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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1803

문화재 되찾기, 전라도에 배워야겠다

1. 서울로 떠도는 경남 문화재 1월부터 우리 문화체육부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자연스럽게 경남 문화재에 관심이 갔습니다. 나름대로 이리저리 둘러보니, 경남 '출신'이기는 한데 다른 데 가 있는 문화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창원 봉림사터 '진경대사보월능공탑'과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그랬습니다. 보물 362호와 363호인 보월능공탑과 탑비는 원래 창원 봉림동에 있었으나 일제가 1919년 서울로 가져갔습니다. 보월능공탑은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마당에 놓여 있음이 확인됐지만 보월능공탑비는 확인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경복궁에서 지금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수장고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더 처량합니다. 국보 105호인 이 석탑은 범허사라..

국민장 끝나자 봉하마을 행정지원도 '뚝'

정말 마지막까지 너무하는군요. 경남도와 김해시 말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국민장'으로 결정되기 전에도 자기 지역을 찾는 추모객을 위한 아무런 편의제공을 하지 않아 욕을 먹었던 경남도와 김해시는 공식 '국민장 기간'이 끝난 29일 이후부터 모든 편의제공을 중단해버렸습니다. 진영읍 공설운동장에서 봉하마을 진입로까지 운행하던 셔틀버스도 30일 아침부터 딱 끊겼습니다. 그래서 본산농공단지가 끝나는 마을 진입로 시작 지점은 자동차들이 뒤엉켜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다시 봉하마을을 찾은 건 30일 오전이었는데요. 처음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 추모객들이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불어나 다시 줄을 서야 할 만큼 분향소가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주말과 휴일동안 추모객이 계속 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악담 퍼붓는 사람

1. 마지막 가는 길까지 악담을 퍼붓는 사람이 있더군요.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 짐작을 하기는 했지만, 제가 적나라하게 그것을 보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그리고 그이에 대한 이런저런 사람들의 추모를 '쇼'라 하고 그것이 먹혀드는 데가 바로 우리 사회라고 잘라 말하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노 전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는 척하면서 '죄인'이라 딱지를 붙이는 교활함까지 보이기도 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영결식이 치러진 이튿날인 5월 30일 오후 2시 31분에 제 손전화로 들어왔습니다. "대통령 기록물 사본과 전산 시스템을 불법으로 반출하는 보도를 보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더러 "욕심이 과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 기록물 사본 반출은 불법이 아니었고, 전산 ..

임금도 탄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

류성룡의 징비록, 백성 버린 선조를 고발하다 1. 류성룡(1542~1607)이라 하면 세상 사람들은 전란에 앞서 이순신과 권율을 장수로 추천한 재상으로 압니다. 틀린 말이 아니지요. 동시에, '오성'과 '한음'으로 이름난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의 존경스러운 선배이기도 했습니다. 이 또한 맞는 말입니다. 에도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이 무엇입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류성룡이 썼습지요. 전쟁에 앞선 일도 가끔 적혀 있는데요, 이는 난리의 발단이 무엇인지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 징비(懲毖)란, 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대목이랍니다.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후환이 없도록 삼가네(其懲而毖後患)"에 징과 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은 철..

죽은 이은상을 욕보이는 문인들

2009년 1월 마산문인협회(회장 강호인)와 경남시조시인협회(회장 서일옥)는 '마산'문학관을 '노산'문학관으로 바꾸는 운동을 벌이겠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정했습니다. 알려진대로, '노산(鷺山)'은 이은상(1903~1982) 시조시인의 호입니다. 이은상은 일제 강점기 시조부흥운동에 앞장섰으며, 1940년대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붙잡혀 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에다 언젠가부터 이은상이 쓴 '가고파'가 마산 대표 작품으로 슬그머니 자리잡은 현실이 더해졌습니다. 마산문협이 대표적인데, 이런 사실을 근거로 이은상을 기리려는 움직임을 줄곧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산문협은 올해 초 "회원 112명 가운데 97.32%인 109명이 '노산문학관'에 찬성하고 반대는 3명뿐이다"고 공개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반대..

