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모든 글 3554

50년 전 대한민국 야생 표범의 최후

'표범' 하면 우리나라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특히 30대 이하 젊은 세대는 아프리카에나 사는 동물 정도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5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표범이 살고 있었다. 그것도 경남에. 야생 표범이 마지막으로 잡혀 죽은 데가 바로 경남이기도 하다. 3월 4일은 그로부터 딱 50년이 되는 날이다. 그날 숨을 거둔 최후의 한국 표범을 기리는 마음을 이 글에 담았다. 그것은 경남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대한민국 야생에서 잡힌 최후의 표범이었다. 1970년 3월 6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함안에서 18세쯤 되는 수표범이 잡혀 화제. 지난 4일 상오 10시쯤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뒷산에 노루 사냥갔던 설욱종씨(50·부산시 서구 부민동1가 18) 등 3명은 범의 발자국을 따라..

시쓰고 노래하며 토종씨앗 지키는 청년 김예슬

경남 합천 황매산 자락 가회면 목곡마을에는 서정홍이라는 시인농부가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로 유명한데 그밖에도 많은 시집과 산문집을 내었다.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을 했고 90년대부터는 농민운동을 했다. 우리밀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으로 시작하여 1998년 농촌에 가서 농부가 되었으며 2001년 도시로 돌아와 우리농살리기운동 경남본부 사무국장을 하다가 2005년 다시 농촌에 가서 지금껏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아내와 함께 소농을 하면서 뜻맞는 이들과 공동체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나무실공동체라 했다가 2008년에 열매지기공동체로 이름을 바꾸었다. 열매지기는 열매를 지키는 농부들이라는 뜻이다. 2020년 현재 합천군 가회면의 대기·원동·동대·연동·목곡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아홉 가구 스물일곱..

개항기 마산 문헌 하나 찾았다 '마산번창기'

오래 전부터 이름 정도만 알고 못 찾았던 자료인데 이번에 드디어 찾았다. 慶南志稿第一編 馬山繁昌記. 明治41年, 1908년 마산의 耕浦堂에서 발행한 책으로 저자는 諏方武骨. 일제강점기 마산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문헌인 馬山港誌(1926)의 저자이기도 하다. 책은 광고면 등을 포함해 148면 분량으로 서언, 마산의 대관, 관공서, 지질및기후, 위생및의사, 교육기관, 신도및종교, 교통, 호구, 경제사정, 마산잡록잡황, 마산의 노래 등으로 구성된 종합적인 안내서 성격이다. 1900년대의 마산에 대한 일본 문헌으로 韓国出張復命書(1901), 韓国案内(1902), 韓国水産誌(1908) 등 여러 문헌에 단편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지만 단행본으로는 이 자료가 처음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馬山と鎮海湾(1911)으로 알려졌..

일제강점기 마산의 일본 사찰 앞에 서 있던 누각의 정체?

넓은 공터 왼편으로 이층 누각이 서 있고 그 너머로 마산만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완월동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曹洞宗 福壽寺라는 절에서 본 풍경이다. 예전에 이 사진을 보면서 복수사는 일본 사찰인데 저 이층 누각은 뭐지? 분명히 조선식인데? 원래 저 자리에 있었던 건물인가? 저런 건물이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데?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곤 시간이 흘러 잊어버리고 있다가 최근에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누각은 원래 鎭東에 있었는데 '진동학교조합'에서 이 절에 기부 이건하였고 복수사는 이를 山門으로 삼아 觀海樓란 이름을 붙이고 1928년 5월에 낙성식 및 관음제를 성대히 열었다는 것이다. 이후 이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판매할 정도로 당시 마산의 새로운 명소로 등장하게 됐다. ..

코로나 보도, 제발 기본이라도 좀 지키자

어이없는 코로나 사태 언론보도 "다 너 때문이야, 나와 딸이 감염된 건, 다 너 때문이라고." 윤다혜 기자가 2월 13일 송고한 기사의 첫 문장이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중국 저장성에 위치한 '코로나19' 격리 병실에 울린 여성의 외침엔 원망이 가득했다. 아내와 딸을 감염시킨 장본인은 의사로 일하고 있던 남편 양모 씨였다. 그는 후난성과 후베이성이 접하고 있는 작은 도시의 의사였다." 좀 어이 없지 않은가? 뉴스 발신지가 '서울=뉴스1'으로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윤다혜 기자가 중국 특파원도 아니고, 기사 속 그 작은 도시의 격리병실을 방문취재한 것도 아닐텐데 어떻게 이 여성의 외침을 직접인용부호(" ") 속에 담을 수 있을까? 기사 속에 "현지 의료진은 전했다"는 대목이 나오긴 하는데, 그 ..

