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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사람들이 무서워졌다

한동안 페이스북에 아무런 글도 올리지 않았더니, 몇 지인들로부터 '뭔 일이 있느냐'는 문의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두 달째 내 페이스북은 멈춰 있다. 첫 계기는 지난 5월 '윤미향 사태'였다. 아니 정확히는, 윤미향의 죄를 미리 단정해놓고 그를 향해 독기 서린 증오 글을 올린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들이 윤미향을 증오한 근거는 당시의 언론보도였다. 내가 믿고 존경해왔던 분들이었고, 평소 누구보다 조중동류의 보도 행태에 분개해왔던 이들이어서 충격이 더했다. 두 달 뒤 박원순 사건 때도 그랬다. 정확히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떤 이는 너무나 쉽게 망자의 편에 섰고, 다른 이는 고소인의 편에 섰다. 윤미향을 날 선 언어로 욕하던 사람이 이번엔 박원순을 옹호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무..

14. 산을 넘어 바다로 내려가는 가화천 물길

인간사 희로애락 담고 산을 넘는 남강 물길 낙남정맥을 넘어 사천만으로 앞에서 살펴본대로 진주는 오랜 옛날부터 상습수해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1936년 8월 26~28일 병자년대홍수가 가장 심했다. 장대·봉곡동에서 제방이 터지고 진주성까지 일부 무너졌다. 그 바람에 읍내 칠암·본성·남성·동성·장대동 가옥 5500채가 물에 잠겼다. 이보다 심하지는 않지만 1920년과 1925년, 1933년과 1934년에도 진주는 시가지가 최대 80%까지 침수되는 홍수 피해를 겪었다.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간단한 이치 때문이었다. 진주 북서쪽에는 백두산에서 뻗어내려온 지리산과 남덕유산의 고봉준령들이 줄지어 펼쳐져 있다. 그 고봉준령 남동쪽 기슭에 떨어진 빗방울은 지형상 어쩔 수 없이 진주 쪽으로 남동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본 곳 2020.07.28

꽃다발 들고 황점순 할머니 찾아뵙는 날

모처럼 반가운 소식 하나 알려드립니다. 지난달 이 지면을 통해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이귀순 할머니 이야기를 전해드렸는데요.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누명을 벗겨달라며 제기한 형사 재심청구 소송이 검찰의 재항고로 인해 7년째 대법원에 계류 중이며, 망백(望百)이 넘은 할머니들이 끝내 판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탄식이었죠. 그 후 창원유족회 노치수 회장도 대법원에 호소문을 냈더군요. “특히 4명의 피고인 중 제일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 ‘망 이용순의 처 황점순 할머니’는 돌볼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노파로 지금 한 요양원에서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는데, 남편의 형사 재심 재판이라도 보고 세상을 떠나실 수 있도록 선처해주시길 호소합니다.” 이런 글이 대법관들에게 전해..

황점순 이귀순 두 할머니 이야기

황점순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찾아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다. 몇 년 전 진동 애양원에 계실 때 두어 번 찾아뵈었는데, 그때도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김 기잡니다. 김 기자"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 김 기자가~" 하며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27년생인 할머니는 올해로 만 93세가 되셨다. 열아홉에 진동면 곡안리로 시집와 스물둘에 아들 이상섭을 낳았으나,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과 함께 남편 이용순과 아들을 한국군과 미군의 학살로 잃었다. 그때 남편은 스물네 살, 아들은 고작 두 살이었다. 남편은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학살 현장에서 잃었다. 시조부, ..

13. 인공 남강댐에 생겨난 자연 습지들

사람 발길 끊기니 물총새 둥지로 물풀 고향으로 남강댐=진양호의 역사 경남 또는 진주에 살면서도 남강댐=진양호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그냥 있다는 사실만 안다. 어떤 사연을 품었으며 어떤 곡절을 겪었는지는 모른다. 남강댐은 박정희 시절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8년 공사 끝에 저수용량 1억3630만t으로 1969년 준공되었다. 계획홍수위를 40.5m에서 46m로 5.5m 높여 저수용량을 3억920t으로 2.3배가량 늘리기 위하여 보강공사를 벌인 때는 1989~2003년이다. 남강댐은 또 진주·사천·고성·통영·거제·하동·남해에 연간 생활·공업용수 2억2440만t과 농업용수 2억2680만t을 공급한다. 전기생산량도 한 해에 4130만kWh에 이른다. 홍수 조절 기능도 한다. 200년에 한 번..

