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쯤 전에 전라도 목포 옛 도심 거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의 성우제 작가와 함께였다. 먼저 ‘창성장’에 들렀다가 문이 잠겨 있기에 ‘손소영갤러리앤카페’를 찾았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소품도 하나 장만했는데 둘 다 괜찮았다.
이 두 곳은 2019년 초입에 신문 방송이 떠들썩하게 들끓었던 손혜원 당시 국회의원의 조카들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들이다. 옛 도심 거리는 지금이나 4년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꿔져 있고 조금 더 차분해져 있는 것이 달랐다.
1. 조선일보류는 투기라 했고
그때 신문 방송들은 손혜원 의원이 투기를 위해 알박기 차원에서 조카들 이름으로 건물을 구입했다는 식으로 연일 보도해댔다.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목포시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활용했다고도 했다. 정치적으로 목적이 뚜렷한 조선일보류의 행태였다.
조금이라도 물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게 허무맹랑한 헛소리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투자가 아닌 투기가 되려면 단기간에 치고 빠지기를 해서 크든 작든 차익을 남겨야 한다. 그런데 목포 옛 도심은 그게 애초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쇠락한 소도시의 근대 생활문화가 남아 있는 옛 도심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을 정도로 만들려면 상당히 긴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이 첫째였다. 당장 개발에 들어가도 성공할 가능성이 보이고 그에 따라 땅값이 폭등하려면 10년 세월도 모자란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런 옛 도심은 통째 개발하더라도 건물별로 특징과 장점을 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주체도 대자본이 아닌 지역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본인 건물을 지분으로 들고 들어갈 수는 있어도 매각(그것도 비싼 값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둘째였다.
2. 사람들은 부화뇌동을 했고
그럼에도 조선일보류들이 투기라고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부풀리니 그렇게 보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도 “저거 투기 맞아”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귀가 얇은 이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심지가 굳어 보였던 인물도 여럿이 부화뇌동을 했다.
내가 아는 기자 출신 한 사람도 SNS에서 공공연히 그렇게 말했다. 겉으로 별로 내색은 안 했지만 실망이 작지 않았다. 평소 사안마다 탄탄한 필력으로 뚜렷한 근거를 대면서 조선일보류에 맞서서 선명한 주장을 펼치던 후배였기 때문이다.
그걸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자기 경험을 뛰어넘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저거는 아마도 본인이 투기를 해봤거나 아니면 적어도 투기 관련 기사를 쓰면서 그쪽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일 거야.’
3. 사람은 경험을 뛰어넘기가 힘들고
내가 투기가 아니라고 확신한 까닭도 경험에 뿌리가 닿아 있었다. 청소년과 어른들을 상대로 탐방활동을 하다 보면 허물어져 가는 옛 도심을 자주 만나게 된다.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절로 든다. 역사적 맥락을 알고 새로운 관점에서 재구성하면 훨씬 좋을 텐데……. 좀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거나 느끼고 가도록 할 수 있지 싶은데…….
일제강점기 근·현대 유물로 보기를 들자면 밀양 삼랑진역 일대가 있다. 역장 관사, 경찰 지서장 관사와 역무원 기숙사, 공동 우물, 축대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밖에도 적산가옥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이후 지속해 오던 변화가 90년대 초반에 문득 멈춘 거리도 제법 그럴듯하다.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또는 ‘청소년 지역 탐방대’ 등을 하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만나는 풍경인데, ‘아 저거는 없애면 안 돼. 그냥 그대로 두고 거리를 살려야 해’ 이런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명물은 어디에나 있다. 손혜원 의원도 목포 옛 도심을 보며 이런 느낌이었겠지.
4. 성우제는 그의 똘끼를 알아보았고
그런데 성우제는 그 어떤 분석도 없이 손혜원의 목포 옛 도심 건물 매입이 투기가 아니고 투자인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단초는 손혜원이 물불 가리지 않고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똘끼’였다. 최근에 펴낸 책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에 그렇게 적혀 있다.
“문제가 불거진 이래 손 의원이 보여준 행보로 판단하건대, 그이는 이것저것 다 떠나 내 눈에는 ‘똘끼 충만한 젊은 예술가’처럼 보인다. 그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안 그랬다면 젊은 조카들 데리고 목포에 들어가서 재산을 그렇게 퍼부을 리가 없다. 게다가 두들겨 맞으면 맞을수록 전투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저 나이에, 저 경력에, 저 지위에, 저 처지의 사람 가운데 ‘자, 다 나와. 손목 걸자’는 사람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그의 목포 프로젝트는 ‘미쳤다’ 소리 듣기에 딱 알맞을 성격이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 가서 완성된 것을 보면서 돈 쓰고 즐길 줄만 알았지,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한 적도, 경험한 적도 없으니.”
“내 관전 포인트는 오로지 쇠락한 지방 소도시의 거리를 제대로 디자인하여 살려보겠다는 늙지 않은 저 예술가의 똘끼가 한국에서 과연 통할 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되든 한국에서는 처음 나온 똘끼로서 의미가 작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5. 현장에 가면 증거가 있고
이번에 성우제는 여기에 있는 오래된 물건 하나를 두고 “투기가 아니고 투자라는 증거”라고 말했다. 볶은 커피콩을 갈아내는 구식 그라인더였다. 치고 빠질 생각이었으면 이런 멋진 걸 안다고 해도 비싼 돈 주고 왜 장만했겠느냐는 얘기였다. 말이 그럴듯해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질세라 투기가 아니고 투자인 증거를 하나 찾아냈다. 손소영갤러리앤카페는 2층 적산가옥인데 목재가 크고 두텁고 널찍하다. 소나무를 통으로 써서 귀티가 났는데 검은색을 띠면서 반들반들 윤이 났다. 무슨 칠을 했느냐고 물으니 ‘옻칠을 했다’고 했다. 특정 목재만 아니라 2층까지 목재를 모두 옻칠을 입혔다는 얘기였다.
아시는대로 옻칠 재료는 매우 귀해서 무게로만 따지면 금(金)보다 값이 더 나간다고 한다. 신기한 기색을 숨기고 물어보았다.
“사장님이 하셨어요?”
“아니요, 고모가요.”
“몇백만은 들었겠네요?”
“아니요, 천만 원도 훌쩍 더 들었어요.”
속으로 많이 놀랐다. ‘똘끼 충만한’ 손혜원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건물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거리까지 맞춤으로 디자인해서라도 살려내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데 이리 값비싼 정성을 기울일 까닭이 없다.
6. 온몸에 똘끼 충만한 저 늙지 않은 예술가
성우제 작가는 이렇게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재미있게 특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한국 땅에서는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성 작가는 태평양 건너 멀리 있으니까 제대로 잘 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이런 글들을 모은 책이 <캐나다에 살아보니 한국이 잘 보이네>다.
그리고 ‘늙지 않은 저 예술가’ 손혜원은 최근 본인의 행동으로 투기가 아니고 투자임을 한 번 더 입증했다. 나전칠기 예술작품을 비롯해 건물과 땅 등 50억 원어치가 넘는 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목포시에 기증했다. 과연 똘끼 만땅이다.
그나저나 성우제 작가가 55년생 예순여덟인 그를 두고 ‘늙지 않은’이라는 관형어를 굳이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런 정신과 자세·태도를 일찌감치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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