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과 문화] (5)
간결한 술상에 상하 구분 없어
400년 전 선비들 용화산 아래 뱃놀이
청년 조임도 글로 남겨, 숙연 화목했다
낙동강은 모래로 유명하다. 경남에서는 지류인 황강이나 남강 유역에 모래톱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다만 본류는 창녕 남지와 창원 동읍 본포 일대가 예전에 그랬다. 4대 강 사업으로 바닥이 6m 파이고 보에 흐름을 막히기 전에는.
400년 전에 일대 선비들이 낙동강에 크게 모여 뱃놀이를 벌였다. 1607년 음력 1월 27~29일이니 임진왜란 끝나고 8년 2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좌장을 맡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1552~1611)·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세 사람이 뒤를 이었다.
모임 이름은 정구가 용화산하동범(龍華山下同泛)이라 붙였다. 용화산은 남강이 낙동강에 드는 남쪽에 있다. 동범은 여럿이 하는 뱃놀이다. 함안 선비 이명고를 시켜 동범에 참여한 35명의 이름을 적게 하고 <용화산하동범록(錄)>이라 했다.
동범 말석에 참여했던 24살 청년 간송당 조임도가 1620년 '용화산하동범록 추서(追序)'를 썼다. 함께했던 종매부 34살 안정에게서 동범록을 얻어본 뒤였다. 성명을 새 종이에 옮겨쓰고 화공을 구하여 뱃놀이를 그리고 책을 만든 과정을 적었다.
'추서'를 보면 이렇다. 정구·장현광 일행이 경북 성주에서 배타고 와서 저녁에 곽재우의 창녕 망우정에 묵었다. 이튿날 아침 망우정에서 나와 함안 내내(남지철교 근처)에 올랐다. 주위 산천의 경치와 암벽의 기이함을 살펴본 뒤 돌아와 쉬었다.
31명(함안 14, 영산 10, 창녕 1, 현풍 1, 성주 2, 고령 1, 출신 불명 2)이 더 모였는데 배가 좁아 다 타지 못했다. 조식·조방 형제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신초 등이 술잔을 돌렸다. 술상은 간결하고 예의를 갖추었으며 화락·경건하여 시끄러운 웃음도 없고 장난스럽지도 않아 숙연하고 화목하였다.(한시를 쓰고 노래를 하였다는 기록은 안 보이지만 그래도 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녁이 되어 한강이 가마를 타고 먼저 잠자리로 갔다. 곽재우와 박충후도 각각 망우정과 관아로 돌아갔다. 배에 탔던 사람들도 흩어졌다. 제자 10명 남짓과 함안 고을 자제들이 남아 나루에 유숙하면서 정구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 정구·장현광이 강 건너 북으로 가면서 동범이 마무리되었다.
청년 간송당은 동범에서 정구의 영웅호걸다운 재덕 영호재덕(英豪才德), 장현광의 따뜻하고 두터운 기상 혼후기상(渾厚氣像), 곽재우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흉금 쇄탈흉금(灑脫胸襟)을 보았다. 이런 인물들과 세상을 함께 살면서 같은 배를 타고 몸소 뵈었으니 대단했던 것이다. "정말 한 시대의 훌륭한 모임이었고 인간세상에 장한 일이었다."
용화산하동범지도(之圖)도 있다. '추서'를 쓸 때 화공이 그린 그림이 원본인 듯한데 1758년 간행된 <기락편방(沂洛編芳)>에 실려 있다. 기락이 낙동강이니까 '낙동강의 아름다운 이야기' 정도 된다.
경승 여덟을 상류서부터 차례로 넣고 오언절구를 붙였다. 용화산 훌륭한 모임 용화승집(龍華勝集), 청송사 저녁 종소리 청송모경(靑松暮磬), 도흥보에서 돌을 찾음 도흥수석(道興搜石), 내내촌의 맑음을 감상함 내내청상(柰內淸賞), 경양대의 기이함을 자세히 봄 경양기촉(景釀奇矚), 웃개에 떠다니는 돛단배 우포추범(藕浦追帆),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 평사낙안(平沙落雁), 창암=망우정에서 함께 배를 탐 창암동주(蒼巖同舟)다.
조임도가 쓴 취정록(就正錄)을 보면 유쾌한 장면이 나온다.
"곽재우가 웃으며 '내가 보기에는 여헌이 한강보다 낫다'고 한강 정구에게 말했다. 한강이 '망우당의 소견이 옳소'라 답하고는 여헌 장현광을 장하게 칭찬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성경침이 좌중에서 손을 저으며 '먼저 그런 말씀부터 마시오. 내게는 다만 스승이 있을 뿐이오' 말했다. 이후경도 곽재우를 보면서 '망우당의 의논은 어리석음이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서로 한바탕 재미있게 말씀들을 하였다."
곽재우는 9살 많은 정구에게 대놓고 솔직하게 말을 했다. 정구는 이를 고깝게 듣지 않고 11살 아래 후배 정현광을 듬뿍 칭찬했다.
이런 가운데 곽재우보다 9살 많은 성경침과 6살 아래인 이후경이 끼어들어 한 명은 깎아내리지 말라 하고 또 한 명은 헛소리 말라 했다. 스승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상하 구분 않고 흉허물 없이 터놓고 말해도 되는 즐거운 풍류요 문화였다.
동범의 중심 네 명 가운데 셋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 정구는 1592년 강원도 통천군수 시절 왜적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최초로 돌렸고 왜적 핍박을 받아 금강산에서 자살한 하릉군(선조의 형)의 시신을 찾아 염습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인 사실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정도고 박충후는 경북 상주 함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아 싸웠다. 장현광은 당시 모친상중이었는데 왜적을 피해 구미 금오산으로 숨었다.
정구는 1580~81년 창녕현감, 1586~87년 함안군수를 지낼 때 지역에 선정을 펼친 인연이 있다. 또 장현광을 "뒷날 우리 사문의 스승이 될 사람"이라며 지역의 젊은 선비들과 관계를 맺어주기도 했다.
남은 31명에서 무기를 든 인물은 신초(1549~1618), 이숙(1550~1615), 노극홍(1553~1625), 조방(1557~1638), 박진영(1568~1641), 이명념(1571~?), 신응(1572~1609) 7명이다.
나머지는 참전 기록이 없다. 먼저 만20살 이상은 12명이다. 이들에게는 임진왜란 당시 나이가 60살 이상으로 많거나(이길 65살·성경침 60살) 부모처자와 더불어 피란한(조식·신방즙·이후경·이도자 등) 사정이 있었다.
이 중 유해(1565~1612)는 누나가 왜적에게 죽는 모습을 숨어 지켜보아야 했다. 한편 조식·조방 형제의 경우는 가문 내부 역할 분담이 보인다. 장자 조식은 가문 보전을 위하여 가솔을 데리고 피란했고 차남 조방은 곽재우 휘하에서 왜적 격퇴에 힘을 쏟았다.
10대 이하로도 곽재우의 아들 곽형(1578~1612)을 비롯해 12명이 있었다. 전란은 끝났지만 풍찬노숙의 쓰라림이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었을 시절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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