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곽재우 22

17. 창녕 화왕산 정상의 습지 용지

수많은 애환 말없이 보듬은 산정 억새평원 의병장 곽재우와 창녕 화왕산 창녕에 가면 화왕산(火旺山·756m)이 있다. 남쪽과 서쪽·북쪽이 모두 가파르고 동쪽은 다른 높은 산들과 이어져 있다. 산성이 사방을 대부분 두르고 있는 화왕산 정상부에 이르면 북쪽에 꼭대기가 남쪽에 배바우가 솟아 있다. 홍수로 천지개벽이 되었을 때 배(船)를 묶어두었다는 배바우에는 사람 하나 들어갈 만큼 갈라진 틈이 있다. 의병장 곽재우의 전설이 서려 있는 장소다. 곽재우는 1592년 4월 14일(음력) 임진왜란이 터지자 같은 달 22일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거름강(기강)나루와 솥바위(정암)나루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낙동강 기강나루는 의령과 창녕을 이어주고 남강 솥바위나루는 의령과 함안을 이어준다. 곽재우는 당시 물길을 타고 의령..

가본 곳 2021.09.21

임진왜란 영웅들의 유쾌한 뱃놀이

[하천과 문화] (5) 간결한 술상에 상하 구분 없어 400년 전 선비들 용화산 아래 뱃놀이 청년 조임도 글로 남겨, 숙연 화목했다 낙동강은 모래로 유명하다. 경남에서는 지류인 황강이나 남강 유역에 모래톱이 여기저기 누워 있다. 다만 본류는 창녕 남지와 창원 동읍 본포 일대가 예전에 그랬다. 4대 강 사업으로 바닥이 6m 파이고 보에 흐름을 막히기 전에는. 400년 전에 일대 선비들이 낙동강에 크게 모여 뱃놀이를 벌였다. 1607년 음력 1월 27~29일이니 임진왜란 끝나고 8년 2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좌장을 맡고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함안군수 박충후(朴忠後·1552~1611)·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

가본 곳 2020.04.13

사후 백 년 지나서야 공신 대접 받은 곽재우

망우당 곽재우는 임진왜랑 당시 가장 먼저 떨쳐 일어난 의병장이다. 여러 전투에서도 백전불패를 기록한 대단한 인물이다. 애초 질 만한 싸움이라면 하지 않았고 이길 만하다 싶은 전투만 나섰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길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다음에 싸웠지 무모하게 나서지 않았다는 얘기다. 인품도 대단했다. 임진왜란 이전에 일찌감치 벼슬로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의령 초야에 묻혀 살다가도 왜적 침략으로 백성들이 고단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친가·처가·외가 모두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뒤집어 말하면 친가·처가·외가 모두 쫄딱 망했다.) 전란이 끝난 다음에는 언제 나섰느냐는 듯이 다시 원래대로 숨어들었다. 심지어 임금이 벼슬에 불러내었는데도 그것을 거절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귀양살이를 가기도 하였..

설립년도는 잘못, 문화재 지정은 껍데기만

나는 2016년 5월 이라는 책을 내면서 의령군 지정면 성산마을 들머리에 있는 보덕각에 대하여 적은 적이 있다. 160쪽에 나온다. “안에는 ‘유명조선국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보덕불망비(有明朝鮮國紅衣將軍郭先生報德不忘碑)’라고 적힌 빗돌이 있습니다. 영조 15년(1739) 왕명으로 세웠으며 비문은 당시 영의정 채재공이 손수 썼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곧바로 짚어주었다. “당시 채제공(1720~99년)은 10대 소년이었고 영의정이 된 것은 1793년”이니까 틀린 얘기라는 것이다.(나는 이름조차 채재공으로 잘못 적었다.) 그래서 나는 2017년 1월 블로그를 통해 해당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알리고 독자 분들께 사과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이은상의 곽재우유적정화기념비문

이은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으뜸가는 기회주의자라 하면 딱 맞다. 다른 기회주의자 100만 명을 갖다 놔도 이은상 하나를 당할 수 없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모두 하고 적극적·능동적으로 붙어먹었다. 이승만 시절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당선을 돕는 문인 유세단 활동.지원 유세에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의거를 두고는'무모한 흥분'.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 '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 박정희 시절1963년 박정희 집권을 위한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작성1972년 박정희 영구집권을 위한 10월유신에 청년우인회 중앙본부(=극우단체. 서북청년단 등 8개 단체의 총연합으로 출범. 대한민국통일건국회의 전..

