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책 <경남의 숨은 매력-역사문화 스토리텔링>을 내었습니다. 지역 역사문화를 보편적인 관점에서 천편일률로 써내려가는 대신 지역의 독특한 측면과 두드러지는 장점에 초점을 맞추려고 나름 애썼습니다. 

경남 열여덟 시·군 스무 개 지역을 돌아보면서 느끼고 취재·정리한 내용을 2014년 한 해 동안 <경남도민일보>에 연재했고 그것을 다시 1년 동안 가다듬고 더하고 고친 결과였습니다. 

책을 내고 얼마 안되어 메일이 하나 왔습니다.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께서 보내준 편지였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몇 가지 사실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할 점이 있어서 보이는대로 정리해서 보내 드리니, 언짢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최 원장은 우리 경남의 보물 같은 고고학자입니다.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날카롭게 갈라보는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입니다. 그이가 제 책에 있는 잘못을 하나하나 짚어내어 보내준 것입니다. 

틀린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2만원 거금 들여 책을 사신 분들께는 더더욱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어떻게든 고치고 알려야겠다 생각했습니다. 

2016년 6월부터 12월 중순까지 무척 바쁘기는 했습니다만 그게 마땅한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2016년은 꼬박 넘겨버리고 2017년 첫 날 아침 이제야 바로잡습니다. 저의 게으름까지 함께 꾸짖어 주십시오. 

어처구니 없는 착각과 실수 

최 원장이 짚어준 잘못은 모두 열아홉 개였습니다. 이 가운데 3분의1을 넘는 부분이 저의 어이없는 착각이 원인이었습니다. 차례대로 보면 먼저 책 15쪽 밑에서 여덟 번째 줄 “진주목 영신현”입니다. 거제 사람들이 왜구 노략질을 견디지 못해서 옮겨간 데는 “진주목 영선현”이 맞습니다. 

책에서 영선현이 지금 어디인지를 두고 “고성군 영오면”이라 했는데 이 또한 정확하게 하자면 “고성군 영현·영오면”이 맞습니다. 이런 잘못은 30쪽 위에서 열째 줄에서 “거창군의 가조나 고성군의 영신까지 옮겨야 했을 뿐 아니라”라고 반복되기도 하였습니다. 

146쪽 여덟째 줄 통도사 금강계단에 관련한 부분 “석가모니 정수리 뼈와 몸소 걸쳤던 사리”에서 ‘사리’는 ‘가사’의 착각입니다. 사리는 석가의 유골이고 몸에 걸치는 옷은 분명 가사가 맞는데 왜 이런 착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왼쪽 바위에 쌍계, 오른쪽 바위에 석문.

이밖에 258쪽 일곱째 줄에서 최치원 관련 유적에서 “양산 명경대”는 “양산 임경대”의 잘못이고 259쪽 밑에서 열두 번째 “쌍계 석문雙溪 石文”은 “쌍계 석문雙溪 石門”의 잘못입니다. 

또 260쪽 밑에서 아홉째 줄 하동 쌍계사 팔영루를 얘기하는 대목에서 “八泳樓”는 “八詠樓”의 잘못입니다. 바로 아래 여덟째 줄에 나오는 “헤엄치는泳 물고기를 보고 불교음악 어산魚山을 지었다는 얘기”도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고 불교음악 어산을 지었다詠는 얘기”로 바꾸는 게 맞겠습니다. 

제대로 몰라서 저지른 잘못 

다음으로는 앎이 모자라 저지른 잘못입니다. 70쪽 열두째와 열셋째 줄에서 김해 봉황동 유적을 설명하면서 ‘접안시설’=‘항만시설’이 주거시설과 함께 확인되었다고 했으나 ‘접안시설’=‘항만시설’은 발굴된 적이 없습니다. 

김해 봉황동 유적의 고상 가옥.

122쪽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사천 늑도유적 관련입니다. 열두째와 열셋째 줄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지 가운데서는 최대 규모라 합니다.”라고 했는데 최 원장은 “철기시대” 유적이며 “최대”도 아니라고 짚어주었습니다.(그래도 유물의 집적 정도는 상당히 높은 줄로 압니다만^^) 

160쪽 아홉째 줄에서 의령 기강나루에 있는 곽재우 장군 관련 유적으로 1739년 세워진 보덕불망비를 얘기하면서는 “비문은 당시 영의정 채재공이 썼다고 합니다.”라고 적었는데 이 또한 최 원장이 그렇지 않다고 지적해 주었습니다. 

“당시 채제공(그러니까 저는 사람 이름조차 ‘채재공’으로 엉터리로 적은 셈입니다.)은 10대 소년이었고 영의정이 된 때는 1793년”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을 확인도 없이 그대로 옮긴 잘못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진주 문산성당 한식 건물과 양식 건물.

185쪽에도 잘못이 있습니다. 진주 문산성당과 소촌역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밑에서 다섯째 줄에서 “찰방은 당시 이동수단이던 말을 관리하는 관아”라고 했는데 ‘관아’가 아닌 ‘관리’=벼슬아치라는 것입니다. 전통시대 역참제도에서 특정 시설과 그 시설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를 혼용하는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 큽니다. 

최 원장 지적을 따르면 몇몇 군데를 더 고쳐야 맞습니다. 같은 줄에 뒤이어 나오는 “찰방 같은 관아가 있던 각지 역참 자리”는 “찰방 같은 벼슬아치가 머물던 각지 역참 자리”로, 같은 쪽 여섯째 줄 “문산성당은 소촌역이 있던 문산찰방 자리에 있는데요”는 “문산성당은 옛날 소촌역 자리에 있는데요”가 합당하지 싶습니다. 

