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합천 황매산 자락 가회면 목곡마을에는 서정홍이라는 시인농부가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로 유명한데 그밖에도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내었다.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을 했고 90년대부터는 농민운동을 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으로 시작하여 1998년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었으며 2001년 도시로 돌아와 우리농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을 하다가 2005년 다시 농촌에 가서 지금껏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아내와 함께 소농을 하면서 뜻맞는 이들과 공동체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실공동체라 했다가 2008년에 열매지기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었다. 열매지기는 열매를 지키는 농부들이라는 뜻이다. 2020년 현재 합천군 가회면의 대기·원동·동대·연동·목곡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아홉 가구 스물일곱 사람이 구성원이다.

 

커다란 농장을 만들어 같은 규율 아래 일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저마다 소농으로 농사를 지으며 따로 일하고 바쁜 농사철에는 한 데 힘을 모아 일하는 두레나 품앗이가 기본이다.

'김서와'라는 이름으로 하는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김예슬 씨의 프로필 사진

열매지기공동체 식구들의 농법은 이렇다. 독한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생태뒷간’을 지어 자기 식구들이 눈 똥오줌을 거름으로 만들어 다시 흙으로 돌려준다. 농기계를 쓰지 않고 농사를 짓는 집도 있고 나머지 집들은 경운기·관리기·건조기·도정기 등을 공동으로 구입해서 함께 나눠쓴다. 그러면서 ‘담쟁이 인문학교’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같은 공부나 문화 활동도 함께한다.

 

열매지기공동체는 인간들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생명과 사라져가는 공동체를 살리는 데 목표가 있다. 이를 통하여 구성원 개개인이 삶을 좀 더 잘 살도록 하고 나아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흙에 뿌리내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는 일까지 욕심을 낸다. 농촌으로 돌아와 농부가 되어 살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필요한 밑바탕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다.

 

열매지기공동체가 11년 전부터 꾸준하게 벌여온 생강차 사업이 그것이다. 생강을 손수 심고 가꾸어 거두었다가 11월이 되면 껍질을 벗기고 갈아서 조청과 함께 고는데 스무 날 남짓 걸린다. 처음에는 생강 알갱이를 알맞게 하고 좋은 맛을 일정하게 내기까지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지금도 과정 하나하나가 적지 않게 힘이 든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다. 소농을 하면 돈을 만들기 어렵다. 생강차를 만들어 팔면 이런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수입이 된다. 안정적으로 돈이 되는 생산 구조는 쉰이 넘고 예순이 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이들은 지금껏 살아온 대로 살다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10대 20대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다.

 

열매지기공동체 구성원 스물일곱 가운데 열한 사람이 20대 이하다. 욕심 없이 살아도 아이 낳고 키우려면 꼼짝없이 돈이 들게 되어 있다. 농촌을 떠나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으면서 살려면 최소한 삶을 받쳐주는 든든한 바탕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 지난해에는 정식 법인으로 등록을 마쳤고 올해는 어쩌면 작은 작업장이 하나 정도 장만될지도 모른다.

 

열매지기공동체 구성원 가운데 김예슬 씨가 있다.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되는데 스스로를 청년농부 또는 청년여성농부라고 일컫는다. 나이로 청년이고 젠더로 여성이고 직업이 농부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는 일로 보면 다른 여러 명칭도 따라다닐 수 있다. 시를 쓰니까 시인이고 글을 쓰니까 작가이고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니까 화가·디자이너이며 노래를 하고 악기를 연주하니까 가수다.

 

처음부터 합천 가회면 황매산 자락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경주에서 7년을 살다가 청송에서 처음 농촌 살이를 시작했다. 그 뒤 산청을 거쳐 2014년 우연한 인연으로 여기 대기마을로 터잡게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 본인 그리고 두 동생과 함께 다섯 식구였다. 농사를 지으며 살기 위해서였다.

