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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69

강기갑, 요즘 시골에서 뭐하나 했더니...

그는 여러 모로 특이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사람처럼 수염을 기른다. 외출할 때는 한복만 입는다. 신발은 고무신이다. 뼈만 앙상한 체구지만, 다부진 인상이다. 갓만 안 썼다 뿐이지 영락없이 꼬장꼬장한 조선시대 선비다. 게다가 걸핏하면 단식을 한다. 양치질도 치약 대신 죽염을 쓴다. 식사 전후 두 시간 동안은 절대 물을 마시지 않는 '밥 따로, 물 따로' 식사법을 철저히 지킨다. 강기갑(1953년 6월 7일생, 실제로는 1951년생) 전 국회의원 이야기다. 그가 살고 있는 경남 사천시 사천읍 장전2리 흙사랑농장은 행정구역만 읍(邑)일뿐 두메산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읍사무소에서 5.6km나 떨어진 시골마을 안에서도 외딴 산 밑에 위치해 있었다. 농장은 꽤 넓었다. 아내와 3남 1녀 가족이 함께 사는 2층 집과 ..

넥센그룹 강병중 회장의 성공비결 들어보니...

한 마디로 다부진 인상이었다. 기업가라기보다는 군인의 기강(氣强)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 도중 그 이야기가 나왔다. 실제로 군인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말았다. 키가 작은 탓이었다. 당시 육사는 165cm 이상이 돼야 합격할 수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는 164cm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동아대 법대에 입학했다. 고시공부를 하여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꿈도 좌절됐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시 공부는커녕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 6년 만에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전화위복이었을까? 그는 지금 매출액 1조 7000억 원의 넥센타이어를 비롯, 튜브와 골프공 등을 생산하는 (주)넥센, 지역민방인 KNN 외에도 넥센테크, 넥센산기, 넥센L&C..

송정문, 한 여성장애인의 좌절과 도전

사실 예전부터 그가 궁금했다. 2000~2001년 무렵 혜성처럼 나타나 ‘경남여성장애인연대’를 창립하고, 진보적 장애인·여성 인권운동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여자. 금기로 여겨온 장애인의 성(性) 문제를 공론의 장에 올리고, 매년 관변장애인단체를 통해 시혜와 동정으로 치러져온 ‘장애인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거부했던 사람, 송정문(1972년생) 씨 이야기다. ※글이 좀 길어 스크롤 압박이 심할 겁니다. 미리 각오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글입니다. 월간 피플파워 10월호에 실린 글보다 더 깁니다. 2002년에는 당시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극찬이 쏟아지던 영화 를 정면 비판하는 글을 발표, 전국적인 논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이 일로 그는 장애인 문제를 ..

해외활동 다녀온 아들을 인터뷰하다

아들 녀석이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한국YMCA전국연맹이 공동주관한 태국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아시아의 좋은 친구들 라온아띠 태국팀'이란 프로그램이었다. 봉사활동이라고는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종의 국제 교류 프로그램인 듯 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태국의 대학생들이 홈스테이 팀에 배치되어 의사소통을 도왔다고 하니 말이다. 게다가 봉사활동이라고 해봐야 독거노인의 집 청소를 해준 정도였다고 한다. 부모와 동행하지 않고 생전 처음으로 해외 체험을 하고 온 아들녀석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순전히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그냥 듣기 보다는 영상 인터뷰 형식으로 기록해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 역시 녀석의 삶의 기록이니까... 8월 2일..

송미영 이야기(11)다시 잡은 가야금

미영 씨가 가야금을 다시 잡았다. 지난 3일 옛 스승이었던 조순자 가곡전수관장으로부터 호통을 들었던 바로 그날 저녁부터였다. 조 관장은 "너 가야금 줄이 그게 뭐냐? 신문에 난 (가야금) 사진 보니 기가 막히더라. 내가 어떻게 가르쳤어? 가야금 줄 항상 가지런히 매어 놓는 것부터 가르쳤지?"라고 나무랐다. 그날 밤 식당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벽에 걸려 있던 가야금을 내렸다. 한 때 고급 한정식 집에서 그녀가 가야금을 배웠다는 말을 듣고 "손님들 앞에서 한복 입고 가야금 연주를 해주면 돈을 많이 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단번에 거절했던 미영 씨였다. "그건 제게 가야금을 배워준 선생님에 대한 모독이잖아요." 그녀는 흐트러진 채 방채해뒀던 가야금 줄을 다시 맸다. 그러나 두 대의 가야..

