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습지 경관
화포천 물줄기는 김해 진례면에서 시작된다. 진례면은 김해가 창원과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대암산·용지봉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펼쳐 내리는 지역이다. 이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진례저수지 등에 들렀다가 골짜기를 빠져나오기까지 3km 정도 걸린다. 여기서 낙동강까지 화포천은 너른 들판을 끼고 북동쪽으로 15km 남짓을 또다시 구불구불 나아간다.
골짜기를 벗어나 들판과 함께하는 화포천은 크게 둘로 나뉜다. 진영읍 본산리까지 상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 100m 안팎으로 좁다. 반면 본산리에서 낙동강까지 하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가 최대 700m에 이를 정도로 널찍하다.
화포천습지라고 일컫는 부분은 하류쪽 두 번째 구간이다. 하천 바닥에 이루어진 하상(河床)습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이쪽저쪽 제방 사이 평균 너비를 250m로 줄잡아도 길이가 8000m이니까 넓이가 200만㎡=60만 평 가량이다.
화포천습지의 가장 큰 특징은 경관이 빼어나다는 데 있다. 어디서 보아도 넉넉하고 그윽한 모습이다. 물줄기 가장자리에 왕버들이 낮게 엎드려 몽글몽글해져 있고, 물길 한가운데로는 마름·생이가래·자라풀·개구리밥이 둥둥 뜬 채로 조용하다. 물 밑 땅에 뿌리를 내린 줄이나 갈대는 절반이 물에 잠기어서는 물결보다 더 섬세하게 바람에 반응한다. 그런 풍경 위로 오리·왜가리·백로·해오라기가 소리 없이 날아다닌다. 겨울에는 오리·기러기가 떼로 몰려 장관을 이루었고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고니들도 날개를 펴서 우아했다.
화포천습지는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 쪽에서부터 첫 번째가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화포교까지이고 두 번째는 화포교에서 장재교까지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장재교에서 한림배수장을 지나 낙동강과 합류하는 모정마을까지다. 이들 세 구간은 저마다 특징이 뚜렷하다.
첫 구간은 모두 농사를 짓지 않은 채로 '화포천습지생태공원'으로 공식 지정되어 관리를 받고 있는 덕분에 습지다운 경관이 제대로 보전되고 있다. 둘째 구간은 우리 모두가 습지에 무지하던 시절 쓰레기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운동장으로 탈바꿈한 데도 있고 사람이 들어가 농사를 짓는 데도 곳곳에 있지만 습지 경관은 그럭저럭 여전하다. 세 번째 구간에서는 화포천이 다시 좁아지는데 2006년 낙동강 합류 지점에 있는 양·배수장 능력을 높이는 공사를 할 때 이른바 ‘하상 정비’를 하는 바람에 습지 경관을 많이 잃었었는데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끝머리에 들어서면 풍경이 삭막하다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런 느낌을 허물어줄 반전을 화포천은 두 개 숨겨 놓고 있다. 하나는 배수장 너머에서 낙동강과 화포천이 몸을 섞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결은 풍성하고 수풀은 윤택하며 느낌은 고즈넉하다. 건너편 내달리는 산들도 강변 풍경과 잘 어울린다. 세상을 벗어나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복잡한 머리 헹구며 한참 동안 앉아 있어도 좋은 자리다.
광주 노씨 김해 입향조의 모정비각
다른 하나는 모정비각(慕禎碑閣) 근처다. 화포천에 붙어선 낭떠러지에 놓여 있는데 배롱나무와 푸조나무쯤으로 짐작되는 높이 자란 나무들이 멋지다. 비각 안 빗돌에는 '贈吏曺判書海隱盧公之遺墟'(증이조판서해은노공지유허)라 적혀 있다. 여기 적힌 대로라면 주인공은 호가 '해은'인 노씨 집안 사람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이조판서 벼슬을 받았다. 따로 찾아봤더니 이름은 한석(漢錫)으로 광주 노씨 김해 입향조(入鄕祖=고장에 가장 먼저 들어와 살았던 조상)라고 한다. 병자호란(1636년)이 지난 어느 해에 창녕에서 낙동강을 건너 여기로 옮겨오면서 마을 이름을 모정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보통 ‘모정’이라 하면 볏짚 같은 풀로 지붕을 이은 띠집(茅亭)을 이르지만 여기 모정은 다르다. 우러러 받들 모(慕)를 앞에 쓰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뜻하는 정(禎)을 뒤에 쓴다. 지금이야 단순히 사대주의의 산물로 여겨도 그만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잘라 말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을 맞아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주었다. 덕분에 의주까지 달아났던 임금 선조가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그 바람에 힘이 빠지면서 청나라가 만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크게 일으킬 수 있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신흥 청나라는 조선을 두 차례 쳐들어왔다. 지는 해 명나라를 버리고 뜨는 해 청나라를 따랐다면 당하지 않았을 침략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묘호란(1627)을 겪고서는 청나라를 형으로 섬겨야 했으며 병자호란을 치른 다음에는 형이 아니라 군주(君主)로 떠받들어야 했다.