 

20대 젊은이가 그것도 여성이, 남자도 하기 힘든 농사를 짓겠다고 자청하여 찾아왔다니 세상 보기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그 농업조차 4차산업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면서 스마트팜 어쩌고로 흐르는 세태인데도 호미와 괭이로 하는 소농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2019년 12월 28일 가회면 대기2길 6-33 카페 ‘토기장이의 집’에서 김예슬 씨를 만났다. 토기장이의 집은 예슬 씨가 식구들과 함께 세 들어 사는 집이면서 복합문화공간이다. 외진 시골 산중턱에 있는 카페에 손님이 많을 리는 없다.

토기장이의 집에서 공연을 하는 모습. 김예슬 씨는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에서 농사일하다가 손님이 찾으면 나와 접대하는 정도겠지. 나머지는 열매지기공동체의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의논하고 공부하고 노는 장소로 쓰인다. 아버지가 목사이니 예배공간으로도 쓰이겠다.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 들었는지?

아버지가 목사이시다. 경주에서 목회를 하셨다. 부모님이랑 도시에서 생활을 했다. 할머니·할아버지도 아파트에 사셨고. 농사를 구경하거나 경험한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홈스쿨링을 하면서 여행을 했다. 비용 마련을 위하여 농촌에서 일을 했다. 친구들은 농사에 능숙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하다 보니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처음부터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농부가 되어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훅 들어와 있더라. 청송에서 살 때 열아홉 살 겨울이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 씨를 뿌려본 것은 이듬해 스무 살 때였다.

 

농사는 매우 고된 일인데

그때는 잠깐잠깐 알바로 하는 농사일이었다. 농사 짓는 시간 자체가 몸이 고되다 힘들다 이런 느낌을 갖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흙을 만지는 자체가 편안했다. 몰입을 하는 느낌이랄까. 무엇에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르지 않나. 농사가 딱 그랬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을 하다 보면 궁금한 것도 많이 생겼다. 지금 고추를 가꾸는데 이게 어떤 모양으로 자라날까? 꽃은 어떻게 피며 열매는 어디에 달릴까? 이런 것들이 궁금했다. 얘는 왜 좁게 심고 쟤는 또 왜 넓게 심지?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두둑도 다 다르고. 자라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예슬 씨 옆에 얼굴이 가려진 이는 누구일까? 봄날 샘일까?

 

처음 생각했던 농사는 어떤 것이었는지?

농약 치고 화학비료 뿌리는 농사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청송에서 잠깐 살 때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에 농사 알바를 했다. 농사라 해도 다 같은 농사가 아니더라. 돈이 목적인 농사였다. 사과밭이었는데 약을 너무 어마어마하게 치는 거였다. 바로 옆에 외국인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이 일하고 있는데도 기계로 농약을 자욱하게 쳤다.

사람을 위하는 농사도 아니고 자연을 살리는 농사도 아니었다. 땅은 물론 몸까지 망가지는 구조겠다 싶었다. 농법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와 맞지 않았고 살고자 하는 삶의 테두리도 달랐다.

합천에 오기 전까지 생각은 농사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농부는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이라는 정도였다. 생명이나 땅·흙에 대한 어떤 의미나 보람보다는 알바로 농사일을 하면서 느꼈던 재미, 호기심, 몰입 이런 것이 더 컸던 것 같다. 의미나 가치, 보람은 합천에서 열매지기공동체와 함께하면서 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홈스쿨링을 했다고 했는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나서였다. 그때까지 학교를 다니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부모님이 홈스쿨링을 권하셨다. 결정은 본인이 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오랫동안 고민을 했고 힘든 시간이었다.

일단은 부모님이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을 권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냥 믿는 구석이 있었다. 또 어떤 길이건 걷게 되면 그 길 안에서 배우고 느끼는 것은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홈스쿨링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부모님 말씀대로라면 초등학교 때 나는 조용하고 소심한 친구였다. ‘범생’이었다고도 하셨다. 선생님이 80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면 120이나 150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이였다는 것이다. 시키면 잘 해내는 편이었으나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지 못했고, 그만큼 나에 대한 자신감이나 믿음도 적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내내 ‘내가 어떤 사람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훌륭하게 되어라’, ‘너답게 살아라’ 등등 말을 하는데 정작 ‘내가 뭔데?’는 모르고 지냈다. 시키는 대로 주는 대로 따라가는 과정에서도 조금씩 틈이나 여유를 갖는 법도 배우게 되었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스스로 만들었던 틀에서도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를 알아가는 질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핵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내가 행복할까?’였다. 그런 끝에 농사를 지으며 살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립을 해야 하니까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했다. 농사를 지어도 마음이 메마를 정도로 궁핍하게 살지는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돈을 버는 것을 농사 앞에 두지는 않는다. 농사로 큰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여태껏 해보지 않은 것 같다.

