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원숭이 석상이 지키는 무덤의 정체는?

기록하는 사람 2010. 3. 1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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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아줌마·아저씨 4명의 나들이(☞아저씨·아줌마 블로거 4명이 산으로 간 까닭) 때 '변산바람꽃'이라는 봄꽃을 찾으려 산을 헤메던 중 뭔가 범상치 않은 묘(墓)를 발견했다.

비석을 읽어보니 '嘉善大夫(가선대부) 中樞院 議官(중추원 의관) 商山 周公(상산 주공) 諱 時成之墓(휘 시성지묘)'라고 되어 있다.(처음엔 가선대부를 '희선대부'로 잘못 읽어 한참을 헤멨다.)

해석하자면 가선대부라는 종2품 하계의 중추원 의관 벼슬을 지낸 주시성(周時成)이라는 사람의 묘라는 것이다. 비석에는 상산 주 씨(商山 周公)로 되어 있지만, 상산(商山)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이니 지금은 상주 주씨로 보면 될 것 같다.


상주 주 씨들은 경남 함안에 많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 묘가 발견된 곳이 마산 내서읍과 함안 칠원면의 경계지점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함안군 칠원면에 살던 상주 주 씨 문중의 한 인물인 듯 하다. (정확한 위치는 아래 다음 지도로 표시해놓았다.)

이 묘의 특이한 것은 봉분의 둘레석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진 속의 사람은 블로거 실비단안개 님이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주시성의 묘비명 옆에 작은 글씨로 그의 부인 김해 김 씨를 함께 묻었다는 것도 병기해놓고 있다. 사진이 좀 길어서 불편하지만 기록삼아 올린다.


위 사진에서처럼 왼쪽 작은 글씨로 '貞夫人(정부인) 金海 金氏(김해 김씨) 祔(부)'로 되어 있는데, 祔(부)는 합사할 부 자라고 한다.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묘의 구조는 봉분에 사각 둘레석을 쌓았고, 바로 앞에 묘비를 세웠으며, 상석과 묘비 사이에 길쭉한 사각형 혼유석(혼이 나와 노는 곳)이 있다. 혼유석의 길이가 상석보다 더 긴 것도 특이하다. 상석 앞에는 향로석이 있고, 주변에는 뭔가 다른 장식 석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훼손되어 나뒹굴고 있다. (사진 속의 사람은 블로거 달그리메 님이다.)

묘에서 볼 때 왼쪽에 그의 생애를 기록한 신도비가 있고, 좌우에 원숭이 석상이 있으며, 또한 문인석상도 좌우로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정승의 무덤에만 설치했다는 장명등(불을 밝히는 석등)도 있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살펴보자.


우선 신도비다. 위용이 범상찮다. 아래에는 거북이가 떠밭치고 있고, 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신도비를 떠받치고 있는 거북인데, 입에 여의주 같은 걸 물고 있다.


비신 위의 갓석에는 일렁이는 파도 속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 모습이다. 이 용의 몸체는 옆면과 뒷면으로 이어진다.

갓석의 옆면과 뒷면이다. 용의 몸체가 이렇게 빙~둘러 파도와 함께 새겨져 있다. 상당히 정교해보인다.


문인석이다. 뒤로 신도비와 망주석이 보인다. 이렇게 보면 보통 왕릉이나 고관대작의 묘에 있는 문인석과 별로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마나 자세히 보면 귀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대충 조각한 게 아니라 진짜 사람의 귀 구조와 거의 똑같다.


바로 옆에서 문인석의 귀를 좀 더 크게 찍어보았다.


문인석의 뒷모습이다. 뒷모습도 나름대로 신경 써서 조각한 흔적이 역력하다.


망주석이다. (아래에서 카메라를 들고 올라오고 있는 이는 블로거 천부인권 님이다.)


망주석도 조각이 아주 섬세하다. 앉아서 뭔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두 분의 아줌마는 블로거 실비단안개와 달그리메 님이다.


이번엔 원숭이 석상이다. 나는 처음에 동자석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동행했던 블로거 님들이 한결같이 "원숭이네~"라고 외쳤다. 그러고 보니 영락없는 원숭이다. 그동안 보았던 왕릉이나 묘지에서 말이나 다른 동물상은 많이 봤지만, 원숭이 석상은 생전 처음 봤다.

무덤의 주인이 원숭이 띠였을까? 아니면 원숭이를 특별히 사랑했던 사람이었을까? 참 이상한 일이다.


두 마리의 원숭이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약간 다른 원숭이다.


오른쪽 문인석상을 중심으로 망주석과 장명등이 함께 나오도록 찍어보았다.