청나라는 이렇게 조선을 확실하게 무릎 꿇린 다음 명나라 정벌에 본격 들어갔고, 명나라는 결국 1644년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멸망했다. 이런 국면에서도 조선의 선비들은 청나라가 아니라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지만 마음만은 그러했다.
이런 인식이 여기 마을 이름을 모정으로 삼도록 만들었다. 지금 보기에는 어쩌면 우스꽝스럽고 한편으로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거기 스며들어 있는 절절함까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에 빠진 조선은 건져내었지만 정작 자기자신은 기진맥진하여 맥없이 떠내려가는 명나라였으니 말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최초·유일 대통령
어쨌거나 모정마을 일대에 자리 잡은 광주 노씨 집안은 20세기 중반에 봉하마을에서 노무현을 낳았다. 노무현은 2003년부터 5년 동안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뒤 2008년 2월 25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퇴임한 뒤 고향에서 살아가는 대통령을 처음 얻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달아났고 박정희는 현직에서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이명박은 임기를 마친 뒤 계속 서울에서 살았다. 반쪽짜리인 윤보선·최규하와 현직에서 탄핵당한 박근혜는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주민들과 환경운동에 나섰다. 농약과 쓰레기로 숨통이 막힌 화포천을 되살리고 봉하 들녘 논·밭을 친환경농업으로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퇴임 첫 해 봉하 들녘에 농약 대신 오리를 집어넣는 농사로 가을에 2만4600평 논에서 쌀 55t을 거둘 수 있었다.
오리농법으로 지은 봉하쌀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덕분에 봉하 들녘의 친환경농업은 계속 면적을 넓힐 수 있었다. 친환경농업은 생태연못·무논과 더불어 봉하 들녘을 생물다양성을 갖춘 습지로 재탄생시켰다. 미꾸라지·드렁허리 같은 물고기와 논고동, 여러 벌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먹을거리가 풍성해지니까 철새들도 더 많이 찾아오게 되었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황새 봉순이
절정은 2014년 3월 18일 황새 ‘봉순이’의 출현이다. 황새는 우리나라 자연에서는 이미 멸종된 상태였다. 봉순이는 ‘봉하마을을 찾아온 암컷’ 이라는 뜻이다. 봉순이 발목에는 ‘J0051’이라 적힌 가락지가 끼어 있다. 일본 효고현 도요오카시 이즈시정(町)에서 2012년 4월 6일 태어났다는 표지다.
봉순이는 800km를 날아 대한해협을 건넌 첫 일본 황새가 되었다.(2015년 2월 8일에는 제주도에서 도요오카 출신 수컷 황새가 발견되어 ‘제동이’가 되었고 같은 해 7월 15일에는 울산 태화강에서도 도요오카 출신 수컷 황새가 눈에 띄어 ‘울산이’가 되었다.)
그해 봉순이는 봉하 들녘과 화포천 일대에서 9월까지 머물렀다. 그런 다음 하동 섬진강과 충남 서산 천수만으로 옮겨갔다. 이듬해에는 3월 9일 봉하 들녘을 다시 찾더니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렇듯 이미 멸종된 황새가 다시 찾아왔다는 것은 들녘과 주변 생태가 그만큼 청정해진 마을이라는 얘기가 되고 거기 농산물 또한 건강하고 깨끗하다는 증거가 된다. 2016년에도 봉순이는 비슷하게 옮겨다니면서 4월 7일 봉하 들녘을 찾아 사나흘 묵었다.
하지만 2017년에는 봉순이가 봉하마을을 찾지 않았다. 대신 2월 26일 함안 악양둑방 근처 남강변, 2월 28일~3월 1일 창녕 우포늪, 3월 8일 창원 주남저수지, 3월 12일 마산 봉암갯벌을 찾았다. 봉하 들녘이 2016년부터 먹이터로 합당한 조건을 잃고 있기 때문이지 싶다. 농업진흥구역(절대농지) 유지를 반대하는 쪽에서 중장비로 흙을 쌓아 형질변경도 하고 2008년 이후로는 쓰지 않았던 농약까지 쳤다고 한다. ‘사람 싸움에 황새등 터지는 격’이라고 할까.
