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 3562

부마는 항쟁, 광주는 운동? 역사용어 재정립 필요

저도 소속돼 있는 단체(언론시국회의)에서 이런 성명을 냈습니다. 헌법 개정안에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을 담겠다고 하는데요. 부마는 '항쟁'이고, 광주는 '운동'이냐는 문제의식에서 5.18 또한 '광주민주항쟁'으로 정명(正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저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요. 아예 역사용어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정명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3.1운동'을 영어로 표기하면 '쓰리포인트원 스포츠(또는 무브먼트)'가 되는데, 좀 웃기지 않나요? 게다가 3월 1일 하루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수개월 또는 일년 내내 일어났던 독립항쟁이었죠. 그래서 저는 '기미독립항쟁' 정도가 어떨까 싶습니다.또 일관성도 없죠. 3.1운동은 최초 시작일, 4.19는 마산3.15와 4.11을 거쳐 서울에서 ..

채현국 선생이 ‘시시하게 살아라‘고 한 까닭

어쩌다보니 채현국 선생(1935-2021) 5주기가 지나버렸다. 선생의 삶을 되돌아보며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본다.“시시한 삶이 행복한 삶이다.”“특별하거나 조금이라도 별나려하면 행복은 쭈그러지고 괴로움이 시작된다.”생전 채현국(1935~2021) 선생이 늘 하던 말이다. 실제 그는 서른여덟 젊은 나이에 ‘특별한 삶’을 스스로 포기했다.1960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채현국은 이듬해 중앙방송(현 KBS)에 연출직(현 PD)으로 입사했다. 그러나 방송이 군사정권의 선전도구로 철저히 이용당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그 후 아버지 채기엽(1907~1988)이 강원도 삼척군 도계에서 운영하고 있던 부도 직전의 탄광 사업에 합류, 간신히 부도를 막아내고 굴지의 광산업자가 되었다. ..

란12.3 다큐 영화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영화 을 보러 갔다. 뻔히 아는 결말임에도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96분 내내 잠시도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여러 장면에서 울컥 눈물이 나왔다. 고마워서...아, 다큐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인터뷰도 없고 나레이션도 없는 다큐. 과하지 않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상의 조화, 빠른 진행, 아름답고도 긴박감 넘치는 음악, 긴장 속의 웃음 포인트까지...그런데, 11:50 메가박스 경남대 6관에는 관객이 우리 부부 둘 뿐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에 관객이 우리뿐이라니..그래서 이 글이나마 올린다. 돈이 아깝지 않다. 꼭 극장에서 보시라. #란123

김부겸 KTX 사건의 전말

한 남자 승객이 KTX 특실에서 여자 승무원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예매한 좌석표에 뭔가 문제가 있는듯했다. 그의 목소리에 자던 승객들이 다 깰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승객은 모두 그 남성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한 채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여자 승무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그는 승무원이 다른 좌석을 만들어주고 웃으면서 죄송하다고 했는데도 "웃어? 지금?" 하면서 "지금 이게 웃을 문제냐"고 소리를 질렀다.이때 보다못한 한 남성이 "그렇게 큰 소리를 치려면 통로에 나가서 하라"고 한 마디 했다.그랬더니 그 승객은 "당신이 뭔데 그래!" 하며 또 소리를 질렀다.-한 남성 "당신 지금 갑질하는 거요. 왜 승무원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혀?"-그 승객 "당신이 뭔데! 공무원이라도 돼? 뭐야 당신!"..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이야기

“나는 시체를 못받겠으니 이기붕의 집에 갖다 주라.”죽은 아들의 시체를 빼돌려 가져온 경찰에게 어머니가 이를 악물며 한 말이다. 이기붕은 3.15부정선거의 원흉, 아들은 김주열 열사, 어머니는 권찬주 여사다.생때 같은 자식의 주검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또 있을까?66년 전 오늘이었다. 4월 11일 김주열(당시 마산상고 신입생) 열사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날이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3월 15일 실종된 아들을 찾아 온 마산을 헤집고 다니며 들쑤셔 놓았다. 특히 시청 앞 연못의 물을 다 퍼낸 뒤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닌 것은 마산 시민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이 때문에 마산에선 ‘김주열’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런 상황에서 김주..

3.15의거도 헌법 전문에 넣어야 할까요?

