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내륙습지'의 함의

우포늪 사지포제방 언덕 위 250살 넘은 팽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우포늪 전경.

창녕 우포늪은 우리나라 내륙습지 가운데 가장 크다. 우포·목포·사지포·쪽지벌 넷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포는 1278285, 목포는 53284, 사지포는 364731, 쪽지벌은 139626. 모두 더하면 2312926, 대략 70만 평인데 20122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면적은 주변까지 포함하여 3배가 넘는 850.

 

우포늪은 토평천이 낳았다. 토평천은 창녕에서 가장 높은 화왕산과 그 북쪽 열왕산에서 흘러내려 고암면 청간마을에서 물줄기를 제대로 이룬다. 토평천은 비탈진 골짜기를 빠르게 흐르다가 고암면 중대·도야마을에서 중대천·도야천을 만나면서 느려진다.

우포늪의 일부인 사지포늪. 이태리포플러가 독특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함께 흐르던 흙·모래·자갈·돌들이 쌓여 평평하고 너른 벌판이 생겼고 사람들은 이를 논밭으로 일구었다. 논밭은 대지면 효정·모산리를 지나 창산교 하류까지 이어진다.

 

환경부가 정한 우포늪 습지보호지역의 공식 시작지점은 창산교 다리이다. 굳이 따지자면 우포늪은 1km 남짓 더 내려가야 만난다. 습지보호지역에서는 농약·화학비료를 쓸 수 없고 낚시질도 할 수 없다. 습지보호는 바로 맞닥뜨려 하는 대신 거리를 두고 해야 나쁜 물질을 넉넉하게 걸러낼 수 있다.

 

습지보호지역이 공식 끝나는 지점도 마찬가지다. 우포늪의 막내격인 쪽지벌을 한참 지난 2.5km 즈음이다. 우포늪을 해칠 수 있는 인간 활동을 그만큼 멀리 떼어놓으려는 뜻이겠다.

 

생각해 보면 우포늪도 바로 위쪽 논밭과 다를 바가 없다. 두 곳 다 평평하고 널찍하다. 예전에는 수풀 우묵하게 자라는 다 같은 습지였다. 그럼에도 왜 위쪽은 논밭이 되고 아래쪽은 옛날 그대로 습지로 남았을까?

 

간단하다. 홍수 시기 낙동강이 역류하는 정도에 따라 농지와 습지의 경계가 결정되었다. 아래쪽은 큰물이 지면 토평천이 넘쳐흘러 범람하기 때문에 농지로 개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쪽은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기에 개간이 가능했다.

우포늪 사지포제방에서 언덕에 오르면 250살 넘은 팽나무가 나온다. 여기서 쪽지벌 쪽을 바라보면 아득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낙동강 건너편 함안은 습지가 창녕보다 더 많았다. 지금은 함안은 습지를 대부분 잃었고 창녕은 그렇지 않다. 왜일까? 가장 큰 차이는 창녕에서는 없어진 그 습지가 대부분 농지로 바뀌었지만 함안에서는 대부분 주택이나 공장이 되었다는 데 있다.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이 201412월 펴낸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우포늪-소벌·나무벌·모래벌·쪽지벌> 42~47쪽을 정리하면 이렇다. “1918년에서 2009년 사이 창녕 습지는 783에서 350433줄었다. 그 원인을 알아봤더니 92%가 농경지(제방 포함)로 바뀌었고 나머지 8%는 도로였다.”

 

함안 쪽은 이런 자료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냥 듣고 본 것만으로도 공장·주택용 매립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포늪 사지포제방 언덕 위 250살 넘은 팽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는 우포늪의 또다른 모습.

공장·주택은 옆에 습지가 없어도 되지만(어쩌면 없을수록 좋지만) 농경지는 습지가 가까이 있을수록 물을 공급받을 수 있으니까 좋다. 함안에서는 습지를 메워 주택과 공장을 지으면서 옆에 있던 습지까지 없앴다면 창녕에서는 습지를 개간하여 거의 전부 농지로 만들면서 옆에 있던 습지는 농사짓는 데 활용하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습지를 논밭으로 활용하는 것은 시대 상황에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남게 된 습지를 계속 보전하는 데에도 어쩌면 보탬이 된다는 얘기이겠다.

