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m 고원에 어린

옛 사람들의 고단한 몸부림

 

우리나라 최대 규모 고산습지

단조늪은 영축산 산마루(1081m)에서 시작한다. 산마루는 북쪽을 향해 단조봉~신불재~신불산~간월재~간월산으로 이어진다. 동쪽과 남쪽은 둘 다 깎아지른 벼랑이다. 차이점이라면 동쪽으로는 울산이라는 도시가 펼쳐지고 남쪽으로는 불보사찰 통도사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정도뿐이다. 반면 서쪽은 평평한 들판이다. 떨기나무와 덩굴나무가 둘레를 에워싸고 있으며 가운데는 억새가 무리지어 흔들리고 있다.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지대인데다가 바람까지 사철 드세게 불어 큰키나무는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다.

단조늪은 길이가 영축산 마루에서 단조봉까지 1100m 남짓이고 너비는 마루금에서 서쪽으로 300~500m 정도 된다. 우리나라 고산습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특별하게 물이 날 것 같지 않은 지세인데도 바닥이 언제나 젖어 있다. 영축산 정상 바로 아래에서 억새평원을 보면 습지가 단박에 구분된다. 여름에는 주변보다 좀 더 보드라운 풀이 우묵하게 자라나 있기 때문이고 가을에는 그 풀들이 발목께에서 자빠진 채로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자빠진 방향은 대체로 물이 흘러내리는 아래쪽이지만 때로는 산마루 쪽으로 거슬러오르는 축도 적지 않다. 겉으로 보면 억새 일색이지만 억새 아래쪽에는 진퍼리새처럼 키가 작은 풀들이 촘촘하다. 가만 헤아려보니 이런 자리가 최소 일곱 군데였다.

단조늪의 여름 풍경. 한가운데 움푹하게 꺼진 자리에 습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발에 밟히는 바닥이 질펀하다. 곳곳에 물웅덩이가 있고 그런 물웅덩이를 서로 이어주는 물길도 나 있다. 웅덩이 바닥에는 생명을 다한 풀들이 채 썩지 못한 채 깔려 있다. 이처럼 죽은 식물의 섬유질들은 바닥에 두툼하게 깔리면서 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해준다. 쓰러진 풀들에서 나온 철분 때문에 물은 붉은빛을 띠고 있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물길의 바닥에는 흙과 풀이 남아 있었다. 지형이 남북으로는 편평한 때문으로 여겨졌다. 동서로 이어지는 물길은 자갈이나 바위가 드러날 정도로 흙과 풀이 패어 나가고 없었다. 아무래도 동서로는 비탈져 있기 때문이겠다.

양산시청의 기록을 보면 단조늪에는 퍽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여태까지 183가지 식물과 64가지 동물이 발견되었다. 습지식물은 방울고랭이·동의나물·물매화·흰범꼬리 등 30가지 남짓이고, 고산식물은 동자꽃·노랑제비꽃·쥐오줌풀·잠자리란 등 24가지이다. 설맹초·솔나리·개족도리풀 같은 희귀식물도 있고 진퍼리새·방울고랭이·박새풀은 억새처럼 군락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잠깐 동안 대충 둘러보았는데도 골풀·매자기·꽃창포·원추리·줄풀·중나리·범의꼬리·세모고랭이 등등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단조늪 습지에서 자라던 풀이 쓰러져 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왼쪽에 보인다.

 

지역민들 생계 잇던 터전

영축산은 영남알프스의 일부분이다. 양산~울산~경주~밀양~청도로 넌출넌출 이어지는 해발 1000m 안팎 산들이 스위스의 알프스 준봉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졌다. 영남알프스는 영축산 등을 사람들이 등산하는 대상으로 파악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등산이 우리 일상 속에서 레저로 대중화된 시점은 일러도 1970년대이다. 50년대나 60년대에는 영축산~신불산~간월산 등을 두고 영남알프스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했다 해도 몇몇 동호인만 그리 일컬었을 것이다. 이전부터 영축산은 등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일대 지역 주민들이 삶을 꾸려나가는 터전이었을 따름이다.

단조늪의 여름 풍경. 한가운데 움푹하게 꺼진 자리에 습지가 있다.