3.15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오늘이 4.19혁명 기념일이네요. 4.19정신은 이미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수록돼 있는데요. 이번에 헌법 개정을 통해 5.18광주와 부마민주항쟁도 전문에 넣자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죠.그런데 그 헌법개정안을 발의한 우원식 국회의장이 마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3.15의거도 넣어야 한다"고 소리치며 몽니를 부린 단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마산 3.15의거기념사업회인데요.사실 4.19혁명은 대구 2.28, 대전 3.8과 더불어 4.19혁명을 촉발시킨 민주의거가 맞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날 최대규모의 시민이 봉기한 4.11민주항쟁도 빼놓을 수 없죠.그런데 지금까지 3.15가 헌법 전문에 들어가지 않았고 이번 논의에서도 빠진 것은, ..

김주열 열사 시신유기범 박종표의 경악할 정체

내친 김에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란 인간에 대해서도 말해야 겠다.3.15의거 당시 박종표는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었다. 3월 15일 저녁 7시 20분경 박종표는 무학국민학교 앞 3000여 명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 10여 명을 지휘, 로켓포탄 형태의 최루탄 발사를 명령했다. 이 최루탄에 오른쪽 눈을 관통당한 김주열이 죽었다.박종표는 이날 밤 10시경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말을 듣고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보고해 "알아서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길로 지프차에 김주열의 시신을 싣고 마산세관 앞 해변가에서 철사줄로 큰 돌을 가슴에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이 과정은 이후 재판과정에서 박종표의 자백과 당시 지프차 운전수 김덕모 ..

방치했던 소셜미디어 X(트위터)를 다시 시작한 이유

페북이 가두리양식장이라면 X(트위터)는 원양어업2009년 개설 후 한 삼사 년 열심히 하다가 10년 넘게 방치해두었는데, 계정이 살아있고 팔로워도 남아있었다.어차피 쓰는 글, 좀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 싶어 얼마 전부터 다시 X를 시작했다.그런데 예전의 트위터와 달라진 게 많다. 예전에는 140자 짧은 글만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글자수 제한이 거의 없고 '아티클'에 쓰면 무제한 긴 글도 가능하다. 이티클은 사실상 블로그 기능을 X에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게다가 그록이라는 AI를 붙여 각각의 게시글이 가짜정보 또는 왜곡 과장인지 여부를 체크해주기도 한다. 또 외국어 자동번역으로 전 세계 모든 언어를 한국어로 보여준다. 덕분에 한국 대통령의 게시글에 대한 세계인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김장하 선생은 『미움받을 용기』를 읽었을까

김주완(『줬으면 그만이지』 저자) 『미움받을 용기』(인플루엔셜, 2014)을 다시 꺼내 읽었다.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쓴 이 책은 알프레드 아들러 심리학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200만 부,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이 팔린 책이라는데, 애초 베스트셀러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나로선 굳이 사서 읽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대학생이던 아들녀석이 사서 읽는 바람에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싶어 보다가 매료되었던 책이다. 그때가 5~6년 전이다. 몇 년 뒤 진주 어른 김장하 선생을 취재하던 중 그분의 삶에서 아들러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는 보시를 실천해온 분이 김장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선생에게 살아오면..

6월항쟁 옛 진주시청 앞 시위 사진은 이영환 씨 작품

[이제야 말한다] 사실 이 사진은 전 경남신문 사진부장 이영환(2015년 작고) 님의 작품이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에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경남신문에 싣지 못했던 사진이기도 하다. 2007년, 내가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경남도민일보에 '87년 경남 항쟁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장기 기획연재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80년부터 87년까지 경남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촘촘히 재생하는 나름 쉽지 않은 취재였다. 그 과정에 이 사진의 원본 필름이 누군가를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다. '내가 누군지, 사진 출처를 밝히지 말라'는 조건과 함께였다. 나름 이해는 됐다. 경쟁업체의 기자가 그 경쟁업체의 신문사 기자에게 자신의 사진을 제공하는 건 '해사행위'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6월항쟁 당시 진주..

함안총쇄록 답사기 (24) 머물러 달라고 만인산, 보내기 아쉬워 선정비

오횡묵이 함안군수로 있었던 기간은 3년 10개월 남짓이다. 1889년 4월 21일 자인에서 들어와 1893년 2월 27일 고성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오횡묵은 지역사회의 여러 폐단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멋대로 설치며 횡포를 부리는 일부 양반부터 먼저 때려잡았다. 아전과 결탁하여 백성들 등쳐먹고 군수를 능멸하는 적폐 중의 적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빼돌리거나 떼어먹어 엄청나게 밀려 있던 조세도 한 해만에 별 탈 없이 정리했다. 아전·장교와 관노·사령들도 농간을 부리지 못하도록 제대로 다잡았다. 근본인 농사를 위해서도 잘되도록 돌보느라 크게 애썼다. 들판에 나가 보이는대로 돈과 담배(남)와 바늘(여)을 나누어주면서 열심히 일하라고 타일렀다. 농사철을 앞두고는 제방 쌓는 공사를 몸소 감독하였다. 몹시 가물 때..