 

합천에 자리 잡기까지 과정은

처음에는 경주에서 청송으로 갔고 산청으로 옮겨갔다가 합천에 왔다. 돌이켜보면 모두 우연이었다. 자리를 잡아보려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도 만나고 여건이 되면 빌린 집에서 살거나 빌린 공간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다 합천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은 헤어지지 않고 정붙이고 살면서 좋은 뜻을 지켜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열여덟 살 때 여행을 하다가 청송에서 예술 작업을 하는 분들을 만났는데 폐교를 작업장으로 쓰시고 있었다. 그분들이 우리 식구가 농촌에서 살 곳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교실 한 칸도 괜찮다면 와서 살아도 좋다’고 하셨다. 동생 둘이랑 부모님이랑 식구들이 함께 9개월을 살았다. 거기서 앞서 얘기한대로 알바로 농사일을 한 적이 있다.

산청은 민들레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는 데였는데 격월간 잡지 《민들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의 작은 공동체였는데 공동체에 빈집이 하나 있었고 ‘와서 지내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있었다. 거기로 옮겨 7~8개월 지냈다.

본격 농사를 지을 만큼은 땅이 없었고 우리 식구가 먹을 텃밭 농사를 지으면서 처음 씨를 뿌려보았다. 하지만 마을이랑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다. 연세가 높은 분들이 계시는 공동체였고 농사 경험이 없는 공동체였다.

2014년 스물한 살 때 지금 사는 합천 집과 인연이 되었는지 집주인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 집에 세 들어 살던 가족들이 순천으로 이사를 가 집이 비어 있었다. 집주인과 전세 계약을 하고 합천으로 삶터를 옮겼다. 여기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부분이 참 많다.

 

자연스럽게 배우는 부분이 참 많다고?

합천에 와서 열매지기 식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농사나 농부를 제대로 몰랐다. 농부로 살겠다는 청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정말 기뻤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괭이나 호미 쓰는 법, 두둑을 만들고 고랑 타는 방법, 풀매는 때를 맞추는 법 등을 모두 여기서 배웠다. 특히 땅을 살려가는 농법을 알게 되었고 토종 종자를 지키는 노력을 알게 되었다.

처음 왔을 때 하시는 말씀이 ‘좋아하는 것을 심어라’였다. 그때는 고구마였는데 지금은 콩이다. 어릴 때부터 콩을 좋아했고 콩으로 만든 음식도 뭐든 좋아했다. 수확량은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적은 편이다. 콩은 여러 가지를 같이 섞어 심어도 교잡이 되어 섞이는 일은 없다. 씨를 받으려면 신경 써야 하고 베고 털 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간다. 한 가지를 많이 심지 않고 씨를 이어간다는 목적으로 조금씩 기른다.

은실 이모 덕분에 이렇게 콩을 심게 되었다. 원래 수녀님이셨는데 합천에 들어온 지 14년째 되었다고 들었다. 혼자 농사를 지으시면서 토종 씨앗을 채종하여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오고 계신다. 은실 이모를 따라다니며 채종하는 방법도 익혔고 토종씨앗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울러 무엇을 지키는 농부가 되어야 하는지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농법이나 작물을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일도 중요하다. 여태까지 소중하게 지켜져 오는 농법이나 작물의 역사를 이어 나가는 노력도 소중하다. 나는 어느 쪽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씨앗을 잘 지켜가고 오랫동안 이어온 농법을 잘 전수 받아서 이어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싶다.

 

채종은 어떻게?