봉하마을에서 화포천 건너편 화포천습지생태학습관 쪽 제방에는 봉순이를 위하여 만든 인공 둥지가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비행접시처럼 생겼는데 2015년에는 봉순이가 한 번씩 머물곤 했던 자리다. 그렇지만 2017년부터는 봉순이가 머물지 않았다. 봉하마을과 화포천을 아예 찾지 않았던 탓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지금도 텅 비어 있는 이 인공 둥지에 봉순이가 찾아와 머물게 될까.
호미 든 관음보살 두 분
봉하마을 뒤편 봉화산에 오르면 이런 사연과 문화를 품은 봉하 들녘과 화포천이 한 눈에 담긴다.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에 봉화산더러 ‘낮으면서도 높은 산’이라 했다. 해발 150m밖에 안 되니 낮은 산이고 그렇지만 마루에 서면 사방 50리가 두루 보이니 높은 산이라는 얘기다.
정상을 향해 오르면 ‘호미 든 관음상’이 먼저 눈에 띈다. 관음보살은 보통 왼손으로 보리수를 쥐고 오른손으로 약병을 들지만 여기 관음보살은 약병에 보리수를 꽂아 왼손에 맡기고 오른손으로는 호미를 들었다. 호미 든 관음상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헐벗음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중반부터 봉하마을 일대에서 불교도들이 벌였던 농촌개척의 상징이다. 1959년 세워졌는데 높이는 열두 자다. 그보다 위쪽 정상에도 관음보살이 하나 있다. 스물넉 자 높이로 아래쪽 관음상보다 두 배 높다. 1999년 10월 두 번째로 세워진 것이다.
두 분 관음보살은 크기 말고도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새 보살은 천연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옛 보살은 속이 텅텅 울리므로 인공 재질임이 분명하다. 새 보살은 얼굴에 웃음이 흐르고 살도 통통하지만 옛 보살은 웃음기가 덜하고 살도 오르지 않았다. 새 보살은 호미 쥔 손이 내려와 있으나 옛 보살은 올라가 있다. 새 보살은 한 발이 앞으로 나와 있으나 옛 보살은 두 발이 나란하다.
세월이 흘러 후대 미술사가들이 두 보살을 비교·평가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옛 보살과 새 보살의 서로 다른 모습은 제각각 황폐한 50년대와 풍요로운 90년대의 반영이다. 새 보살은 옛 보살과 달리 오른발을 앞으로 역동적으로 내밀었으며 호미 또한 바짝 당겨 들지 않고 긴장을 풀어 슬쩍 늘어뜨려 쥐었는데 이는 자신감의 표현이라 하겠다.”
정상에 서면 멀리 화포천과 가까이 봉하 들녘은 물론 노 대통령 묘역과 복원한 생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자택 등도 한 눈에 들어온다. 너른 마당에 편평하고 납작한 돌을 얹은 산소는 현대판 고인돌이고 생가는 일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흙·돌·짚을 쓴 생태 건축물이다.
화포천 하류 한림정 쪽에서 봉하마을로 향하는 들머리 영강사에도 이와 비슷한 억새집이 있다.(정식 명칭은 ‘김해장방리갈대집’이지만 사실은 억새집이다. 화포천 습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적어도 100살은 넘은 이 집은 큰물이 져도 잠기지 않도록 비탈 높은 데에 앉았는데 이 또한 노무현 대통령 생가와 마찬가지로 습지 주변에 흔한 재료를 썼다는 특징이 있다.
내년 2019년 5월 23일이면 노무현 대통령 세상 떠난 지 10년째가 된다. 행여 봉하마을을 찾거들랑 마을만 돌아다니지 말고 노무현 생전에 가꾸던 봉하 들녘과 화포천습지까지 함께 둘러볼 일이다. 거기서 자라는 풀과 나무 사이에서 진하게 풍기는 ‘사람 사는 세상’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는지 모르니까 말이다.
김훤주
※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가본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 산을 넘어 바다로 내려가는 가화천 물길 (0) | 2020.07.28 |
---|---|
13. 인공 남강댐에 생겨난 자연 습지들 (0) | 2020.06.09 |
11. 매립과 보전이 맞서는 갈등의 광포만 (0) | 2020.04.21 |
10. 사라질 뻔했던 마산만 봉암갯벌 (0) | 2020.04.19 |
9. 검포갯벌, 오랜 세월 쌓인 삶의 흔적 (2) | 2020.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