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여름철 생삼 먹고 힘내라던 그 형님

기록하는 사람 2009. 7. 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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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원은 도심 한가운데 5일장이 섭니다. 창원 상남동은 2000년대 개발이 끝나면서 전국에서도 물 좋다고 알아주는 유흥가가 돼 버렸습니다. 상남 5일장은 80~90년대가 훨씬 크고 대단했습니다.

지금은 한 바퀴 둘러보는 데 30분이면 충분하지만 그 때는 한 시간은 잡아야 제대로 '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저녁나절 한창 복작거릴 때도 겨우 어깨만 마주칠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 때는 밀려드는 사람 때문에 떠밀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며칠 전 상남장에 갔다가 생삼 파는 난전을 만났습니다. 제 눈에 띄기 전부터 거기 그렇게 있었을 테지만, 저는 새삼스러운 마음에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있었는데요, 멈추는 걸음이 거의 없었습니다. 옛날보다 졸아져 포장도 별나지 않고 구색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눈길이 가는 까닭은, 1987년 여름에 만난 '형님' 때문입니다. 저는 스물다섯 팔팔한 나이에 노동운동을 하겠다며 마산 봉암공단 '우성공업'에서 용접공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용접공이지, 들어간지 반 년도 안 된 처지여서 일당도 가장 적은 4100원을 받으며 가까스로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2. 제게 일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형님'입니다. 이름도 기억이 납니다.(그러나 여기 적지는 않겠습니다.) 제게 잘해 주셨습니다. 문자 쓰지는 않았지만 살아갈 이런저런 말씀도 일러주셨습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였습니다. "몸이 제일이니라. 기름밥은 먹을수록 몸이 상한다. 한 끼라도 안 먹을라고 애를 써야 하거든."

용접 솜씨는 당연히 보통 이상이었습니다. 조금 비스듬하게 놓고 '지직' 긁어 붙이는 용접은 식은 죽 먹기였고요, 직각으로 세워놓고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릴 때는, 녹은 쇳물이 주루룩 흘러버리지 않도록 신경도 써야 하는데, 이 또한 손쉽게 해치웠습니다.

눈여겨 봐 놓았다가 쉬는 시간에 틈을 내어 연습을 했는데, 인기척이 느껴져 용접마스크를 떼고 돌아보면 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형님이 있었습니다. "재미 있냐?" "예." "어데 쓸라고?" "그냥요." "아이구, 나는 용접이 꼴도 보기 싫다. 니도 빨리 때려치울 요량이나 해라."

저는 용접을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철판에 알맞은 용접봉이 굵거나 전압을 못 맞춰 대자마자 바로 녹아내려 구멍이 뻥 뚫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형님이 다른 철판을 덧대어 메워 줬습니다. 형님 가르침대로 쇳물이 고운 물결 무늬를 내며 마무리되면 아주 기뻤습니다.

3. 형님은 조금 친해지자 '어디서 굴러온 놈'인지 물었습니다. 태생이 궁금했던 모양이지요. 노동운동을 위해 들어왔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대구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어려워져 군대 갔다 와서 먹고 살려는데 기술이 없어서 여기 취직했노라' 했습니다.

나쁜 뜻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인지라 마음에는 늘 께름칙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님한테 더 공손하게 굴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열심히 했습니다. (잘 하지는 못했지만) 형님은 제가 일러드린 거짓 태생을 믿고 당신 개인사까지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이렇습니다. 이력서 학력은 중졸이지만 실제로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고 어린 나이에 공장 들어와 '노기스'(버니어캘리퍼스를 이르는 일본말 잔재)랑 볼트 따위로 머리통 맞아가면서 배운 일을 여기저기 공장 옮겨다니면서 30년 가까이 하고 있노라. 제 거짓말을 믿고 연민을 느껴 당신 개인의 내밀한 삶의 속내를 일러주신 형님께 더욱 미안해졌습니다.

4. 그러다가 형님을 마음으로 꺼리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실은 아무 일도 아니었지만, 철없는 제가 마음으로 그리 여기는 바람에 그리 됐습니다. 형님은 좋은 뜻으로 제게 일러줬건만 제가 그리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성욱아(당시 제 가명). 몸이 많이 처지거든 생삼을 좀 사서 갈아먹어라. 효과가 좋다."

속으로 뜨악했습니다. '뭐야! 인삼이라고? 노동자가 무슨 인삼이야.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저는 그 때 그것이 가난한 노동자의 발악에 가까운 자구책임을 몰랐습니다.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인삼이면 다 같은 줄 알았습니다. 때깔 좋은 상자에 담긴 홍삼이나 건삼처럼 죄다 값비싼 줄 잘못 알았습니다.

자본가나 국회의원들이 꿀에 절인 홍삼을 틈 나는대로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값비싼 인삼을 먹는다니 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속좁게 생각했습니다. 시장에 나오는 생삼이, 말리거나 쪄서 건삼이나 홍삼으로 만들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좀 있다 저는 그 공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선배들 작업 거부에 동참했다가 괘씸죄에 걸렸습니다. 공장에 남은 그 형님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마음이 멀어진 채로 몸까지 멀어졌습니다. 5년 남짓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 착각도 계속됐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제가 서른 살이 되면서 알게 됐습니다.

건삼이나 홍삼은 4년근 5년근 6년근 이런 식으로 나오고 이런 4년근 5년근 6년근을 만들 때 잔뿌리 따위는 떼어내 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보통 채소나 야채랑 마찬가지로, 처음 싹이 나 자랄 때는 촘촘하게 마련이니까 조금 자란 다음에 솎아낸 것들이 이렇게 시장에 나온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말리거나 쪄서 파는 건삼이나 홍삼은 오동통한데 반해, 생삼은 물기를 꽤 머금는데도 그토록 가늘고 앙상한 까닭을, 옛날 상남시장 그 난전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쥐꼬리만하지만 월급을 받고 또 개꼬리 같기는 하지만 인생을 살게 해 주니까, 비루먹은 인삼 꼬랑지라도 갈아먹고 힘을 내어 보는 그런 정경이었습니다. 그 형님 5년 전 얼굴이 떠올랐고, 참 죄스럽고 민망하고 미안했습니다.

오늘도 옛날 그 형님이 새삼 생각납니다. 올해 여름이 유난히 길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윤달이 끼어 여름이 늘어났는데다, 보통 열흘이던 중복에서 말복까지 기간이 이번에 곱절로 늘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싸구려 생삼으로나마 한 몸 잘 건사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 줄 사람이, 이제는 피붙이 말고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김훤주
※ 월간 <전라도닷컴> 8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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