송미영 이야기(9)냄새도 맡기 싫은 중국음식

가족이 모두 달라붙어 중국음식점을 차렸지만 장사는 쉽지 않았다. 평소 요리 솜씨가 있는 사람이라도 중국음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따로 배워야 했지만, 월급을 200만~300만 원씩이나 주면서 고용한 요리사는 절대 요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1년 후, 장부를 정리해보니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남았다. 결론은 요리사 인건비 때문. 안 되겠다 싶어 미영 씨가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너댓 살밖에 안 된 아들은 뒷전에 두고 주방에서 설겆이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요리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자 요리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미영 씨의 손목이 워낙 약해 후라이팬을 돌리는 건 무리였다. 남편 도연 씨도 주방에 투입됐다. "주방도 맡고, 배달도 했죠. 보통 중국집과 달리 우리는 새벽까지..

송미영 이야기(8)착하게만 살진 않았다

지금까지 미영 씨의 희생적인 삶이 주로 소개됐지만, 그녀가 오로지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삶도 결코 평탄하진 않았지만, 아들(13·현재 중학교 1학년)에게도 평생 씼을 수 없는 고통을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조순자 선생과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 병석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영 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빈소에 줄을 이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앵벌이 장애인들의 대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미영 씨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비로소 어머니의 병수발에서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몇 개월 후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덕분에 양 손목이 없는 아버지와 장애인들 뒤치다꺼리에서도 해방될 ..

송미영 이야기(7)조순자 선생이 기억하는 미영

이쯤에서 미영 씨를 수양딸로 삼으려고까지 했던 조순자 관장이 어떤 인물인지 기록해둘 필요가 있겠다. 국내, 아니 세계에서 유일한 가곡전수관 입구에 적혀 있는 조 관장의 이력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전수관장 조순자(曺淳子), 호 : 영송당(永松堂), 생년월일 : 1944년 8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나 1959년 중앙방송국(현 KBS) 국악연구생 2기생으로 선발되어 국악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주환, 김천홍 등에게 가무악의 실기와 이론을 수학한 후 1962년부터 국립국악원 연주원으로 활동하였다. 국립국악원 첫 해외연주인 1964년 도일 공연에서 연주하는 등 활약하다가 1968년 인화여고 국악반을 지도하기 위해 교사로 전직한 후 1970년 결혼과 더불어 마산으로 귀향하였다. (…중략…) 1973..

송미영 이야기(6)23년만의 재회

23년동안 맺혀있던 가슴 속 응어리가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뭐라고 울부짖는 듯 했지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옛 제자는 그렇게 한참동안 큰 소리로 울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예능보유자 조순자(67) 가곡전수관장이 지난 3일 오후 3시 20분 창원시 성산구 내동 호호국수 송미영 씨를 찾아갔다. 23년 전 수양딸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조순자 관장과 미영 씨의 사연이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바로 그 날이었다. 상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호국수의 단골이자 페이스북 창원시그룹 회원인 손민규(45) 씨가 조 관장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사장님, 조 관장님 오셨는데요." 그 말에 놀라 주방에서 나오던 미영 씨의 다리가 휘청했다. 털썩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조 관장이 그녀를 부축..

송미영 이야기(5)가곡명인 조순자 선생과의 인연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에 있는 미영 씨의 집 현관문을 열면 정면으로 보이는 묵직한 장식품(?)이 둘 있다. 벽에 세로로 걸려 있는 가야금이다. 자세히 보니 그냥 장식용 모조품이 아니라 진짜 가야금이다. 국숫집 주인 집에 웬 가야금일까? 미영 씨는 고등학교까지 자퇴한 후 1년 넘게 엄마 병 수발과 장애인들 뒤치닥거리에 매달렸다. 그런 미영 씨 덕분에 당시 코흘리개였던 막내 애영(30) 씨도 탈없이 자랄 수 있었고, 남동생 둘도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벌써 23·4년 전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 송병수 씨는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들 때문에 장녀를 희생시킨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미영 씨가 열 아홉 되던 해 어느날 '큰 딸을 저렇게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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