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 땐 깜깜무소식 비 올 땐 억수처럼
경국대전은 최대 12차례 규정했지만
오횡묵은 공식 13차례 비공식 2차례
“몰래 쓴 무덤 부정 탄다”며 모두 파내고
신령·용 얽힌 영험처 옮겨 다니며 기도
해갈된 뒤엔 닷새 폭우로 수재도 겪어
가뭄은 예로부터 인간 사회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주는 엄청난 자연재해였다. 그나마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하여 나름대로 대응할 방책이라도 있지만 옛날에는 그대로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재난을 맞닥뜨리면 대부분 백성들은 처음에는 나름 이겨내려고 애를 쓰지만 한계를 넘으면 임금이나 수령을 원망하기 마련이다. 조세를 거두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집행했으면 그에 걸맞게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이나 수령인들 별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효과가 있든 없든 하늘에 대고 비를 비는 제사를 올려야 했던 이유다.
기우제라 하면 지금 사람들은 한두 번 정도 치르고 말았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함안총쇄록>에서 오횡묵은 모두 열다섯 차례 기우제를 올렸다. 공식으로 하루 걸러 한 번씩 열세 차례 기우제를 지냈고 그러고도 비가 내리지 않자 날마다 비공식으로 두 차례 더 지냈다.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과 예법서 <국조오례의>는 기우제를 열두 차례 하도록 되어 있는데 오횡묵은 이를 넘어섰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내기 때문에 성공률이 100%라는 이른바 ‘인디언 기우제’와 맞먹는 것이었다.
어느 날 보니 문득 가뭄이
오횡묵에게 가뭄은 갑자기 닥친 재난이었다. 물론 일찍이 알았다 한들 대처할 방도는 없었다. 1892년 6월 19일 한여름에 입곡 숲안마을에서 읍성 돌아오는 길에 보니 그랬다. “비가 월초에 한 번 오고 지금껏 수십 일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봇도랑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논이나 겨우겨우 물을 대었다.” 나머지 “조금 먼 논과 천수답은 한 번 보니 물이 졸아서 말라붙었다.” 그런데도 “비 올 기미는 여전히 아득하였다.”
밭도 마찬가지였다. “삼베와 목화·콩·팥도 호미질을 해놓았지만 이미 모두 타서 마른 모양이 되었다.” 그래서 오횡묵은 “오래된 깊은 산골인데도 들빛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기에 “만만으로 걱정되고 고민스러웠다.”
“하늘은 비를 내릴 뜻 없고 들은 푸른 빛이 없네/만인의 슬픈 울음 차마 형용 못 하겠네/ 내 그리 늙지 않았건만 머리가 눈처럼 희니/ 인간세상 살면서 불을 두 번 만났네.” 농민들 들판도 불타고 자신의 머리카락도 불탔다는 얘기다.
마침 정신이 없기도 하였다. 열흘 전인 9일 진주·의령·고성·칠원에서 한꺼번에 옥사가 터졌다. 이에 곧장 창원 백련사(지금 광산사)에 숨었다가 14일 한 발도 내딛기 힘든 산을 넘어 숲안마을로 옮겼다. 16일부터는 얹힌 기운도 있었고 17일에는 아내의 환갑을 맞아 함께 못하는 슬픔도 느꼈다.
몰래 쓴 무덤부터 파내고
비는 줄기차게 내리지 않았다. “가뭄이 한결같아 방죽과 보에 물의 흐름이 끊어졌다. 모를 낸 논은 두레박을 매달아 물을 대기라도 하지만 모내기를 못한 데는 이제 영영 폐농할 지경이다. 목화와 밭에 심은 곡식들도 폭염에 바짝 말라 꽃도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한다.”(1892. 6. 27.)
윤6월 첫날 오횡묵은 기우제의 효험을 높이는 작업에 먼저 들어갔다. 명산에 시신을 묻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경우 기우제를 올려봐야 효과가 없다. “사직단(社稷壇) 안산(安山)에 올해 몰래 쓴 무덤이 많아 열둘이나 되는데 여러 사람이 의논하기를 이를 파내어야 하늘이 비를 내린다 하였다. 곧바로 관속들로 하여금 열두 무덤을 파내게 하였다.”