먼저 크고 선명한 것을 고른다. 그리고 지나치게 익었다 싶을 때까지 기다린다. 토마토나 가지는 씨앗이 자그맣고 통째로 끈적거리는 가운데 들어 있기 때문에 채로 걸러낸다. 호박도 푹 익히고 오이도 누렇게 노각이 될 때까지 두었다가 하는데 고추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 햇볕에 바짝 말리면 된다. 말은 쉽지만 실제 해 보면 어렵다. 손도 많이 간다.

 

김예슬 씨는 지난해 스무 가지 토종 콩을 심었다. 《경남도민일보》 2019년 7월 12일자에 본인이 쓴 칼럼 「콩이라고 다 그냥 콩이 아니다」에 나온다. 쥐눈이콩, 퍼렁찰콩, 오가피콩, 아가콩, 선비자비, 콩나물콩, 오리알태, 아주까리콩, 아주까리밤콩, 갈색얼룩콩, 붉은팥, 검은팥, 애경팥, 녹두, 얼룩울타리콩, 흰동부, 갓끈동부, 어금니동부, 대추콩, 제비콩이다.

그러면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농사를 짓기 전에는 ‘콩이 콩이지. 콩국수 할 땐 하얀 콩, 콩자반 할 땐 까만 콩 아니야?’ 하는 정도만 알았다. 조금 더 알아보아야 강낭콩과 완두콩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토종 씨앗은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청년 농민 누군가 이 씨앗들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천 년 전부터 이어진 씨앗들을 우리 세대에서 잃어버린다면 참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많이 빼앗기고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 남아 있는 씨앗이라도 귀하게 지켜가고 싶다. 오랜 세월 다양한 빛깔과 쓰임으로 우리 곁을 지켜준 콩을 잃고 싶지 않다. 제맛과 빛깔을 잃지 않은 콩들이 한데 모여 아름답게 어우러지듯이, 나도 이 세상과 그렇게 어울려 살고 싶다.”

토종 씨앗을 지킨다고 하면 보통은 제국주의 자본의 농업 침탈부터 이야기를 꺼내는데 예슬 씨는 이와 달리 다양함과 어우러짐을 얘기했다. 생명과 생태가 저마다 다른 다양함으로 서로 긍정하면서 어우러지는 한마당이라는 깨우침에서 비롯된 것일까. 세상의 바람직한 구성 원리로 그 둘을 떠올리면서 본인도 세상 속에서 다양한 일부분으로 어우러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7년차 농부가 되는데 소감은?

농사는 무엇보다 지속가능해야 한다고 본다. 너무 힘들게 일해 지쳐 떨어지면 안 된다. 오늘처럼 내일도 일할 수 있어야 한다. 농업의 생태적·공익적 가치나 공존의 가치도 이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생태적이라도 몸을 너무 힘들게 하면 지속가능한 농업이 아니다.

이를테면 부직포가 있다. 비닐로 멀칭을 하면 풀이 나지 않아 편하지만 비닐은 한 번 쓰고나면 쓰레기가 된다. 대신 재활용이 되는 부직포를 쓴다. 거름을 넣고 두둑을 타고 나면 유기농 볏짚이나 부엽토를 씌운다. 그러고는 부직포를 덮어서 나중에 풀이 덜 나게 한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버려지면 쓰레기가 되기는 하지만 품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건강도 중요하다. 아프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저녁마다 요가나 스트레칭을 비롯해 몸살림 운동을 하는 이유다. 평소에도 과로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농사란 때가 있는 것이다 보니 뜻대로 안 될 때도 많지만. 삶과 농사가 모두 지속가능하려면 몸부터 건강하게 챙겨야 한다.

 

벼농사는 안 하는 것 같은데

아직은 밭농사만 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게 하다가 조금씩 늘려서 지금은 1,000평 정도 한다. 콩이랑 감자 생강을 주로 한다. 콩은 씨앗을 받기 위해서 하고 감자랑 생강은 돈을 만들기 위해서 한다. 감자는 그대로 내다 팔고 생강은 겨울에 생강차를 만들어 판다. 감은 깎아 말려서 곶감으로 판다. 식구들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에 얼마 되지는 않는다. 철 따라 다른 작물들도 한다. 내다 팔기도 하고 집에서 먹기도 한다.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농촌에서 지치지 않고 살아가려면 마음이 빈곤해지지 않을 만큼은 벌이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궁핍하면 생활이 메말라지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없다. 밭농사를 해서 수입이 생기고 먹는 것에 대한 자립은 하기에 친구들 만나 밥 한 끼 살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궁핍하다는 느낌은 아직까지 가져본 적이 없다.