뒤쪽에서 찍은 묘지 모습이다. 이 정도 무덤인데도, 지방 문화재자료나 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아니다. 그냥 이렇게 방치되어 있다. 석물들이 도난당할 염려도 있어 보인다.

과연 이 묘지의 주인인 가선대부 중추원 의관 주시성은 누구일까? 일단 주시경 선생과 이름이 비슷하고 본관도 상주 주씨인 점으로 보아 아마 같은 문중일 것 같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경남 함안(또는 내서) 사람이고 주시경 선생은 황해도 출신이니 직접 교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그의 정체를 찾아봤다. 상주 주 씨 문중에 중추원 의관과 가선대부를 지낸 '주시성(周時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함안 사람인 것도 일치했다. "자(字)는 치익(致翼) 호(號)는 계은(溪隱) 헌종(憲宗) 9년 계묘(癸卯 1843)생이며 관(官)은 순능참봉, 중추원의관,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분명한 것 같다. 사망년도는 1922년 80세 때였다.

그렇다면 중추원 의관(議官)이라는 벼슬에 대한 의문도 풀린다. 중추원은 고려시대의 중추원과 조선초기의 중추원, 그리고 대한제국시대의 중추원과 일제시대의 중추원이 제각각 다르다. 의관(議官)이라는 직함이 있었던 것은 대한제국시대일 것이 유력하다.


일제시대 중추원은 참의라는 직함을 줬다. 그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다. 대한제국시대의 중추원 의관들은 친일과 거리가 멀었을까? 일단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 이전이었으니 친일파였다고 보긴 힘들지만, 나라를 빼앗기기 전까지 꽤나 세도가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에 그가 죽었고, 그 시절에 이처럼 화려한 묘를 꾸밀 정도였다면 상당한 부호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정체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자료를 뒤져봤다. 주시성이란 사람에 대한 딱 하나의 자료가 나왔다. 당시 일본 경찰의 눈에는 '폭도'였던 무장한 독립운동가(또는 의병) 약 20여 명이 함안군 칠원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7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한국인 주시성 외 1명에게 한국돈 84관문(貫文)을 강탈해 도주했다는 일제시대 마산경찰서장의 보고서였다.

주시성이란 한국인 피해자의 주소는 함안군 칠원면(漆原面) 남구(南龜)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조사결과와 일치하는 사람이 거의 분명하다. 그 사건이 발생한 때는 1909년(명치 42) 8월이다.

隆熙 三年(一九○九·明治 四二) 八月, 慶尙道
 
제목 暴徒來襲의 件
발송자 馬山警察署長 警視 道禮能邇
수신자 內部警務局長 松井茂 
발송일 隆熙 三年(明治 四二) 八月
 
馬山警察署長
警視 道禮能邇 內部警務局長 松井茂 앞

暴徒來襲의 件 本月 五日 午後五時頃 部內 漆原駐在所에 暴徒 約二十名이 各自 銃 及 韓刀를 携帶 來襲 重輕傷을 입히고 日人 七名에게 創傷시키고 韓人으로부터 金品을 强奪 逃走한 旨 急報에 接하고 警察官이 急行하였다.

一. 四貫文 以上 二名 金圓 强奪 負傷 없다.
一. 被害日時 八月 五日 午後九時頃 以上과 如히 巡査 延松寅之照 外 三名. 來襲한 暴徒는 約二十名으로 모두 銃 刀를 携帶하고 七名은 屋內에 侵入 十三名이 周圍를 察戒하고 있어 最初 延松巡査의 寢處에 侵入 四時 發砲하여 應戰하였으나 드디어 前記의 創傷을 負하기에 至하여 重症으로 認定 其後 內田方에 來襲 前記 創傷을 負한 後 器物 及 家屋을 破毁 同部 漆原面 南龜 周時成 外 一名方에 來襲 韓錢 八十四貫文을 强奪한 外 他에 何等 危害를 加치 안하고 逃走하였다.
따라서 巡査 永田飛三郎 外 四名을 急行派遣하여 搜査中에 있다. 同二十日 于先 報告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그렇다면 당시 의병(또는 독립운동가)들이 왜 하필 주시성의 집에서 돈을 강탈해갔을까?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아니면 친일파를 응징하기 위해서?

아니면 주시성이 미리 의병들과 짜고 독립운동 군자금을 주기 위해 빼앗기는 척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의병들이 돈을 빼앗아 가면서 주시성의 몸에는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지금으로서 그것까진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사 결과는 여기까지다. 앞으로 좀 더 주시성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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