기우제는 이튿날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날부터 오횡묵은 소송과 조세 거두기 등 공무(公務)를 일절 멈추었다. 아전들이 아침마다 수령을 모시고 아뢰는 조사(朝仕)도 하지 않았으며 매질·몽둥이질·곤장질 같은 형벌 또한 그만두었다. 문풍을 드높이기 위하여 거의 날마다 벌이던 시회(詩會)는 일찌감치 이틀 전에 접었다. 모두 기우제에 집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시장도 전례를 따라 이설(移設)하였다. 동문 밖에 있던 읍장시를 남문 안으로 들여 가까운 태평루 앞으로 옮겼다. 음양오행설에서 시장은 음(陰)을, 남문은 양(陽)을 뜻한다. 시장(음)을 남문(양) 가까이로 옮기는 것은 음으로 양을 눌러 역시 음인 비를 부르는 주술인 셈이다.
첫 기우제는 사직단에서
윤6월 2일 오횡묵은 “절기가 점점 늦어가는데 비가 올 기미가 막막하여 기우제를 시작하여야 한다”면서 “사유를 대구감영에 보고하였다.” 아울러 동헌 북서쪽 가까이 있는 중향관(衆香館=공문 등을 보관하는 책실)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재계하면서 밥상도 소박하게 차려 먹었다.
제사 의식은 제사에 쓰일 물건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각(巳刻=오전 10시 전후)에 관복을 갖추고 객사(태평루)에 나가 제물(祭物)을 감봉하였다.” 어마어마하지는 않았지만 규모를 갖추면서도 담백한 정도였다.
“제물:
흰쌀·기장 석 되(刀)씩 사슴포(鹿脯) 석 줄(三條), 마른 밤(黃栗)·대추(大召)·젓갈(魚鹽)·사슴젓(鹿醢) 한 되씩, 무김치(菁菹)·미나리김치(芹菹) 석 되씩, 제사술 세 두루미, 돼지 한 마리.
폐백:
삼베(麻布) 다섯 자, 황촉(黃燭) 한 쌍, 향 한 봉지, 황모 붓 한 자루, 참먹(眞墨) 한 개, 참기름 다섯 움큼(夕), 축문지 한 장, 백지 다섯 장.”
오횡묵은 이를 곱절로 늘려 본인의 남다른 정성을 나타내 보였다.
본격 기우제는 한참을 지나 한밤중에 올렸다. “자각에 사직단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며 예식을 행하였다.” 잔을 올리는 헌관(獻官)과 의식을 집행하는 집사(執事)들은 그대로 현재 향교의 임원인 재임(齋任)으로 거행하였다. 예식은 석전례(향교에서 공자에게 올리는 의식)에 근거하였다.
첫 기우제를 사직단에서 지낸 것은 의미가 있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제단이다. 토지와 곡식은 나라와 백성을 받침하는 근간이다. 그래서 사직단은 나라와 조정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임금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宗廟)와 더불어서다. 또한 토지신과 곡식신이 함께하는 공간이니 토지에 비를 내려 곡식을 잘 자라게 해달라는 기우제의 첫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나머지 기우제는 영험이 있는 데서
두 번째부터는 효험이 있는 데를 찾아다녔다. 4일 재차 기우제는 여항산 용연단(龍淵壇)에서, 6일 3차 기우제는 주물진(主勿津) 용단(龍壇)에서 지냈고 8일에는 벽사단(壁寺壇)(와룡정臥龍亭)에서 네 번째로 비를 빌었다. 지명에 모두 물과 관련된 영물인 용이 나온다.
