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최초 승전지 기강나루
경남 의령군 지정면 성산마을에는 기강(岐江)나루가 있다. 의령과 함안을 북과 남으로 가르며 서쪽에서 흘러온 남강 강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여기에 박정희 시절 그 주구 노릇을 한 당시 의령군수 이름이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전말은 이렇다.
기강나루는 임진왜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의 첫 승전지다. 곽재우는 1592년 5월 4일과 6일 여기 강물 아래에 나무말뚝을 박아둔 다음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왜군의 배가 걸리자 습지 풀밭에 숨어 있던 의병들이 화살을 쏘아 왜적을 무찔렀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와 육지를 통틀어 조선이 이룬 최초 승전이다.(이순신 장군의 최초 승전은 5월 7일 옥포해전)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는 곽재우의 기강나루전투 승리는 왜군이 호남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남강 물길을 가로막아 전쟁 초기 최대 곡창인 호남을 지킬 수 있었다.
심리적 효과도 컸다고 한다. 왜군은 4월 13일 부산에 들어왔고 뒤이어 서울은 5월 2일 20일만에 함락시켰다. 관군이 판판이 깨지는 상황에서 100명도 안 되는 의병이 승리했다. 조선 백성들은 이 승리에서 우리도 힘을 모아 싸우면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보덕불망비.
보덕각.
박정희가 곽재우 장군 유적 정화에 나선 까닭
1517년 죽은 곽재우는 충익공 시호를 사후 92년째인 1709년에 받았다. 그로부터 20년 지난 1739년(영조 시절)에는 기강나루 언덕배기에 보덕불망비(報德不忘碑:공덕에 보답하고 잊지 않겠다는 빗돌)가 세워졌다. 1773년에는 이 빗돌을 보호하는 건물인 보덕각이 처음 지어졌다.
보덕각 바로 옆에는 쌍절각(雙節閣)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남 합천군 초계면 마진 전투에서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손인갑 장군과 아들 손약해를 기리는 것이다. 1609년 의령군 봉수면 신현리에 세웠었는데 여기로 옮긴 때는 1943년이다.
충익사 준공식을 하면서 정화 기념비 제막식도 함께했다.
앞에는 보덕각 쌍절각 표지석이 있다. 옆면에는 한자로 이렇게 적혀 있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 분부/ 1978년 12월 22일 중수/ 1979년 12월 30일/ 의령군수 정계수". 보덕각과 쌍절각을 박정희 분부로 새로 지었고 표지석은 정계수 의령군수가 세웠다는 얘기다.
박정희는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1979년 10월 26일 부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18년 5개월 동안 이 나라를 무단 통치했다. 박정희는 군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나라를 지키는 대신 정권을 말아먹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러다 보니 그 부당함을 가리기 위해 백성들 신망이 높은 옛적 장군들을 적극 활용했다. 먼저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떠받들고 충남 아산 이순신 사당 현충사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했다. 집권 초기인 1963~67년의 일이다.
의령 곳곳에 있는 곽재우 장군 유적을 정화하면서 아울러 곽재우와 휘하 열일곱 장령을 기리는 사당인 충익사를 짓는 사업도 펼쳐졌다. 영구 집권을 꿈꾸던 정권 말기인 1976~78년에 벌어진 일이다. 보덕각 중수 사업도 이 때 진행되었다.
권력의 주구는 왜 이렇게 '오버'했을까?
'각하'는 그렇다 쳐도 '분부'는 또 무엇인가? '지시'도 '훈시'도 아니고 말이다. 봉건제 아래서 종들이 주인 양반을 떠받들던 말이다. 권위주의·전체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어휘 선택이다. 하기야 당시 박정희 독재가 보통은 아니기는 했다.
빗돌에 있는 중수 날짜인 1978년 12월 22일은 충익사 준공식이 열린 날이다. 준공식에는 박정희가 참석했다.(충익사 마당에는 지금도 그가 기념식수한 주목(朱木)이 있다.) 보덕각과 쌍절각 중수도 여기에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기념식수한 주목. 경남도민일보 사진.
보덕각·쌍절각 표지석에는 정계수라는 당시 군수 이름이 적혀 있다. 보통은 '분부'를 내린 사람만 새기고 '분부'를 받든 사람은 새기지 않는다. 게다가 분부를 내린 박정희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다들 아시는대로 두 달 전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최후를 맞았다.
내용으로 보나 시점으로 보나 충분히 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오버'다. 왜 그랬을까? 정계수는 아마도 골수까지 사무친 박정희 추종자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미 죽었지만 충성을 다하겠다는 뜻으로 자기 이름을 새겼을 수도 있다.
만약 충성을 했다면 그 대상이 잘못되었다. 왕조가 아닌 민주공화국에서는 국민을 섬겨야 진짜 충성이다. 만약 박정희 추종자라면 국민에 대해 권리는 짓밟고 생활도 돌보지 않았을 것이다. 표지석은 자기가 권력의 주구(走狗)이고 독재자의 하수인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 아닐까.
권력의 주구라는 방증은 또 있다. 충익사에는 감나무 모과나무 배나무 배롱나무 등 노거수가 많다. 원래 여러 마을에 자연스레 자라던 것들을 옮겨 심었다. 이런 나무 공출을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다.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한테 잘 보이려는 목적 아니었겠는가?
충익사 마당 모과나무.
하지만 당시 의령군수가 그렇게 잘 보이려고 했던 박정희는 그로부터 1년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독재자를 위해 옮겨심어진 노거수들은 지금 이렇게 남아 곽재우를 기리려고 찾아오는 많은 이들에게 볼거리 즐길거리가 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독재 권력은 그 주구들의 부역질로 완성된다
이처럼 독재자는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원래 독재는 권력의 주구(=하수인)을 통해 온전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독재 권력은 그 주구들의 부역질로 완성되는 것이다. 주구들은 위로는 분부를 받잡고 아래로는 백성들 피땀을 쥐어짠다.
지금 펼쳐지는 박근혜-최순실게이트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무엇을 상상하든 언제나 그 이상을 보여주는' 국정농단이다. 이런 엄청난 국정농단도 박근혜-최순실의 분부를 영혼없이 그대로 받잡고 수행한 주구와 하수인들의 부역질을 통해 완성되었다.
이렇게 부역질을 하는 권력의 주구가 우리 옆에도 있었던 것이다. 의령군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역대 군수 코너를 찾아보았다. 정계수는 제25대 의령군수로 1978년 5월 4일부터 1980년 3월 17일까지 재직했다고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조그맣고 흐릿하지만 증명사진도 하나 붙어 있었다.
김훤주
'지역에서 본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업체험도 좋았고 진로 설계도 좋았다 (0) | 2016.12.31 |
---|---|
직업인 만나 진솔 대화에 생생 체험까지 (0) | 2016.12.30 |
촛불집회에서 환영받는 자유발언 특징 분석해보니 (3) | 2016.12.28 |
지역 아이들에게 지역 역사를 돌려주었더니 (0) | 2016.12.28 |
호령하던 장군보다 직접 싸운 백성 기억해요 (0) | 2016.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