함안총쇄록 답사기 (23) 함안 명물 감·수박·연꽃, 그때도 명물이었나

함안은 감이 유명하다. 가을이면 대봉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겨울이면 깎아 말린 곶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크기도 작지 않고 달콤하기도 처지지 않는다. 여항면과 함안면·가야읍 일대에서 많이 난다. 수박도 이름이 높다. 옛날에는 여름에만 났지만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겨울에도 쏟아져 나온다. 함안이 전국 생산의 10%를 차지하는데 군북면·법수면과 대산면·가야읍이 주산지다. 연꽃도 손꼽힌다. ‘법수옥수홍련’과 ‘아라홍련’의 본고장이다. 법수면 옥수늪 일대에서 자생하던 법수옥수홍련은 1100년 전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라홍련은 고려시대 연밥이 성산산성 연못에 잠들어 있다가 700년 세월을 건너뛰어 피어났다. 라그렇다면 이렇게 풍성한 감과 수박과 연꽃이 오횡묵 시절에는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 감은 ..

함안총쇄록 답사기 (22) 객사는 없어졌어도 향교는 옛날 그대로

원님 통치의 주무대였고 임금 상징하던 객사는 가뭇없이 사라졌어도 유교 이념 확산 거점 향교는 오횡묵이 보던 모습 간직, 우람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증인 조선은 민국(民國)이 아니라 왕국(王國)이었다. 일반 국민이 아닌 임금이 주권자였다. 임금을 상징하는 객사(客舍)가 고을에서 동헌보다 더 크고 높았던 까닭이다. 객사는 한가운데 높은 자리에 임금을 대신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있었다. 조선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가 지배하는 나라이기도 했다. 향교(鄕校)는 요즘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되지만 교육 기능만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공자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이었다. 여러 의식과 행사로 양반과 일반 백성에 대한 수령의 영향력을 넓히는 문화·행정 기능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님에게 객사와 향교는 관아..

그야말로 옛날식 도리깨의 기억

1. 오랜만에 본 옛날 그 도리깨 며칠 전 나는 고성 바닷가를 걷고 있었다. 아침에 선선할 때 나섰지만 날씨는 금세 더워졌다. 바람은 시원했으나 햇볕이 뜨거웠다. 모터배 아닌 노배라도 나타날까 싶어 바다에 눈길을 주고 걷는데 어디선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탁 탁.” “퍽 퍽.”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도리깨로 보리 타작을 하는구나.’ 고개를 돌려 언덕 위를 올려보았다. 할머니 한 분이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다듬고 있고 할아버지 한 분이 서서 도리깨를 돌리고 있었다. 쇠나 플라스틱으로 조립한 요즘식 도리깨가 아니고 대나무로 얽은 옛날식 도리깨였다. ‘그렇지, 요즘 도리깨로는 저런 소리가 안 나지.’ 2. 도리깨로 콩타작을 하면 나는 저 도리깨를 기억하고 있다. 옛날 시골 ..

함안총쇄록 답사기 (21) 습지 정경 속 보와 제방

큰물 거뜬히 막아낸 함안 번영 일등공신 내륙인데도 어촌 형성되고 낚시 생업도 많아 습지 많아 침수는 잦았지만 가뭄은 덜했고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낙동강과 남강이 함안을 감싸고 흐르기 때문이다. 오횡묵이 1889년 4월 22일 읽은 에도 나온다. ‘형승(形勝)’ 조항에서 가장 먼저 “낙동강과 풍탄(楓灘)이 북쪽에 가로 놓여 있다”고 했다. 풍탄은 함안군 법수면과 의령군 정곡면 사이 여울이지만 여기서는 함안에 걸쳐 흐르는 남강 전체를 이른다. ‘형승’ 조항은 이어서 “여항산과 파산이 남쪽을 누르고 있다”고 적었다. 얼핏 보면 산은 습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높든 낮든 산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물줄기..