10일 5차는 매우 험준한 여항산 상봉에서 지냈고 12일 여섯 번째 비를 빈 장소는 벽사강(壁寺江)이다. 14일 7차 기우제는 사직단에서 지낸 뒤 16·18일의 8·9차 기우제는 여항산 용연과 주물단에서 지냈다. 주물단은 “풍탄(楓灘) 여울이 만 번 꺾어지는데/ 그 가운데 신룡(神龍)이 있었다.”
20일 10차 기우제는 벽사단(碧寺壇), 22일 11차 기우제는 여항산, 24일 12차 기우제는 와룡강(臥龍江)에서 지냈다. 26일 13차 마지막 공식 기우제는 주산(主山) 별단(別壇)에서 지냈다. 축문을 보면 “봉산 양지바른 데에(鳳山之陽) 제단과 울타리를 새로 만들었다(壇壝新設).” 봉산은 동헌 뒤편(서쪽) 비봉산으로 예부터 신령이 감응하는 자리였다.
용이 나오는 장소가 대부분이다. 지명에 용이 바로 나오는 데가 많다. 그렇지 않은 주물단도 주물진 용단과 같고 벽사단=벽사강도 와룡강=와룡정과 통한다. 용은 물속에 사는 신령스런 존재여서 제대로 응답하면 비를 내릴 수 있다. 여항산과 여항산 상봉은 용과 무관하지만 함안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하늘과 가장 가깝다. 하늘에 있는 신령과 잘 통하는 위치라 할 수 있다.
자이선에서는 비공식 기우제를
하지만 결과는 신통찮았다. 열세 번째 공식 기우제 다음날 감영에 보고한 공문이다. “가뭄이 두 달 동안 지루하게 이어지니 들판과 습지가 모두 벌겋게 타버렸고 …지금 농사 형편은 참혹하여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렵습니다.”
오횡묵은 생각 이상으로 영리했다. 공문을 보내고 곧바로 “전공(前功)이 아깝고 인사(人事)를 다하지 않았으니 내가 또 따로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였다. 아전들이 “명부(冥府)가 반응이 없을 수 있다”며 반대하는데도 “나는 할 뿐이고 하늘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느냐”며 밀어붙였다.
이런 계산이 있었지 싶다. ‘스무날 넘게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비는 데 들인 공력이 헛수고가 되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그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니 이제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금 더 빌면 비를 만날 수도 있겠구나. 내리지 않아도 손해는 아니지. 백성들한테 그만큼 애썼다는 인상은 심어줄 수 있으니.’
오횡묵은 이어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는 예식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하니 내가 홀로 삼헌(三獻)을 하는 대신 다음은 재임이 다음은 공형이 하는 식으로 하자”고 하였다. 재임은 향교 임원이니 지역 양반들이고 공형은 삼반관속이므로 고을 아전들이다. 이는 제사에 세 번 술잔을 올리는 삼헌에서 초헌·아헌·종헌을 수령·양반·아전이 저마다 나누어서 하자는 얘기다. 수령 단독이 아니라 양반과 아전까지 공동으로 주관하고 책임을 지자는 것이다.
기우제 장소로는 자이선을 꼽았다. 오횡묵이 재발굴한 명소로 그 이전에도 수령들이 즐겨 놀던 자리였다. 오횡묵이 알아보지 못하고 새로 꾸미지 않았다면 그냥 민간에서 일상으로 신령에게 비는 공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었다. 풍수로 볼 때 “읍의 주룡(主龍)으로 예로부터 신령이 영험하게 응답한 자리였기 때문이다.”(1892. 윤6. 27.)
마지막 기우제에 비는 제대로 내리고
추가 기우제는 감응을 가져왔다. “윤6월 28일 오각(午刻=정오 전후)에 우레와 비가 일어났는데 잠깐 왔다가 잠깐 개이고 하였다.” “7월 1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도로 그치고 흐렸다. 두 차례 기우제를 지낸 나머지 비가 오는 은택을 입어 거의 해갈이 되었다.”