 

신당마을에 남은 독특한 기와집

우포늪 둘레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다. 우포늪 가장자리를 개간해 논밭을 장만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에 더해 마름 열매(말밤가시연꽃 씨앗·올방개 뿌리 등등까지 식용으로 썼다. 잉어나 붕어·가물치 같은 물고기는 물론이고 논고둥까지 반찬으로 삼거나 장에 내다팔아 살림살이에 보탰다.

 

사는 집도 마찬가지였다. 주변 야산의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들보를 걸쳤으며 조개껍데기 박힌 진흙을 개어 벽으로 삼았다. 담장을 쌓을 때는 늪바닥 진흙이 굳어 만들어진 이암(泥岩=썩돌)을 진흙과 함께 넣었고 지붕을 이을 때는 볏짚은 물론 갈대와 물억새까지 베어다 말려 썼다.

 

이런 자취들은 세진·장재·신당·주매·대대마을 등 곳곳에 남아 있다. 허물어지고 시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지포와 등을 맞대고 있는 대합면 신당마을에는 구조가 독특한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먼저 앞쪽에는 가운데 대문을 낀 행랑채가 있다. 대문 안쪽에 사랑채가 없고 안채만 오른편에 있다. 소마구는 안채 저쪽에 있고 곳간은 정면 맞은편에 있다.

우포늪 부근 신당마을에 있는 한옥. 부엌이 가운데 있고 방이 겹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가 왼쪽으로 치우쳐 있으면서 비정상적으로 넓은 점 등 구조가 독특하다.

가장 색다른 것은 안채였다. 좁은 공간에 지붕기울기를 지나치게 가파르지 않게 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는데 먼저 용마루가 지나치게 짧았다. 부엌도 좌우에 하나씩 방을 끼고 만들어져 있어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여느 경우와 달랐다. 방 두 개에 앞마루를 달아붙인 것은 예사로웠지만 한가운데 대청이 없고 대신에 안채 왼쪽 전체의 4분의1이 대청마루여서 독특했다.

 

격식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사는 사정에 맞추어 지은 흔적이 뚜렷했다. 이를 통하여 집주인의 신분이나 의식이 살짝 엿보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별난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궁금하여 동네 할매들한테 물었다. 사랑채는 애초 없었고 그래서 행랑채 한 칸이 바깥주인 거처였다고 했다.

 

용마루가 왜 좁은지 대청이 왜 넓은지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만 집주인이 논밭을 대략 30마지기 넘게 하는 작지 않은 자작농이었고 그래서 동네 머슴 둘을 썼다는 얘기는 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구조가 독특하고 지은 지 50년은 충분히 지난 듯해서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애를 쓰면 완전히 허물어지기 전에 어렵지 않게 문화재 공식 지정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물슬천’, 그리고 우포누포

지금 토평천을 옛적에는 물슬천(勿瑟川)이라 했다. ()은 물()을 나타내는 한자 소리고 슬()은 동쪽을 뜻하는 옛적 토종말 ’ ‘’ ‘를 나타내기 위한 한자 소리이며 천()은 시내를 가리키는 한자 뜻이다. 그러므로 큰물(낙동강) 동쪽에 있는 시내가 바로 물슬천이다.(우포와 목포 경계지점에 토평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물슬천의 새 이름 토평천은 이 마을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우포의 옛 지명은 두 개가 확인된다. 하나는 누포(漏浦)이다. <대동여지도>(1861)물슬천과 함께 적혀 있다. ‘샐 누()’는 앞에서 본 슬()과 마찬가지로 동쪽을 이르는 옛 토종말 ’ ‘’ ‘를 적기 위한 한자이고 포()는 물가를 뜻한다.

 

다른 하나는 지금과 같은 우포(牛浦)인데 <지방지도>(1872) 창녕편에 나온다. 우포에서 소 우()’도 옛적 토종말 ’ ‘’ ‘를 나타내기 위하여 종종 불려나오곤 했던 한자다. 그러므로 이 둘을 아우르면 누포가 되었든 우포가 되었든 (낙동강의) 동쪽에 있는 습지를 뜻한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우리말로는 새벌=소벌이다.