논농사는 이제 자급자족 차원에서 논농사를 지어도 좋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생각만 하고 있고 농사만 짓는 것도 아니어서 더 늘려도 될까 머뭇거리고 있다.

 

농사만 짓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농부로 산다는 것이 농사만 짓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람들은 농부는 농사만 짓는다고 은연중에 생각한다. 농부가 농사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농부가 왜 농사만 지어야 할까? 농부의 삶 안에는 느끼고 담아낼 수 있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 글과 그림과 노래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나눌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봄날(서정홍 농부시인의 별명)샘이 이런 얘기를 했다. 사람이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면 농장이 된다.”고….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다. 농사만 지으면 삶 자체가 팍팍하고 메말라진다. 농촌에도 놀고 쉬며 즐기고 누리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 농부라고 해도 농사짓는 것 말고 다른 삶이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나.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엄마하고 놀 때도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이 시인, 글쓰는 선생님, 글쓰는 화가 이런 것들이었다. 제대로 된 글쓰기는 합천 와서 봄날샘한테 처음 배웠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 말을 살려 쓰고 평소 말하듯이 입말을 살려 쓰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쓰고 한자말을 되도록 쓰지 말고 우리말로 옮겨쓰는 글쓰기였다. 그리고 삶이 없는 시는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도 하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농부와 시인은 참 잘 어울린다.

그림 그리기에서 더 나아가 디자인도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산청에서 유정란을 하는 농부님을 위해 명함을 디자인해 드렸다. 우리 사는 이야기와 농사 지으면서 드는 생각이나 느낌을 노랫말로 삼아 노래도 한다. 악기 연주도 하면서 동생이랑 시골 장터나 도시로 공연도 다닌다. 여행도 종종 다니면서 여기저기 들러 친구도 사귄다.

 

노래 공연도 하러 다닌다고?

처음에는 음치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노래를 못하는 게 아니라 독특한 음색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그런 격려가 고마웠다. 자꾸 하다 보니 조금씩 나아지기도 했고 음역대도 넓어졌다. 내 음색에 맞는 노래를 찾기도 하고 내가 잘하는 노래도 찾기도 하게 되었다.

공연은 동네에서도 하지만 다른 고장 축제나 마을에 초청받아 가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나 내 느낌 내 감정을 노래할 수 있으니 고맙고 좋다. 네 살 아래 남동생 수연이와 팀을 이루어 ‘서와콩’이라는 이름으로 한다. 내가 별명으로 쓰는 이름이 ‘서와’다. 글 서(書) 자를 써서 ‘글과 함께’라는 뜻이다. 수연이는 어릴 때부터 ‘콩’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나보다 훨씬 크지만 어릴 때는 콩처럼 조그마했다. 공연이 고마운 이유는 또 있다. 노래 손님으로 초대받아 가는 경우에는 적든 많든 공연비를 받는데 경제적인 자립에 도움이 된다.

가을에는 밭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우리한테 잘 어울리는 공간이 밭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노래랑 잘 어울리고 우리 이야기를 가깝게 전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런 생각을 이웃 어른들에게 얘기했더니 좋은 생각은 당장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하셨다. 날씨 때문에 미루어졌다가 세 번째 잡은 날짜가 10월 9일이었다.

배추밭에서 했으니 ‘배추밭 콘서트’가 되었다. 10월 초순이면 바빠지기 바로 직전이다. 힘을 북돋아서 가을걷이를 흥겹게 하자는 취지였다. 작게 콘서트를 열 마음이었고 페이스북에도 작게 올렸는데 크게 되었다. 조그만 시골 밭에 마을 할머니 등 100명이 넘게 와서 함께 즐겼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떤 분은 밭 둘레 풀을 깎아 주셨고 어떤 분은 밭을 고르게 정리해 주셨다. 공연할 때 나누어 먹을 수 있게 간식을 준비해 주신 분도 있었다. 오신 분들은 다들 환하게 웃으면서 좋아해 주셨고 귀를 기울여 들어 주셨다. 앞으로도 이따금 조용한 산골 마을에 신나는 일을 만들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슬 씨가 포스터도 손수 만들었을 것이다.