소설가 배성동이 2013년 펴낸 책 <영남 알프스 오디세이>를 보면 그런 사정이 곳곳에 나온다. “단조천지에는 열 개의 질펀한 못이 있었다. …… 온갖 기화요초와 나물로 반질반질하다가도 우수기에 접어들면 모를 심어둔 모판처럼 변했다. …… 화전민이 당근과 감자를 심었던 백발등 못본디기로 어정어정 걸어갔다.”(86) 단조천지(天池)는 단조늪의 옛 이름이다. 또 백발등은 단조늪 안에 있는 언덕이며 못본디기는 그 아래 있는 습지를 이른다. “백발등 산발치에서 단조천지를 굽어보았다. 못본디기와 물풍지, 진풀못, 피못은 분간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여섯 개의 천지 못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90)

신불산에서 바라본 단조늪. 오목하게 꺼져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하얀 부분이 습지이다.

배성동은 이렇게도 적었다. “반달비, 곤달비, 호망추, 배뱁추, 더덕, 고사리, 꼬치미가 지천으로 깔려, 봄이면 산이 물비늘처럼 반짝거렸다. …… 학이댁(77)마을 아낙들이 산나물을 얼마나 캤던지, 나물 보따리를 이고 오지 못해 굴러 오더라라고 말했다.”(83) “유갑순(81) 할머니는 소를 몰고 올랐더랬다. …… 새벽 다섯 시면 …… 나섰어. 어린 나는 다리가 짧아 험한 칼등을 타기 어려웠지만 소는 오빠보다 잘 걷더라라고 했다. ‘새피(억새)가 지천이라 소 등의 양쪽에 새피를 지워 야물게 매서 가야 하는데 어설픈 사람은 하지도 못해라고 다부진 어투로 말했다. 늙은 소는 넉 단을 매고 오빠는 한 단을 겨우 맸다.”(98)

단조늪 일대는 말하자면 과거 산에서 입살이를 하던 주민들의 생명줄이었다. 사내들은 억새밭에 올라 억새를 베어 날랐고, 아낙들은 나물을 캤다. …… 동네방네 아이들이 소를 몰고 오르던 소몰이 길이기도 했다.”(102) 봄과 여름의 억새는 소여물로 쓰였고 가을과 겨울의 억새는 초가지붕을 이는 데 쓰였다. 억새밭에서 캐어낸 나물은 식구들 식량과 의복이 되었고 자식들 책가방과 교과서가 되었다.

늦가을이 되자 습지에서 자라던 풀이 쓰러져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어린 소나무는 습지가 거의 육지화되었음을 일러준다.

 

옛 모습 그대로 단조성

단조늪 일대 억새는 해마다 불에 탔다. “이씨는 화전민들이 땅을 일구기 위해 만리성 억새만디에 횃불을 들고 올라가 불을 질렀어. 억새밭이 만리성 안에 있어 불이 산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억새밭만 홀라당 태웠지라며 불 이야기를 실감나게 했다. 빠짝 마른 억새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단조천지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 꽃이고 억새고 불에 타고 나면 이듬해는 나물 천지가 되었다.”(92) 여기 나오는 이씨는 농부시인 이우정(65)이다. 이씨의 아버지 이질용(100)씨는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잃을 당시 입산한 의병의 후손”(84)이다.

등산로 오른편으로 낭떠러지를 따라 전투용으로 쌓아놓은 돌무더기가 보인다.

그런데도 억새밭이 만리성 안에있기 때문에 불이 산 전체로 번지지 않았다. 만리성은 단조성(丹鳥城)의 다른 이름이다. 언제 쌓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너비가 5~10m이고 높이는 1~4m이다. 이런 돌무더기가 억새밭을 둘러싸고 있으니 마음 놓고 불을 질러도 되었던 것이다. 단조성은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편에도 나온다. 언양이 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되어 있는데 양산 북쪽에 바로 붙어 있다. “취서산 고성(鷲棲山 古城):산 위에 있는데 단조성(丹鳥城)이라 일컬었다. 둘레가 4050자이다.” 취서산은 영축산의 다른 이름이다.

어쨌거나 단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진을 치고 싸웠던 자리라고 한다. 1971년 간행된 <울산울주지>에 관련 기록이 있다. 대충 이렇다. 신광윤(辛光胤 1549~1617)이 아들 신전을 데리고 고을 사람 유광서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의용장(義勇將) 신광윤깃발을 앞세우고 단조봉에 기대어 진을 쳤다. 의병들은 담을 쌓고 구덩이를 판 다음 군데군데 돌무더기도 쌓았다.(이는 지금도 금강골쪽 낭떠러지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아울러 매복하고 위장을 하면서 적의 머리를 베고 무기를 많이 빼앗았다.