 

하지만 지금은 우포가 모양이 소()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더 널리 퍼져 있다. 실제 우포와 목포를 북서쪽 위에서 남동쪽 아래로 가르는 산자락이 소가 입을 벌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대동여지도>에는 물슬천 서쪽에 우항산(牛項山)이 표기되어 있다. 우항은 우리말로 소목이다. 지금 소목마을과 우항산은 앞서 소가 입을 벌린 것 같은 그 산자락에 있다.)

 

이렇게 짐작해 보면 어떨까. 처음에는 어찌되었든 적어도 180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말 발음 가 동쪽을 뜻하는 기능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라 하면 대부분은 소()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게다가 옆 산자락이 소대가리처럼 생기기까지 하였다.

 

덧붙여 일러놓을 것이 있다. <동국여지승람>물슬천’·‘이지포(梨旨浦)’와 함께 나오는 누구택(樓仇澤)’을 두고 우포의 옛 이름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누구택에서 누구(樓仇 또는 樓句)’는 유어면에 있는 미구(尾九 또는 彌九)’마을의 옛 이름이다. 지금 미구마을에는 바로 앞에 팔락늪이 있다. 1860년대 펴낸 <해동지도>에서는 미구지(尾仇池)로 나온다. 그러므로 누구택은 팔락늪=미구지의 옛 이름일 뿐 우포의 옛 이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지포를 두고 습지이리라 지레짐작하고는 그게 지금 어디일까 찾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지포는 특정 습지의 이름이 아니고 나루의 이름이다. 토평천이 낙동강으로 몸을 푸는 어귀에 있었다. 지금도 근처에 이지마을이 있다.

 

팔락정가항

창녕에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라는 인물이 1580~81년 현감으로 있었다. 경북 성주 출신으로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한테서 두루 배웠다.

창녕 우포늪 가까운 미구마을에 있는 팔락정 한강 정구가 현강으로 있을 때 지은 여덜 개 서당 가운데 하나다 현판 앞에 가로 걸린 바지랑대는 동제 지낼 때 쓰는 물건인데 끄트머리에 꿩깃이 꽂혀 있다

정구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선조수정실록> 158041일자 정구를 창녕 현감으로 삼다는 기사를 보면 이렇다.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다가 이때에 비로소 소명을 받고 현으로 부임하였다.”

 

더군다나 묻고 답한 끝에 선조 임금은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명성을 얻은 것이 헛소문이 아니었다.” 당시 수령은 칠사(七事)-농상성(農桑盛호구증(戶口增학교흥(學校興군정수(軍政修부역균(賦役均사송간(詞訟簡간활식(奸猾息)을 잘해야 했다. 정구는 이를 두루 잘해 백성들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했다. 창녕 사람들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한강 정구를 위하여 생사당을 지을 정도였다.

 

정구는 학교흥을 위하여 마을마다 정자를 세우고 서당으로 삼았다. 모두 여덟이었는데 우포늪 가까이 미구마을에 팔락정이 남아 있다. 여기 정자 이름을 팔락(八樂=여덟 가지 즐거움)이라 한 데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

 

맹호도강(猛虎渡江), 원포귀범(遠浦歸帆), 평사낙안(平沙落雁) 등은 다른 데서도 쉽사리 볼 수 있지만 나머지 다섯-전정괴수(前庭槐樹), 후원오죽(後園烏竹), 서교황맥(西郊黃麥), 북지홍련(北池紅蓮), 역수십리(逆水十里)는 그렇지 않다.

 

이후를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팔락정 앞과 뒤에 회화나무와 까만 대나무가 들어서 있고 여기서 바라보는 낙동강 있는 서쪽 들판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네. 북쪽 연못에는 연꽃이 붉게 피었고 (낙동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건만) 마을 앞 냇물은 (남에서 북으로) 십리를 역류하네.’

 

지금도 언덕배기 팔락정에 서면 비슷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다만 낙동강 제방이 너무 높게 쌓였고 홍련이 피던 북지는 아무래도 들판 개간하는 데 들어갔지 싶을 뿐이다.(그래서 지금은 없어진 것이겠지.)

