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선암사는 매화가 피지 않아도 예쁘다

김훤주 2010. 3. 18.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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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매화가 피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안고 순천 선암사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보람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12일 새벽에 일찍 나섰습니다. 물론,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첫 걸음이기는 하지만 선암사와 송광사 두 군데 절을 한 날에 모두 눈에 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가는 길에 이번에 세상을 버리신 법정 스님이 송광사로 나들이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송광사가 미어터질 예상이 돼서, 송광사는 다음에 들르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선암사는 매화가 전혀 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꽃이 몸부림치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꽃몽오리 안에서, 꽃들이, 꽃잎들이 세상으로 스며 나오려고 있는 힘껏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꽃봉오리마다 붉은 기운이 여린 핏빛으로 감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매나' 몸부림을 세게 쳐야지, 저렇게 살갗이 쓰리도록 되겠느냐 싶었던 겁니다. 하하.

(제가 사진을 잘 찍지 못해서, 나무들 그런 정황을 제대로 사진에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간 절간이라 여러 군데 눈길을 주다 보니 꽃과 나무에 집중을 못한 탓도 있습니다.)

눈여겨보면 가지 끝이 이미 붉어져 있습니다.


절간은 온통 이런저런 꽃나무들이 곳곳에 빽빽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길 따라 매화들이 큰 키로 줄줄이 심겨 있었는데, 나중에 제대로 꽃이 피면 절간이 통째로 꽃 배를 타고 둥둥 떠다니지 않을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12일 선암사에는 이 산수유만 꽃을 피워 놓고 있었습니다.

선암사에는 이밖에 또다른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절간 대부분은, 들머리와 둘러싼 곳곳이 소나무나 전나무나 잣나무 같은 늘푸른나무들이 주를 이루는데 선암사는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이 이파리를 떨어뜨리는 나무였습니다. 그윽히 바라보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저기서 뿜어나오는 이파리랑 푸르고 누런 기운이 떠올라졌습니다.

이날 제게 가장 멋지게 여겨진 풍경입니다.

씩씩합니다.


처연합니다.



사람들이 나무에 해코지를 해 놓았습니다.


단정합니다. 멀리 산이 푸근합니다. 왼쪽 은행나무가 빛납니다.


조화롭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가난합니다.


겨울에는 이처럼 시리면서 시원한 기운을 머금을 테고요, 또 줄기는 자기 몸통을 전혀 가리지 않은 채로 가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요. 봄에는 무슨 기름칠한 것보다 더하도록 밝게 빛이 날 것 같았습니다.

여름에는 어떨까요. 여리고 밝은 신록을 떨치면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어쩌면 서늘할 정도로 짙은 그늘을 만들어 무더위 한가운데로 밀어넣어 주지 싶었습니다.

가을은 따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고창 선운사에 가 본 적이 한 번 있는데, 하늘하늘 단풍이 얇고 가벼워 마치 투명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선운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다음에 다시 오면 이렇게 철 이르게 오기보다는 때맞춰 와야지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리저리 거닐면서 두 시간은 좋이 보냈습니다. 머리로 마음으로 그려보는 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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