 

농촌에 문화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농촌에 청년들이 들어와 모이려면 문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텅텅 비어가는 농촌인데 어울려 놀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없다면 어떤 청년이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올까. 이렇게 한 번씩 모여 흥겹게 노래 부르고 신나게 놀 수 있어야 바쁘고 고달프지만 농사일을 계속할 힘도 생긴다. 해보니까 더욱 그렇더라. 간단한 이치다. 밤낮 일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이런 활동을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여름 농지를 샀다. 여태 남의 밭을 빌려 농사를 짓다가 처음으로 장만한 우리 밭이다. 앞으로 농사를 지으며 삶을 일구어 나갈 땅이다. 가까운 이웃들이 부모님의 삶, 저와 남동생의 삶을 지지해 주시는 마음으로 땅 살 돈을 빌려주셨다. 갚을 때까지 기한도 넉넉히 주셨는데 고맙게도 응원을 받는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곳에서 함께 농사지으며 살 친구들을 만나면 좋겠다. 농사는 짓고 싶은데 땅이 없거나 꼭 농사를 짓지 않아도 농촌에 살고 싶은데 혼자 오기는 막막한 친구들한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된다면 좋겠다.

합천에서 6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고 그런 청년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함께 농사를 시작하는 작은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농사 이야기 농촌에서 사는 어려움이 있거나 할 때 신나게 얘기하고 고개 끄덕여 주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것이 좀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 힘이라 생각한다.

마녀의 계절 꾸러미.

 

‘마녀의 계절’이라는 게 있던데?

젊은 여성 농민 넷이 농사지은 제철 농산물을 담은 꾸러미다. 사람은 강원 화천, 전북 진안, 경남 합천, 충남 홍성으로 흩어져 있는데 꾸러미는 논밭상점(https://www.nonbaat.com)에서 볼 수 있다.

동료를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만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농촌과 농사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이 모이는 캠프나 워크숍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와 며칠을 지내다 가기도 했다.

함께 농사짓고, 맛있는 밥을 지어 먹고, 별을 보러 나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녀의 계절을 함께 하는 친구들도 홍성에 열렸던 ‘농촌 청년 여성 캠프’에서 만났다. 이렇게 만나 서로에게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어서 기뻤다.

 

농사짓고 살면서 느끼는 재미는?

맛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처음 농사지은 감자를 먹어보고 ‘세상에나! 감자가 이런 맛이었나?’ 싶었다. 비닐을 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농사를 지어서인지 더 깊은 맛이 난다.

옥수수도 여기 살면서 참맛을 알게 되었다. 제대로 고소하고, 짭짤한 맛이 느껴지면서도 달다. 가지 같은 경우도 개량한 것은 먹기 좋게 맛이 좋게 껍질이 얇다. 우리가 농사지은 토종 가지는 먹으면 질기다는 느낌이 들 수는 있는데 맛은 조금 더 좋은 맛이 난다.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것 같다.

새로운 일을 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올해 무슨 농사가 안 되었으니 내년에는 어떻게 달리 해 볼까? 이번에는 벌레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는데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올해는 씨가 이렇게 받아보니 어려웠어, 그러니 내년에는 어떻게 받으면 좀더 손쉬울까? 다르게 생각해 보고 새롭게 시도해 보는 게 참 재미있다.

이런 재미도 있지만 나름대로 농촌에 문화도 만들어 나가고 토종 씨앗을 지켜나가고 땅을 살리는 농사를 하다 보니 보람이라는 것도 덩달아 생겨나고 커지는 느낌이다. 스스로 부여하게 된 의미가 커진 것 같고 그렇게 커진 의미들이 쌓여가는 것 같다.

 

이런 삶에 불안 같은 것은 없는지?