미구마을 물줄기는 가항마을 앞을 지나 토평천까지 이어진다. 가항마을은 말하자면 이 두 줄기 물길에 둘러싸인 형상이다. 한강 정구 시절에는 낙동강이 역류하면 토평천이 마을로 범람해 들어오곤 했다.(그런 내력 때문인지 지금도 마을 앞에 가항늪이 있다.)

 

마을 뒤편 야산 목덜미()가 꺼져 있었기 때문으로 여기를 한강 정구가 돋우게() 했다. 그런 뒤로는 수해가 사라져 집과 논밭이 두루 안전해졌는데 이 때문에 마을 이름이 가항(加項)이 되었다. 조선 시대 토목건축 가운데 지금까지 그 내력이 전해져 오는 드문 사례다.

왕버들이 둘러싸고 있는 창녕 우포늪.

으뜸 쓰임새는 인간이 얻는 위로

이런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우포늪도 지금 우리한테 으뜸 쓰임새는 위안이고 위로다. 사람들 세상살이는 원래부터 고달프게 생겨먹었다. 그런데다 날로 경쟁이 심해지니 몸도 더욱 지치고 마음도 더욱 다친다. 그런 사람들이 우포늪에 스며들어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어루만진다.

 

무엇보다 우포늪이 아름답고 다채롭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우포늪이 사람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습지는 이제 우리나라에 그다지 흔치 않게 되었다. 바닷가 갯벌을 빼고 내륙습지로는 우포늪이 거의 유일하지 싶다.

 

우포늪 나들머리는 곳곳에 있다. 어디에서 들어가든 즐겁게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데는 우포늪생태관이 있는 데이다. 아마 앞으로는 우포늪생태체험장이 있는 데가 더 뜰 것 같기도 하다. 우포늪생태체험장에서 이쪽저쪽 갈래길을 따라 우포늪으로 들어가면 우포늪생태관이 있는 쪽보다 더 멋진 풍경과 탐방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에서보다 좀더 깊숙하게 누리려면 이런 데를 찾으면 된다. 출발점만 적자면 대충 이렇다. 창산교, 징검다리(사초군락), 왕버들군락, 출렁다리. 헤매면 어떻게 하느냐고? 미리 지도를 한 번 보시라. 그렇게 하고서도 현장에서 헷갈리면? 좀 헤매도 된다. 헤매는 것도 우포늪을 누리고 만나는 과정의 하나다. 그래도 아쉽거든 동네사람이든 다른 탐방객이든 아니면 안내원이든 만나지는대로 물으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습지는 사람 아닌 동·식물들의 삶터다. 우포늪에서 멧돼지를 바로 눈앞에서 본 적이 있다. 신당마을과 장재마을 사이 자드락 숲길을 걸어가다가 모랭이를 하나 돌았더니 두 마리가 저기쯤 있었다.

창녕 우포늪 한 켠의 거룻배. 바지랑대로 바닥을 밀어서 움직인다.

40~50년 전 집에서 치던 돼지처럼 색깔이 까맸다. 하나는 덩치가 있고 다른 녀석은 조그마했다. 속으로 우와 멧돼지다!’ 하면서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려고 부스럭거렸다. 그랬더니 바로 인기척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언덕배기로 숨어들어가 버렸다.

 

이런 적도 있다. 아침이라 하기는 늦고 낮이라 하기는 조금 이른 시간대였다. 할배나무를 향해 걸어가면서 사지포둑에서 보았다. 대략 100m 정도 떨어진 습지 안쪽 평지에서 노루가 한 마리 뛰어놀고 있었다. 고라니가 아닌 것은 몸통 여러 곳에 하얀 얼룩이 져 있어서 알 수 있었다.

 

야트막하고 동그마한 물버들들과 그에 조금 못 미치는 수풀 사이에서 사방으로 왔다갔다 뛰어 다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뒤쫓는 존재가 있어서 저러나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노루는 그냥 제 풀에 겨워 마냥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러는 모양을 한참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기는 그러니까 인간의 영토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11월 출간했으며 2008년 펴낸 <습지와 인간>의 후속편에 해당됩니다. 2019년 문화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 세종도서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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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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