사람 무릎 높이로 돌을 쌓아올려 놓은 데가 군데군데 보인다. 비박을 할 때 필요한 시설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사정을 짐작해 보면서 일대 지형까지 헤아려보면 여기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을 사람들이 모여 피란을 하고 농성은 했음직하다. 만약 고을 사람들한테 싸울 의지가 있었다 해도 오히려 왜적이 이 험준한 산중까지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당시 왜적은 동래에 이어 경주까지 사흘만에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서울로 진격하기 바빴으니까. 신광윤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1605년에 선무원종공신 3등에 봉해졌다. 1~3등 합해 18명뿐인 선무공신은 정식 공신이다. 반면 1~3등 모두 더하면 9060명이나 되는 선무원종공신은 공신 또는 공신 대우로 보면 맞다.

단조성. 습지는 그 왼쪽과 오른쪽에 모두 있다.

단조봉에서 영축산 산마루 동쪽 아래 300m 즈음에 이르기까지 성터를 따라 걸었다. 마지막 끝나는 자리에는 자연 암석 위에 반듯하게 쌓은 석성 모양이 10m 정도 보였다. 하지만 나머지는 돌들이 모두 되는 대로 대중없이 겹쳐져 있었다. 처음부터 이랬는지 아니면 원래는 반듯하게 쌓았지만 나중에 허물어져 이렇게 되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네모 또는 동그라미 모양으로 안쪽 움푹하도록 해서 사람 무릎 높이 정도까지 돌을 포개어 쌓은 데도 스무 군데 정도 있었다. 움푹한 안쪽이 너른 경우는 사람이 네댓 들어갈 만큼 되었다. 1948~1953년 일대에서 빨치산이 활동했다니까 그들이 묵었던 자리일까 싶었지만 그냥 짐작일 뿐이다. 이밖에 서너 군데 기둥 모양으로 3~4m 쌓아올려져 있었는데 쓰임새를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영남 알프스 오디세이>에 나오는대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썼던 망루(望樓)나 봉수대일까?

 

단조성이 고마운 단조늪

누가 어떤 연유로 쌓았는지, 임진왜란 당시에 전쟁터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단조늪한테는 이 단조성이 분명 고마운 존재다. 단조성이 울타리가 되어 단조늪을 보듬고 있지 않았다면(물론 습지가 성곽 바깥에도 있기는 하지만) 비가 올 때마다 크나 작으나 흙과 모래와 자갈과 바위가 쓸려 아래로 내려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억새평원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깊은 골짜기가 생겼을 것이다. 이렇게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2003년 태풍 매미와 2006년 태풍 에위니아가 경남 산악 곳곳에 남긴 크고작은 산사태만 떠올려 보아도 바로 짐작이 되는 일이다.

단조늪을 둘러싸고 있는 단조성의 늦가을 모습. 멀리 산꼭대기까지 산성이 이어져 있다.
오른쪽 맨땅이 방화선. 빗물을 아래로 바로 빠져나가게 하여 단조늪이 메마르도록 악영향을 끼친다.

1980년대에 둘러쳐진 방화선까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방화선은 너비가 대체로 10m를 넘는다. 불이 나더라도 그 불길이 다른 데로 번지지 않도록 초목과 지표를 함께 긁어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맨땅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런 데에는 당연히 풀이나 나무가 없다. 풀이나 나무가 없으므로 그 뿌리가 흙을 붙잡아 주는 기능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단조성 석성이 단조늪 테두리를 둘러치지 않았다면 이 방화선은 갖은 토사를 있는 그대로 떠내려 보내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많이 망가지기는 했지만 단조늪이 지금처럼이라도 살아남은 것은 바로 이런 단조성 덕분이다. 다만 중간 즈음 낮은 쪽은 작은 개울처럼 보일 정도로 많이 파여 나갔다. 방화선으로 드러난 맨땅과 함께 복원이 시급한 부분이지 싶다.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어린 소나무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습지가 물기를 잃고 육지화될 때 가장 먼저 찾아와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소나무이니까.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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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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