너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변화나 발전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처음에는 ‘내가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무엇인가 해나가고 있는데 나는 날마다 똑같은 밭에서 풀을 매고 또 매고 있다는 게 겁이 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불안은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친구 같은 존재 같더라.

 

재미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보람이 더 큰 듯하다

농부로서 지키고 싶은 것도 생겼다. 문화도 만들어가고 싶고, 토종 씨앗도 지키고 싶다. 이대로 하다가는 지구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지구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도 든다. 지구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힘을 모아야 할까? 나는 합천군민이면서 동시에 지구인이다. 합천이나 우리 마을도 좋아지도록 해야겠지만 지구가 망가지지 않도록 하는 데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혼자서 아등바등했다면 이런 생각 이런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안다. 좋은 어른들을 만났고 힘을 모아주는 어른들이 옆에 계신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지속 가능한 것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면 좋겠다.

 

<한겨레21>에 실린 사진. 모두 마녀들이다.

 

농부로서 자부심이 느껴진다

시장에 가면 감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자기 농작물을 들고 와서 어디서 어떻게 농사를 지었고 씨앗을 뿌리는 데서부터 거두는 데까지 어떤 농부가 어떻게 했는지를 풀어놓는데 굉장히 큰 감동으로 들렸다. 사람을 살리는 농작물을 기르는 농사를 해 보았기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인 것 같다.

농민수당 제정 관련하여 설명을 하고 서명을 받으러 돌아다니는 청년한테 들은 얘기가 있는데 인상적이었다. 함양 산청을 거쳐 합천으로 왔는데 나이 드신 농부들을 모셔 놓고 농사의 공익적 가치 등을 말하면서 농민수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내가 한평생 농민으로 살았지만 농부라는 자부심을 가져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였다고 한다. 이런 자부심이 중요하다. 농민들한테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 자신 있게 친구들에게 같이 농사짓자는 제안도 해 볼 수 있고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도 있다. 자기 하는 일에 아무런 자부심도 없다면 재미있고 즐거운 삶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김예슬 씨와 이렇게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어떤 인격체를 마주한 기분이 내내 들었다. 토종 씨앗을 지킨다고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본인의 시와 노래로 어떤 문화를 만들어간다고 뿌듯해하지도 않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고맙고 만족스러워하는 느낌은 있었다.

 

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여기는 우쭐거림은 없었다. 야물고 단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무엇 하나 허투루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자기의 삶을 이루는 어떤 부분에서든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립을 해야 한다는 태도 또한 뚜렷하게 느껴졌다.

 

김예슬 씨는 자기가 큰 복을 받았다고 했다. 합천 황매산 자락에 와서 만난 열매지기공동체 식구들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해도 된다면, 그것은 자식을 어릴 때부터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자기 삶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결정하도록 배려한 부모를 두었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또 자기가 평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누구나 이렇게 살 수 있고 누구나 이런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김예슬 씨 본인은 평범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특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대를 사는 10대 20대 젊은이들이 이런 환경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자기 힘으로 자기 길을 가는 젊은이를 만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배추밭콘서트를 벌이는 장면.

 

농사를 짓다 보면

감자랑 고구마랑 양파 말고도

노래랑 시가 덤으로 나와요.

 

밭에서 지은 노랫말에서는

흙, 풀, 바람, 햇살이 주인공이에요.

 

덤으로 얻은 건 나누어야 하니까

동생 수연이와 이따금씩

마을 장터나 도시에서 공연을 해요.

 

라벤더 축제에서 공연을 하던 날

우리 노래를 들은 사람이

‘공중파 방송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불쑥 말이 튀어 나왔어요.

저희는 공중파 아니고 땅파예요.

밭에서 땅을 파야 먹고살 게 나오거든요.

노래도 나오고요!’

농사짓다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도 우리 노래도

밭에서 자란다는 걸.

 

김예슬 씨가 지은 시 「공중파와 땅파」의 전문이다. 농사짓고 시 쓰고 노래하는 본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앞으로 합천 황매산이 떠오르면 그 유명한 철쭉 대신 김예슬 씨의 이 시가 더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김훤주

*부산에서 발행되는 생태문학잡지 <신생> 82호(2020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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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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