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김훈이 내세에서 만나자고 한 선암사 뒷간

김훤주 2010. 3. 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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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아침, 선암사 경내에 들어서자 갑자기 똥이 마려웠습니다. 뒷간을 찾아들어갔습니다. 기와를 이고 마루도 잘 깔려 있는 으리으리한 건물이었습니다.

오른쪽은 여자 왼쪽은 남자로 나뉘어 있었고 꽉 막혀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안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과도 마주치면 좀 겸연쩍을 것 같았습니다.

나뉜 공간은 허리와 어깨 사이 높이에서 툭 트여 있고 앉아서 똥을 누면서 보니 얼기설기 세로 지른 나무 사이로 바깥 풍경이 들어왔습니다.

똥 누던 자리에서 일 다보고 일어나 찍었습니다. 김훈의 말대로, 어둑하지만 그늘은 없습니다.

제가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래로 아득한 깊이에서 똥들이 휴지랑 뒹굴고 있는 양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습니다. 자치 잘못하면 빠질 것만 같다는 생각에 서둘러 닦고 서둘러 나왔습니다.

누구에게선가 김훈이 여기 이 선암사 뒷간을 두고 쓴 글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번 참에 생각이 난 김에 한 번 들춰 봤습니다. 2000년에 초판을 낸 <자전거 여행> 115쪽부터 다섯 쪽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이리 말했을까요. 거슬러 앞으로 가 봅니다.

"건강한 몸이 음식물을 아름답게 처리해 내듯이 이 놀라운 화장실은 인간의 몸 밖으로 나온 똥을 다시 아름답게 처리해 낸다.

그것은 똥으로 하여금 스스로 삭게 해서 똥의 운명을 완성시켜 준다. 배설물은 이 두덤 더미 속에서 삭으면서 오래된 것들의 오래된 냄새를 풍긴다. 이 냄새는 풍요하고, 이 냄새는 사람을 찌르지 않는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원인 것이다."

"똥을 안 눌 때 똥누는 사람을 보는 일은 혐오스럽지만, 똥을 누면서 창살 밖으로 걸어다니는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계면쩍고도 즐겁다. 이 즐거움 속에서 배설행위는 겸손해진다."

왼쪽 나무창살 너머에 바깥 풍경이 있습니다. 사람들 쪼그리고 앉는 자리는 오른쪽입니다. 좌우가 대조를 이룹니다.

"화장실 안에는 직사광선이 들어오지 않아 어둑어둑하면서도 그늘이 없다. 바람이 엉덩이 밑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엉덩이가 허공에 뜬 것처럼 상쾌하다. 똥을 누기가 미안할 정도로 행복한 공간이다."

왼쪽 옆에서 봤습니다. 아래 1층에는 똥이 퍼질러 있고 위에 2층에는 사람 엉덩이가 둥둥 떠 있습니다.


제게는 이런 느낌까지 들지가 않았습니다. 상큼하고 색다르고 시원하고 내다보이는 바깥이 화사한 공간인 줄은 알아차렸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한 번 더 가게 된다면 작정을 하고 그윽하게 여겨볼 참입니다.

"사랑이여, 쓸쓸한 세월이여, 내세에는 선암사 화장실에서 만나자."는 김훈의 제안에, 제 마음이 공감이나 공명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 가늠을 해 봐야겠습니다.

김훤주

자전거 여행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훈 (생각의나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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