원 역할까지 맡고 있다.

 

광포만을 둘러싼 바다는 농어·대구·전어·참가자미·감성돔·은어 등 물고기가 다양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광포만에는 게도 여러 종류가 있다. 멸종위기야생생물에 포함된 종류들 말고도 칠게·콩게·길게·방게·농게 따위를 흔히 볼 수 있다.

광포만갯잔디 어귀에는 곤양천이 흘러든다.

게들한테는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펄과 함께 뒤섞여 있는 여러 오염물질을 입으로 가져간 다음 개흙은 깨끗한 상태로 뱉어내고 유기물인 오염물질은 삼켜 자신의 먹이로 삼는다.

 

갯잔디는 광포만의 곤양천 유역을 재첩의 새로운 명산지로 만드는 데도 작지 않게 영향을 끼친다. 재첩은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기수역에서 특히 잘 자란다. 광포만 갯잔디는 기수역에 있으면서 민물과 짠물을 두루 정화한다.

 

재첩은 70년대까지만 해도 부산 하단 일대 낙동강 하구에서 가장 많이 잡혔다. 그러다 하구언으로 바닷물이 막히고 강물 오염도 많아지면서 재첩 으뜸 산지 명성은 하동 섬진강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광포만 곤양천이 하동 섬진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하동 섬진강 재첩은 갈수록 씨가 말라간다지만 광포만 곤양천 재첩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사천 곤양면 대진리 일대에서 마주한 광포만갯벌.

사천만 동쪽 부분이 이미 망가졌고 또 망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 서쪽 부분 갯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나게 된 지명 광포만. 광포만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지금처럼 갯잔디와 갯벌을 품은 채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부는 반대가 여전하지만 지역 주민들 대체적인 분위기는 그런 쪽으로 가고 있다. 물론 장담은 아직 이르다. 사천시청에 더하여 경상남도청까지 개발에 나설 태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천 항공산업이 발전하려면 공장이 더 들어와야 하는데, 사천만 동쪽 부분은 이미 포화상태이기에 앞으로는 서쪽으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다고 그이들은 여기고 있는 것이다.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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