2만 5000원 짜리 희망연대 백서의 의미

포털 다음이나 네이버 검색창에 ‘친독재’라는 키워드를 넣어본다. ‘다음 책’에서는 유일하게, ‘네이버 책’에서는 6권의 책 중 맨 위에 가 나온다. ‘친일’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약 70종의 책이 나오는데, 물론 그 속에도 이 책이 포함되어 있다. 클릭하면 예스24, 교보문고, 알라딘 등 8개 인터넷서점에서 판매 중이라는 안내와 함께 책 소개, 저자 소개, 목차, 출판사 서평 등이 펼쳐진다. 이 책에는 ‘열린사회희망연대 20주년 기념 백서’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백서(白書)’란 말은 17세기 영국 정부가 발간한 외교정책 보고서에서 나왔다. 즉 정부가 펴낸 공식보고서의 표지가 흰색이었던 데서 비롯됐다. 이후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단체가 내는 활동보고서에도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일반화했다. 지역사회..

일본군 '위안부'와 민간인학살은 다른 사건이 아니다

“4283년(1950년) 7월 15일 당시 보도연맹원 360명을 마산형무소에서 수감한 후 특히 부녀자들에게 능욕을 자행하고……산골에서 총살한 후 암매장했는가 하면 또한 선박을 이용하여 바다에서 살해수장하였던 것이다.”(1960년 7월 마산피학살자유족회가 국가를 상대로 낸 고발장) “김영명(23) 씨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 됨됨이로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던 교사였다. 지서장 김병희가 그녀의 미모를 탐내오다가 오빠를 빌미로 잡아가 강제로 능욕하고 학살해 버렸던 것이다.”(1960년 국회 양민학살조사특위 조사기록) 위에 인용한 글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공공연한 성폭행이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게다가 아래와 같이 한국전쟁 당시에도 ‘위안부’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

'디지털 박물관'도 없는 경남의 12개 시·군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다 '디지털 향토문화 전자대전'이라는 걸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창원시의 경우 '디지털창원문화대전', 진주시의 경우 '디지털진주문화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되고 있지요. 예를 들어 '민주성지 마산'이라는 문구를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면 네이버는 '지식백과', 다음은 '백과사전' 항목에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 민주 성지가 된 마산'이라는 글이 뜹니다. 그걸 클릭하면 '디지털창원문화대전'의 해당 글이 열리죠. '마산 민간인학살'이라는 검색어를 넣어봅니다. 그러면 역시 백과사전 항목에 '마산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과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글이 상위에 뜹니다. 이 또한 '디지털창원문화대전'에 올려져 있는 콘텐츠입니다. 현대사의 두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디지털문화..

유시민 알릴레오에 대한 KBS 성재호 사회부장의 반박

애초부터 출연이 아니었습니다. 인터뷰 구성물도 아니고, 취재였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취재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는 뉴스를 하려는 것이었지, ‘시청자 세상’을 만들고자 한 게 아닙니다. MB 집사가 아무리 MB를 감싸며 말을 하더라도 ‘DAS’는 MB 것이라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보도하는 게 저널리스트라 생각합니다. 맥락을 왜곡했다고 합니다. 우선 당시 녹취록 전문을 첨부합니다. 꼭 한 달 전이네요. 지금은 많은 사실 관계가 더 드러났지만 당시 조국 장관과 부인은 사모펀드 투자과정에서 운용사의 투자처와 투자 내역 등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 사전에 알고 돈을 넣었다면 자본시장법이나 공직자윤리법 등의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인터뷰 취재 과정에서 부인 정 교..

괴물 기자, 망나니 검사

경남도민일보 창간 전 몸담았던 신문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워낙 낮은 임금에다, 그마저도 체불되기 일쑤였다. 편집권 독립은커녕 최소한의 자율성도 없었다. 중요한 기사를 빼거나 키울 권한은 모두 사장에게 있었다. 기자 출신이었던 사장은 직접 사회부장이나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다. 내가 입사한 지 2년이 되었을 때 비밀리에 노동조합 결성이 추진됐다. 회사 인근 다른 빌딩 강당을 빌려 기습적으로 창립총회를 열었다. 나는 '무임소 부장'이란 직책을 맡았고, 수개월간 사측과 갈등을 거쳐 전면파업에 들어갔을 땐 사무국장이 되어있었다. 당시 노조가 내세운 구호는 '부실자본 축출, 독립언론 건설'이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의 지지방문이 이어졌다. 한 달 후 파업이 끝났을 땐 사주가 바뀌었고 월급이 올랐으며, 제한적이지만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