교과서에서 보던 가야 유적 창녕에 다 있네

[우리고장역사문화탐방] (1) 창녕 양덕중, 지석묘·석빙고 등 보며 선조 삶 엿봐해설·미션 수행 통해 고장 사랑하는 맘 생겨 경남도민일보가 청소년 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에 나섰다. 경상남도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2013년부터 해마다 하고 있다. 중·고교에서 신청을 받아 선착순으로 스물여덟 학교를 선정했다. 탐방 지역을 선택하게 했더니 창녕·거창·합천·통영·김해·거제·밀양·고성·함양·진주·창원 11곳이 나왔다. 지역별로 열한 차례 탐방을 소개한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동네와 지역의 역사·문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국가와 세계의 역사·문화는 가르친다. 동네와 지역의 개별성·구체성은 알 길 없고 동네-지역-국가-세계 사이의 복잡다양한 연관성은 숨겨진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역사·문화 교육을 동네에서 시작하여 세계로..

2017년 첫 작업-잘못쓴 부분 바로잡기

2016년 5월 책 을 내었습니다. 지역 역사문화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천편일률로 써내려가는 대신 지역의 독특한 측면과 두드러지는 장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나름 애썼습니다. 경남 열여덟 시·군 스무 개 지역을 돌아보면서 느끼고 취재·정리한 내용을 2014년 한 해 동안 에 연재했고 그것을 다시 1년 동안 가다듬고 더하고 고친 결과였습니다. 책을 내고 얼마 안되어 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께서 보내준 편지였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 사실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할 점이 있어서 보이는대로 정리해서 보내 드리니, 언짢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 원장은 우리 경남의 보물 같은 고고학자입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날카롭게 갈라보는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입니다. 그이가 제 책에 있..

의령 충익사에 노거수가 즐비한 까닭

곽재우 최초 승전지 기강나루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마을에는 기강(岐江)나루가 있다. 의령과 함안을 북과 남으로 가르며 서쪽에서 흘러온 남강 강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여기에 박정희 시절 그 주구 노릇을 한 당시 의령군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전말은 이렇다. 기강나루는 임진왜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의 첫 승전지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4일과 6일 여기 강물 아래에 나무말뚝을 박아둔 다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군의 배가 걸리자 습지 풀밭에 숨어 있던 의병들이 화살을 쏘아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조선이 이룬 최초 승전이다.(이순신 장군의 최초 승전은 5월 7일 옥포해전)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는 곽재우의 기강나루전투 승리는 왜군이 호남으로..

우포늪과 함께 둘러볼 창녕 명소(3)

하루 일정으로 경남 창녕을 찾아간다면 한 나절은 우포늪 또는 우포늪생태체험장에서 보내고 다른 한 나절은 창녕지석묘와 망우정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창녕지석묘장마면 유리에 있는 창녕지석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놓인 자리가 산마루라는 점이고 둘째는 일대에서는 구할 수 없는 화강암 재질이라는 점이며 셋째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잘생겼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고인돌은 산기슭에 있거나 개울 가장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주로 썼습니다. 그런데 창녕지석묘는 야트막하기는 하지만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날 고인돌을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이 공동 노동을 통해 덮개로 쓰일 큰 돌을 옮겨와야 했습니다. 산기슭까지만 옮기면 그나마 품이 덜 들 텐데, 창녕지석묘는 ..

임진왜란 의병들께 큰절하던 베트남 사람

2015년 활동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경남도민일보와 해딴에(문화사업을 전담하는 경남도민일보 자회사)는 올해도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습니다. 고등학생들과 함께 ‘고장 사랑 지역 역사 탐방’과 ‘우리강지킴이 청소년 기자단’도 하고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더불어 ‘토요 동구밖 교실-역사탐방/생태체험’도 했습니다. 어른들을 상대로 전국 명소를 찾아다니는 생태·역사기행도 진행을 했고, 경남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경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해서 ‘경남 체류 외국인 지역 풍물기행’도 맡아 했습니다. 올 한 해 벌인 이런 활동이 모두 저마다 나름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인상 깊었던 장면은 베트남 사람들과 의령으로 탐방 나갔을 때였습니다. 의령..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