비가 듬뿍 내린 7월 1일은 15차 기우제를 지낸 윤6월 29일 바로 다음날이었다. 오횡묵은 곧바로 “대중과 의논하여 정지하기로 했다.” 거기에는 다른 까닭도 있었다. 또 본격 가을을 알리는 처서(處暑)가 다음날이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가을에는 절대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비는 줄곧 이어졌다. 4일은 “늦은 뒤에 가랑비가 왔다.” 5일은 “오각 지나서 벼락이 치고 비가 왔다가 포시(哺時=오후 4시 전후)에 그쳤다.” 6일도 “비가 오다가 늦게 그쳤”으며 뒤이어 10일에도 “비가 왔다.”
7월 11일 마산창 출장길에 보는 농사형편은 이랬다. “들판에 참새가 쪼아먹을 낟알도 거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 백곡이 풍성하여 넘치도록 논고랑 밭고랑에 출렁인다.” 그런데도 놀랍고 기쁜 줄을 느끼지 못하였다. “방금까지 기우제에 골몰해 있었고 백성들 걱정거리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동안 비 내리는 은택이 늘 모자라기는 했지만 곧 그늘지고 볕나는 가운데 가만히 불려주고 모르게 길러주어 이렇게 되었다. 옛말에 ‘7년 가뭄에도 물 한 번 대어주면 효력이 있다’는데 참으로 그렇다.”
빌지 않아도 내리는 비
비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빌어도 오지 않고 빌지 않아도 오는 존재였다. 7월 16일부터 20일까지 내리 닷새 동안 끊이지 않고 비가 내렸다. “반갑던 비(喜雨)가 도리어 괴로운 비(苦雨)가 되어 농민들에게 심히 민망하다.” 그러고도 21일과 22일을 지나 23일 오전까지 쏟아지는 바람에 “시냇물이 불어서 가득하고 강가와 갯가에는 물이 넘쳤다.”
양상은 골짜기와 물가가 달랐다. 당시 함안의 열여덟 면에서 여섯 면이 골짜기에 있었다. “물을 대는 논은 물론 올벼와 늦벼가 차례로 이삭을 팼다. 가물에 말라 비틀어졌다가 절후가 급함을 고함에 일어났다. 콩과 팥은 알맹이가 들어앉을 기약이 없다.”
강가 지대인 열두 면은 아무래도 피해가 더 컸다. “전답에 여러 곡식을 한 번 보니 모두 물에 빠져서 영영 썩어 문드러지게 되었다. 목화는 알맹이가 맺혔으나 폭우로 물에 잠겨 대부분 수해와 한재를 당했다.”
그래도 고맙게 풍년이 들어
그해 추석을 오횡묵은 함안에서 보내지 못했다. 오횡묵은 백성을 제법 잘 다스리고 특히 조세를 제대로 거두어들인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다른 고을까지 떠맡는 겸관이 되어 추석 전날에 밀양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밀양에서 오횡묵은 하필이면 시장에서 사람이 맞아죽는 옥사까지 터져서 더욱 바쁘게 지냈다. 이런 곡절 끝에 함안으로 돌아온 날은 9월 2일이었다. 하루 전날 밀양을 떠나 창원에서 하루 묵은 다음 산익면(지금 입곡군립공원 일대)에 이르니 풍년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던 것이다.
“가을걷이가 한창인데 들판의 정취가 풍요롭고도 즐거웠다. 여름 동안의 가뭄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하니 이제 이 풍요로움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가 없다.” 가뭄과 장마를 번갈아 겪었는데도 이처럼 결과가 좋으니 기쁘면서도 어리둥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농민들이 고생스럽게 농사를 짓고 이루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고 했다. 가뭄을 맞아 농민들이 물 한 방울 마련하려고 몸부림치는 애절한 모습을 눈으로 보았기에 이리 적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날만큼은 “길에서 농민을 만나면 번번이 수레를 멈추고 위로해 주었다.”
기우제를 지낸 것은 오횡묵 군수 본인이지만 들판에서 갖은 고생을 한 것은 농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덕분이었다.
김훤주
## 2020년에 펴낸 책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도서출판 피플파워)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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