잊어볼 결심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었다. SNS에는 존경스러운 스승에 관한 글들이 넘쳐났다. 하지만 그런 스승이 없다는 글도 많았다. 고통의 기억을 남긴 선생님들에 관한 얘기도 적지 않았다. 나는 혼자만 그렇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1. 국민학교 때 1970년 3월 국민학교 입학한 다음 날부터 맞기 시작했다. 대답할 때 왼손을 들지 않았다고 맞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왼손잡이다. 왼손으로 필기를 하니까 당연히 “저요” 하면서 오른손을 들었는데 왼손이 아니라고 얻어터졌다. 한강철교도 있었다. 비오는 날이었는데 운동장으로 내몰렸다. 60명 남짓 여덟 살 아이들은 엎드려뻗쳐를 하고 어깨 위에 다른 친구의 발을 올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강철교는 “앞으로 십 보”, “우..

함안총쇄록 답사기 (20) 기우제 지낸 자리 지금 모습은

험준한 산·절벽서 제사 올리며 백성 생각해 규모 최소화 하늘은 무심 “물 대기 고르게” 타일러도 날마다 다투는 송사 기우제 지낸 여항산·와룡정·주물진 등 실제와 거의 같은 묘사 가뭄은 모내기가 끝나는 5월부터 어린 벼가 쑥쑥 자라야 하는 6월까지 거의 두 달에 걸쳐 이어졌다. 하늘이 내린 재앙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농토가 갈라지고 곡식이 타들어갔으며 사람들 마음 또한 그와 마찬가지였다. 오횡묵은 만사 제쳐두고 윤6월 2일부터 이틀에 한 번씩 기우제를 지냈다. 그 하루 전날부터 기우제가 끝날 때까지 공무는 일절 보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무는 조세를 거두거나 형벌을 집행하는 등 백성들을 족치는 일이었다. 반면 백성들과 더불어 가뭄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고 이어졌다. 신통..

가본 곳 2023.05.30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국이 잘 보이는 까닭은

오랜 이민생활 끝에 알게 된 타산지석 전직 기자 필력으로 흥미롭게 녹여내 21년 전, 13년 차 기자 성우제는 장애를 가진 자녀 때문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아무렇게나 방치되는 장애인을 캐나다에서는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배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잘나가는 시사잡지 기자 생활을 접고 월급을 모은 돈과 아파트 판 돈을 갖고 캐나다로 날아갔다. 원래 이민이란 게 몇십 년 살아온 자신의 뿌리를 통째 뽑아 옮기는 존재의 결단이다. 그래서 새로 잔뿌리를 내리지도 못한 이민 초기는 새로운 정착과 생존을 위한 고달픈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그에게는 아이를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뚜렷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 몸부림은 더욱 절박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영업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 작업으..

함안총쇄록 답사기 (19) 비 올 때까지 지냈던 코리안기우제

가물 땐 깜깜무소식 비 올 땐 억수처럼 경국대전은 최대 12차례 규정했지만 오횡묵은 공식 13차례 비공식 2차례 “몰래 쓴 무덤 부정 탄다”며 모두 파내고 신령·용 얽힌 영험처 옮겨 다니며 기도 해갈된 뒤엔 닷새 폭우로 수재도 겪어 가뭄은 예로부터 인간 사회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엄청난 자연재해였다. 그나마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나름대로 대응할 방책이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그대로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난을 맞닥뜨리면 대부분 백성들은 처음에는 나름 이겨내려고 애를 쓰지만 한계를 넘으면 임금이나 수령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조세를 거두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집행했으면 그에 걸맞게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이나 수령인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효과가 있든 ..

함안총쇄록 답사기 (18) 지역민 사랑 독차지한 원효암·의상대

남녀노소 즐겨 찾으니 절 문턱 맨들맨들 소박한 당시 유일 사찰 칠석날 어린아이도 치성 수령도 시주에 적극 동참 원효암(元曉菴)과 의상대(義相臺)는 여항산이 북쪽으로 뻗어내리는 미산(眉山) 골짜기 가파른 비탈에 붙어 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일대에서 북한군과 유엔군이 격전을 벌이는 바람에 불에 타서 칠성각(七星閣)만 빼고 옛날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원효암과 의상대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하다. 하지만 130년 전 오횡묵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콘크리트 좁은 도로를 한참 올라가야 하는 깊은 산속인데도 그때는 그랬다. 오횡묵은 여기서 재를 지내기도 하였고 일반 백성들 또한 친근하게 여기며 즐겨 드나들었다. 오횡묵이 치성 들였던 자리 1890년 1월 22일 아침 오횡묵은 왕대비의 생일을 ..

가본 곳 2023.05.2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