가본 곳 2020.06.09

12. 노무현 길러낸 김해 화포천의 넉넉함

빼어난 습지 경관 화포천 물줄기는 김해 진례면에서 시작된다. 진례면은 김해가 창원과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대암산·용지봉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펼쳐 내리는 지역이다. 이들 산에서 비롯된 물줄기는 진례저수지 등에 들렀다가 골짜기를 빠져나오기까지 3km 정도 걸린다. 여기서 낙동강까지 화포천은 너른 들판을 끼고 북동쪽으로 15km 남짓을 또다시 구불구불 나아간다. 골짜기를 벗어나 들판과 함께하는 화포천은 크게 둘로 나뉜다. 진영읍 본산리까지 상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 100m 안팎으로 좁다. 반면 본산리에서 낙동강까지 하류에 해당하는 7~8km는 제방이 너비가 최대 700m에 이를 정도로 널찍하다. 화포천습지라고 일컫는 부분은 하류쪽 두 번째 구간이다. 하천 바닥에 이루어진 하상(河床)습지로서는 ..

가본 곳 2020.06.08

11. 매립과 보전이 맞서는 갈등의 광포만

사천만 잿빛 대지에 피어난 생명의 보고 1999년 새로 생겨난 지명 광포만은 사천 곤양면 중항·환덕·대진리와 서포면 외구·조도리로 둘러싸여 있다. 사천만의 서쪽 부분에 해당된다. 조선 시대에 곤양군이었던 지역을 움푹하게 파고들었다.(사천시가 대체로 지금과 같은 행정구역을 갖추게 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통·폐합으로 곤양군과 합해지면서다.) 광포만으로 들어오는 물줄기는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묵곡·목단·곤양·서포천 넷이다. 지금은 ‘광포만’이라는 지명이 횟집이나 부동산소개업체 상호에도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하지만 20년 전만 해도 광포만은 낱말 자체가 없었다. 그냥 사천만의 일부였다. 지금도 인터넷에서 광포만으로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말의 흥망성쇠는 필요에 따라 일..

가본 곳 2020.04.21

10. 사라질 뻔했던 마산만 봉암갯벌

다양한 생물 삶터로 경남 연안 첫 습지보호지역 갖은 욕설 내뱉던 개발업자 1999년 7월 19일자 경남도민일보 1면 머리기사는 봉암갯벌에 대한 것이었다. 기사 첫머리는 이랬다. “마산만의 유일한 갯벌인 봉암갯벌이 공장용도로 매립될 예정이어서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같은 해 5월에 삼원준설 등 4개 업체가 레미콘·콘크리트제품 공장 건설을 위하여 마산시 회원구 봉암동 21 지선 공유수면 1만3700평 남짓에 대한 매립 면허를 마산지방해양수산청에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보도가 나가자 삼원준설 대표는 경남도민일보에 대하여 갖은 욕설을 섞어가며 항의했다. “텅텅 빈 채 놀리고 있는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매립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갯벌에 오염물질도 없앨 수 있는데 반대만 한..

가본 곳 2020.04.19

9. 검포갯벌, 오랜 세월 쌓인 삶의 흔적

작은 가야? 센 가야! 고성군은 땅 모양이 반도(半島)처럼 생겼다. 북서쪽으로 육지와 이어져 있고 나머지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고성반도는 알파벳 ‘T’자를 대충 오른쪽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뉘어 놓은 ‘T’자의 북동쪽 끝이 동해면 외산리와 내산리이고 옆으로 뻗는 줄기를 이루는 가운데가 고성읍이며 남쪽으로는 통영시로 이어진다. 고성읍은 고성군의 중심이다. 읍내에는 송학동 고분군이 있다. 어지간한 동네 야산 정도로 커다랗다(실제 무기산舞妓山이라 했던 적도 있다). 2000~1500년 전 고성 일대를 쥐락펴락했던 지배집단의 무덤이다. 고려시대 스님 일연은 에서 고성에 있었던 가야를 일러 ‘소가야(小伽倻)’라 했다. 때문에 사람들이 고성을 두고 ‘작은’ 가야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지..

가본 곳 2020.04.18

8. 마동호갯벌, 역사·문화 모두 풍성한 생태계

해방 이후 전국 최초 간척 마동호 갯벌을 한 바퀴 둘러보는 시작점은 간사지교가 적당하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마을과 거류면 거산마을을 잇는 다리다. 여기 오면 까만 오석(烏石)으로 만든 조그만 빗돌이 있다. '국회의원 벽산 김정실 선생 공적비'다. 김정실(1904~69)은 고성읍 출신으로 1950년 6.25전쟁 직전인 5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고성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사람이다. 1988년 2월 세웠다는 비문을 보면 김정실의 공적은 이렇다. “선생은……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지을 제 땅을 갖도록 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 제2대 국회의원이 되자 곧 1951년 피난정부의 어려운 재정과 당시 상황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역민들의 숙원사업인 고성 간척지 조성사업을 온갖 열정을 다해 마침내..

가본 곳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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