노 대통령 서거와 YS 부친상의 차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급작스런 서거로 김해 봉하마을에 전 국민의 시선이 쏠렸으나, 경남 마산시도 권양숙 여사의 고향(진전면 오서리)이라는 점에서 노 전 대통령과 무관치 않은 곳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장인의 성묘를 위해 마산을 찾기도 했고, 2003년 태풍 매미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도 직접 마산을 방문, 피해상황을 챙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 마산에는 마산시장이 없다. 황철곤 시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알려진 23일 오전 '해외시장 개척단'의 일원으로 아시아와 대양주로 해외출장을 가버렸기 때문이다. 무려 9박 11일 일정이란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도 출국해버린 황철곤 마산시장의 처사에 대해서는 경남도민일보 김정훈 기자가 '취재노트'를 통해 이미 비판한 바 있다. 김정훈 기자는 황..

바보 노무현이 남겨준 마지막 선물

그동안 굳이 이런 이야길 하지 않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도민일보 창간주주였다. 1999년 2월 당시 국회의원이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였던 그는 경남의 시민주주신문 창간에 힘을 보태달라는 우리의 부탁에 흔쾌히 200주를 청약했다. 당시 나는 그를 포함해 몇몇 개혁 성향 국회의원을 상대로 주식청약을 권유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렇게 흔쾌히 청약해준 이는 노무현 뿐이었다. 이렇게 그는 6200명의 시민주주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경남도민일보 '시민주주'였던 노무현 거절한 이들은 "정치인이 특정 신문의 주주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사실은 타 언론의 눈치 때문이거나 아직 창간하지도 않은 지역의 작은 신문에 대한 무시임이 분명했다. 자치단체장 중에서는 김두관 당시 남해군..

경찰이 지킨 정권, 경찰로 무너질수도…

27~28일 서울에 다녀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분출된 국민들의 울분이 어디로 향하게 될 지 궁금했다. 물론 서울 분위기를 본다고 해서 그걸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봉하마을에서 이틀 밤낮동안 보고 느꼈던 그것과 비교해보고 싶었다. "봉하마을에서 본 사람들은 정말 복받치는 듯 서럽게 울었다. 그들의 울음소리엔 한(恨)과 독기가 서려 있었다. 특히 남성 조문객들은 "이 ××놈들"이라는 욕설을 내뱉으며 울었다. 새벽 4시에 가까워 봉하마을을 걸어나가는 약 2km의 거리에도 마주 들어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나가는 사람과 들어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간헐적인 울음소리와 함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25일 쓴 글 : '봉하 발(發) 분노한 민심, 어디로 갈까') 서울은 봉하..

봉하마을은 김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에 왔습니다. 참여연대 사무실이 있는 통은동에서 정동 경향신문사 앞을 거쳐 덕수궁 돌담길을 통해 대한문 앞 분향소와 서울광장 일대,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앞까지 둘러봤습니다. 몇 킬로미터를 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으로는 대략 두 시간을 걸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제가 사는 경남 김해에 있는 봉하마을 상황만 보고 있었습니다. 서울은 어떤지 보고 싶었습니다. 여기 와서 보니 봉하마을은 경남 김해에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울에도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만났던 대전충남녹색연합 양흥모 국장에 따르면 오늘 저녁 대전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작년 촛불집회가 줄곳 열렸던 경남 창원시 용호동 정우상가 앞에 시민들이 설치한 분향소에도 연일 추모인파가 몰리고 있습니다. 부경아..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과 무력감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아무런 은원(恩怨)이 없습니다. 같은 길을 함께 걸은 적도 없고 서로 마주 달려나와 부딪혀 싸운 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2002년 대선을 치를 때 제 관점은 이랬습니다. '노무현과는 경쟁 협력 관계다, 이회창과는 적대 배제 관계지만…….' 그러니까 제게 노무현과 노사모, 열린우리당 등등은 '따로 또 같이' 또는 '같이 또 따로'의 상대였습니다. 때때로 또는 자주, 같이 할 일이 있으면 같이 하고, 같이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저마다 따로따로 하면 그만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1. 한 선배의 노무현에 대한 부채의식 그런데 앞서 노동운동을 하신 선배들 가운데에는 노무현에게 어떤 부채의식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제 25일 밤에, 전화가 왔습니다. 80년대 중·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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