207쪽 열한 번째~열네 번째 줄은 “병영(경상우도병사절도사영)이 일찍부터 설치되어 있었고 대마도에 이르는 직선거리가 짧을 뿐만 아니라 여기를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 또한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까지 곧바로 이어집니다.”라 했습니다. 

쥐꼬리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합포성.

마산에 원·고려연합군의 일본정벌기지가 들어선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인데요, 여기서 ‘병영’ 부분은 ‘합포현성’으로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합포현성의) 절도사영으로의 기능 전환은 (그보다 뒤인 조선 시대의) 일본 정벌 이후’라는 것입니다. 

이밖에 다른 대목을 두고도 최 원장은 세심하게 짚어주었습니다. 학술적으로 볼 때는 틀림없이 잘못되었거나 충분하지 못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수준에서 대중적으로 볼 때 그대로 두어도 무방하겠다 싶은 대목은 그대로 두었습니다.(236쪽 창원 덕천리 고분군 설명 부분, 273~274쪽 함안 명덕고 논·봉도랑 유적 관련 부분 등) 

최 원장 지적과 상관없이 잘못된 부분 

이밖에도 바로 잡아야 할 대목이 더 있습니다. 책을 내고 나서 다시 살펴봤더니 무심결에 넘기고 엄밀하게 따지지 못한 대목이 띄었습니다. 책을 내기 전에 감수를 받든지 해서 걸러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거듭 미안합니다.

첫째는 거제를 다루면서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 승리가 한편으로는 고현읍성의 함락과 관련이 있음을 밝히는 부분입니다. 

19쪽 셋째~여섯째 줄에서 “왜군들이 옥포해전 닷새 뒤인 5월 12일 고현성을 함락시키고 불에 태웠습니다.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올라 노략질을 하다가 조선 수군에게 퇴로가 막히는 바람에 북상하면서 저지른 일인데요, 승전과 패전이 이런 식으로도 맞물리는 모양입니다.”라 적었습니다. 

그런데 옥포에서 고현읍성은 북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북상’이 아니라 ‘서진’이라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거제 가배량성. 임진왜란 당시는 여기가 오아포라고 경상우수영이 있었고 전란 직후에는 짧으나마 삼도수군통제영도 겸했더랬습니다.

다른 잘못도 있습니다. 2014년 처음 쓸 때도 갈피를 잡지 못했고 2015년과 2016년 고쳐쓸 때도 관성에 기대어 그냥 넘기는 바람에 생긴 잘못입니다. 19쪽 밑에서 둘째 줄에서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전체를 옮겨적으면 이렇습니다.

“임진왜란 이듬해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경상우수영 거제 오아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두었다가 이듬해 8월부터는 전력 집결을 위하여 한산도 등지로 옮겨다녔습니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파직되고 3월에 통제사가 된 원균은 통제영을 오아포로 다시 옮겼으나 7월 칠천량에서 대패합니다. 뒤이어 8월 3일 통제사에 다시 임명된 이순신은 남해 제해권은 포기하고 서해를 지키기 위하여 그 들머리인 전남 목포 고하도와 전남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였습니다. 

오아포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다시 통제영이 되기는 하였으나 1602년 5대 통제사 류형이 고성현 춘원포(통영 광도면 안정만)으로 옮겼고 6대 통제사 이경준은 고성 두룡포(지금 통제영 자리)로 다시 옮겼습니다.”

이것은 통째로 틀렸습니다. 맞는 부분은 끄트머리 조금밖에 없습니다. 정말 낯이 화끈거리도록 부끄럽습니다. 미안합니다. 어쨌거나 바로잡으면 이렇게 됩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 8월 생겨난 직제입니다. 초대 통제사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고 통제영은 한산도에 있던 전라좌수영이 겸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2대 원균 3대 이순신 4대 이시언(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11월 25일 임명)까지는 모두 전라좌수사가 통제사를 겸했습니다. 전라좌수영이 있던 자리(여수·한산도·고금도·고하도 등)가 바로 통제영이었던 것입니다. 

통영 통제영의 중심 건물 세병관.

그런데 1601년 5월 3일 이시언 통제사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는 그만두고 경상우수사를 맡게 하는 조정 인사가 나왔습니다. 이로써 당시 경상우수영이던 거제 오아포가 통제영 본영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길지는 않았습니다. 

1601년 11월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5대)가 된 유형이 1602년 통제영을 고성현 춘원포(통영 광도면 안정만)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도 이 때는 오아포가 행영(통제사가 본영인 춘원포에 주로 머물면서 한 번씩 돌아다니며 머무는 군영) 노릇은 하였습니다. 

그런데 1603년 부임한 이경준 6대 통제사가 이듬해 고성 두룡포(지금 통제영 자리)로 통제영을 옮기면서 오아포는 행영 노릇조차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아포 통제영 시절은 짧게는 1년 길어도 3년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자료가 흩어져 있고 앞뒤가 맞지 않아 헷갈렸었는데 <선조실록>을 뒤져보고는 고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정확하게 못하고 엉터리로 잘못 적어 미안합니다. 늦었어도 바로잡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면 어슬픈 자기 위안이겠지요. ㅜㅜㅜ 

어쨌든 최헌섭 원장님! 이렇게 잘못을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 고맙습니다.^^      Orz......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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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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