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각기 다른 두 시인에게서 느낀 따뜻함

김훤주 2009. 7. 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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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에 터전을 두고 활동하는 두 시인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시집을 냈다. 2001년 제10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은 배재운(51)이 첫 시집 <맨 얼굴>을,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성선경(49)이 시선집 <돌아갈 수 없는 숲>을 펴냈다.

공인되는 시력(詩歷)은 성선경이 많이 앞선다. 성선경은 이미 시집 다섯 권 <널뛰는 직녀에게> <옛 사랑을 읽다> <서른 살의 박봉씨> <몽유도원을 사다> <모란으로 사는 길>을 펴냈다.

두 시인이 눈여겨 보고 나타내는 바는 사뭇 다르다. 성선경은 작품 제목을 보면 주로 자연이라 이르는 대상이 많고, 배재운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가 많다.

두 시집의 표제작 '맨얼굴'과 '돌아갈 수 없는 숲' 전문을 견줘보면 이런 차이는 뚜렷해진다.

면도를 하고 거울 앞에 서면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작은 흉터나
잔주름은 더 또렷해지지만
그래도 말끔한 얼굴이 좋다

젊은 날의 탱탱한
활기찬 모습은 아니라도
조금은 그늘진
살아온 이력이 그대로 붙어 있는
얼굴

맨얼굴이 나는 좋다 ('맨얼굴' 전문)

이제 돌아갈 수 없네 울울창창
물기에 젖은 이끼들도 햇살을 받으면
지지배배 하늘 높이 종달새가 되던 곳
떡갈나무 잎사귀들도 이슬을 걷으며
삼베적삼 스치는 소리를 낼 수 있던 곳
이제 돌아갈 수 없네 그 그루터기
그늘이 너무 짙어 싫었던 뻐 뻐꾹새 울음소리와
상념의 개미 떼들이 좁쌀로 기어다니던 곳
매미가 울고, 노을이 들고, 연기가 오르면
서너 살 아이들도 할아버지가 되던 곳
철쭉, 송화가루, 서늘한 안개가 합죽선을 펴던 곳
靑靑靑 이슬방울에도 전설이 자라고
발길에 채이는 돌멩이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던 곳
이제 돌아갈 수 없네 그 숲

꽝꽝꽝
이제
숲은 없네. ('돌아갈 수 없는 숲' 전문)

하나씩만 더 읽어보자. 짧게 쓰는 배재운에게서는 '걱정 한 그릇'을, 때로는 길게도 쓰는 성선경에게서는 '우린 가포 간다'를 가져왔다.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인다

조금만 더 기다릴까
한 번 해볼까

한참을 망설이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인다
처음 하는 두려움

가슴은 콩당콩당
냄비는 달그락 달그락

보글보글 라면 한 그릇
잔업하며 가슴 졸이는
엄마 걱정도 한 그릇 ('걱정 한 그릇' 전문)

(배재운은 20년 넘게 공장 노동자로 지내다가 2000년대 들어 그만두고 나와 마산 자산동에서 '남해 해물탕' 음식점을 하고 있다. 아내가 지금 공장 다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혹 애인이 없거나 어쩌다 애인이 생겨도 우린 가포 간다. 내 친구와 의기투합하여 그 기분을 어쩔 수 없을 때 또는 그런 친구와 싸우거나 싸우러 우린 가포 간다. 명태전 동래파전 막걸리 꼼장어 구이 소주 한 잔 우울한 봄날 마땅히 할 일이 없는 토요일 우린 가포 간다.

바다는 한 접시에 다 담길 듯 작아도 이제 여대생이 되었다고 머릴 볶은 스무 살도 군대에 간다고 쌍고래를 떠는 머슴애의 울음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뻥튀기 같은 얇은 의리도 담배꽁초 같이 나누던 우정도 금세 지워질 낙서 같은 맹세도 다 받아주던 바다

그곳으로부터 봄은 온다고
우린 지금도 가포 간다. ('우린 가포 간다' 전문)

(가포는, 지금은 거의 매립이 다 됐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해수욕장이 있었고 그 뒤로도 유원지로 구실을 했던 마산 앞바다 일부다. 성선경이 졸업한 경남대학교와 가깝다.)

배재운의 맨얼굴

성선경의 돌아갈 수 없는 숲

문학평론가 김문주는 <돌아갈 수 없는 숲> 말미 '해설'에서 "성선경은 생의 비애 아래 있는 자이되, 이 비극성을 다른 존재를 향한 관심과 연민으로 전환하는 '따뜻한 비관주의자'이다" 했다. "그에게 슬픔은 삶을 애틋하게, 사람들을 더 그립게 만드는 힘이 된다. 성선경의 비관주의는, 그래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덧붙였다.

배재운에 대해서는 이응인 시인이 <맨얼굴> '발문'에서 "멋들어진 장식도 그럴 듯한 포장도 없는, 노동자의 일상을 수수하고 담담하게 풀어낸 형의 시가 주는 잔잔한 울림"을 자랑했다. 또 성기각 시인은 "노동이 지닌 소중함이랄까, 생명에 관한 집착이랄까, 그것들을 이만한 서정으로 잡아채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면서 '서정성'에 주목을 했다.

두 시인이 머물고 있는 자리와 눈길을 두는 자리는 이처럼 다르다. 하지만 두 시집을 읽다 보면 공통점 하나가 두드러진다. 그이들 시를 읽으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지고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아주 수월하게. 이리 공감이 돼서인지 나는 두 시집에서 똑같이 따뜻함을 느꼈다.

이밖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더 있는지 알고 싶거든 시집들을 손수 읽어보면 된다. 이런 데 신경쓰지 않고 그냥 시(詩) 읽는 즐거움을 누려도 물론 좋다. <돌아갈 수 없는 숲>은 문학의 전당에서 나왔다. 198쪽, 7000원. <맨얼굴>은 갈무리에서 냈다. 120쪽, 7000원.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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