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사람이야기

송미영 이야기(8)착하게만 살진 않았다

기록하는 사람 2011. 7. 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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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미영 씨의 희생적인 삶이 주로 소개됐지만, 그녀가 오로지 성실하고 착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삶도 결코 평탄하진 않았지만, 아들(13·현재 중학교 1학년)에게도 평생 씼을 수 없는 고통을 줬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조순자 선생과 그렇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 병석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영 씨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빈소에 줄을 이었다. 어느새 어머니는 '앵벌이 장애인들의 대모'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미영 씨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비로소 어머니의 병수발에서 벗어난 것이다. 게다가 몇 개월 후 아버지가 재혼을 했다. 덕분에 양 손목이 없는 아버지와 장애인들 뒤치다꺼리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미영 씨가 마산 내서읍 중리에 반석미용원을 차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미용실을 하면서 남편 김도연 씨를 만났고, 결혼 후 경북 구미에서 시집살이를 했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대로다.

이 대목에서 미영 씨가 왜 굳이 안 해도 될 시집살이를 자청해 그 고생을 했을까 의문이 생길 법하다. 실제 그 이야기가 연재된 후 많은 독자들로부터 그 질문을 받았다. 심지어 한 독자는 "미영 씨의 답답한 선택에 같은 여자로서 화가 난다"고도 했다.

"지금은 아버지를 이해해요. 만일 그 때 아버지가 재혼이라도 하지 않았다면, 양 손도 없고 눈도 잘 안 보이는 아버지를 누가 보조해주겠어요? 하지만 그 땐 어려서 그랬는지, 엄마 돌아간 지 1년도 되지 않아 새엄마를 들이는 아빠가 너무 미웠어요. 그래서 결혼을 핑계로 아빠와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던가 봐요."

어쨌든 그렇게 아버지가 미워서 떠났던 시집살이였지만, 1년 후 다시 아버지에 의해 마산으로 돌아왔다. 딸을 마산에 데려온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딸아, 미안하다. 내가 아무리 장애인이지만, 너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비록 빌어먹더라도 도둑질은 안 하고 살아왔는데, 이젠 돈을 벌어야 겠다. 사위자식도 자식이니 저 놈하고 같이 벌자. 우리도 이제 한 번 편하게 살아보자."

미영 씨의 아버지 송병수 씨는 종교를 알고 난 뒤, 자식들과 함께하던 사채업을 정리했다. 지금도 그는 당시의 사채업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장로인 그는 불편한 몸이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그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게 사채업의 일종인 '일수놀이'였다. 아버지와 남동생, 남편 도연 씨는 수금책을 맡았고, 미영 씨는 사무실에서 회계를 봤다.


"일수놀이라는 걸 해보니 돈이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더군요. 일수라는 게 그렇잖아요. 사람들 피고름 뽑는 거…. 항상 금고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이 있었어요. 남동생도 점점 조직폭력배들과 어울리게 되고, 나태해지고, 사람 타락하고….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자식들 살리려고 나쁜 짓을 가르친 거죠."

하지만 돈맛을 알게 된 그들이 이 일을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다.

"사람이 할 짓은 못되지요. 돈 받으러 갔는데, 어른은 보이지도 않고 아이들만 쫄쫄 굶고 있는 걸 보면 참!…. 결국 수금은커녕 라면 한 박스 사서 던져주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어요." 미영 씨 남편 도연 씨의 말이다. 그는 오히려 술집에 수금하러 가는 게 쉬웠다고 한다. "그 땐 젊었으니까 겁 나는 것도 없었죠. 돈 안주면 두들겨 패고, 부수고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제법 돈도 모았다. 땅도 사고, 승용차도 샀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그렇게 버는 돈이 부담스러웠는지 어느날 하루 사위와 자식들을 불러모았다.

"이러다가 사위·자식 죄다 전과자자 만들겠다. 내가 돈 때문에 자식들을 버려놓았구나. 굶어죽더라도 돈은 개같이 고생하면서 벌어야 한다. 이 짓 그만 때려치우자."

폭탄선언이었다.

"그 무렵 미영이의 소개로 교회에 다니게 됐는데, 이게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더라고. 그래서 딱 접어야 겠다고 결심했지." 그 때가 1997년 IMF 구제금융 무렵이었다.

다시 미영 씨의 말이다. "정말 희한한 일이죠. 폭리로, 그렇게 번 돈은 한순간에 날아가게 되더군요. 다 팔아서 빚 갚고 난 뒤, 남은 돈으로 '777 오락실' 같은 걸 했는데, 쫄딱 망했어요. 그 다음엔 세탁소를 차렸는데, 그것도 망했죠. 결국 다 날려먹고 다시 무일푼이 됐어요."

이들 가족은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아버지도, 미영 씨도, 남편도, 남동생들도 직업이 없었다. 결국 다시 미영 씨가 '총대'를 매야 했다.

"사채업을 하던 우리가 거꾸로 사채 2000만 원을 얻었어요. 그걸 밑천으로 창원 중앙동에 대동관이라는 중국집을 냈죠."

미영 씨의 딸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고, 아들은 서너 살쯤이었다. 바로 그 중국집 때문에 미영 씨는 아들에게 큰 죄책감을 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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