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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182

표충사 사천왕은 왜 예쁜 여자를 짓밟을까

밀양 표충사에는, 이처럼 작지만 생각할 거리도 있답니다. 그러면서 죄악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됩니다. 바쁠 때는 스쳐지나가고 말지만, 그래도 절간을 찾을 때는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은 이상 마음이 느긋한 편이기 때문에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릴 때가 많습니다. 이리 여기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어쨌든 사천왕문이 제게는 그렇습니다. 보통은 일주문 다음에 사천왕문이 있고 그 뒤에 해탈문이 나옵니다만, 표충사는 조금 다릅니다. 일주문 다음에 수충루(酬忠樓)가 있고 뒤이어 사천왕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탈문은 있지가 않습니다. 1. 부처님 법을 지키는 사천왕과 사천왕문 그러거나 말거나 사천왕문에는 사천왕이 넷이 양쪽에 둘씩 늘어서서 이른바 불법(佛法)을 지키는데요, 말하자면 여기 ..

오래 된 나무를 앞에 두고 경건해지기

1. 600살 먹은 영암사지 들머리 느티나무 4월 7일 경남 합천 가회면 모산재 기슭 영암사지를 찾았습니다. 망한 절터 치고는 보기 드물게 씩씩한 그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어서였습니다. 여드레 뒤에 함께 올 일행을 위해 답사하러 나온 길이기도 했습니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불고 있었습니다. 신문 방송에까지 나온 것처럼 여름철에나 불어대는 그런 태풍급이었습니다. 눈을 뜨기도 어려웠습니다. 10분도 채 서 있지 않았고 옷도 전혀 얇게 입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몸이 무척 떨렸습니다. 재미나게 구석구석 돌아보겠다는 생각을 얼른 버리고 바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러고는 바람을 등지고 뛰듯이 걸어서 절터를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는데 그 앞에서 커다란 느티나무를 한 그루 만났습니다. 2005년 들어선 바..

옥상에서 휘날리는 저 '빤쓰'들을 보며

2011년 12월 22일 합천에 다녀왔습니다. 청덕면 한 골짜기 작은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걸을만한 길이 나 있는지 살피던 제 눈길이 어느 집 옥상에 가 머물렀습니다. 거기에는 태극기처럼 바람에 휘날리는 '빤쓰'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빤쓰를 보는데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요즘 어지간해서는 이렇게 바깥에다 빨래를 너는 일이 무척 드뭅니다. 집 자체가 옛날처럼 개방돼 있지 않고 폐쇄적이기 때문입니다. 폐쇄는 아파트가 대표적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독 주택이라 해도 집안 바깥에다 이렇게 바지랑대를 하거나 해서 빨래를 내다 말리는 일은 보기 어렵습니다. 속옷은 더더욱 바깥에 내다 걸지 않습니다. 빤쓰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아무래도 이 집 안주인일 텐데요, 안주인은..

벌거벗은 나무와 벌거벗지 않은 나무

1. 70년대 말에 이런 우스개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가벼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박정희 유신 정권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니 꽤나 긴장된 분위기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었지요. 친구 몇몇이 모여 '누가 가장 오래 목욕을 안 했는지' 내기를 했습니다. 먼저 철수가 말했습니다. "나는 명절 때만 한다네." 설과 추석에만 하니 한 해 두 차례 목욕을 하는 셈이지요. 이어서 길남이나 말했습니다. "나는 생일이 돼야 목욕탕에 간다네." 한 해에 한 번밖에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철이가 말했습니다. "나는 올림픽이 열릴 때만 한다네." 4년마다 한 번 하는 셈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들 졌다 싶어서 아무 말이 없었는데요, 좀 있다가 훤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다네..

남자는 무와 닮았고, 여자는 배추와 같다

며칠 전 산청에 갔는데 이런 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무 밭에 있었는데요, 이 녀석 말고도 이렇게 널려 있는 무가 많았습니다. 아니 밭에 있는 모든 무가 이런 신세였습니다. 물론 아직 캐내지 않은 무도 많았습니다만, 캐낸 녀석들은 이처럼 무 몸통이 버려져 있었고 다만 무청만 커다란 포대에 담겨 있었습니다. 요즘 무가 제 값을 못 받는 탓이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모양입니다. 무 몸통은 이렇게 버려지고 무청만 선택을 받는 것이지요. 여기 무들이 모두 몸통이 조그마한 데 비춰보면, 어쩌면 여기 무들은 무청을 건지기 위해 길러진 것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버림받은 무 몸통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무가 마치 남자 같다고 말입니다. 몸통이 둘로 갈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무슨 튀어나온 부분..

습지가 생명의 보고이기만 할까?

1. 습지-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가장 활발한 땅 습지는 6m 이하로 언제나 또는 때때로 물에 젖어 있는 땅을 이릅니다. 람사르협약에 따른 규정입니다. 람사르협약은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중요한' 습지를 보전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습지가 '물새 서식지'로서 제 노릇을 하려면 다른 많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먹을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물새는 물고기나 벌레 따위도 먹고 식물 열매나 뿌리 따위도 먹습니다. 물새가 제대로 살려면 이런 것들이 많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많은 데가 습지라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습지에는 이런 것들이 많습니다. 어려운 말로 '종 다양성'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생명이 함께 어울려 살아갑니다. 잠자리 애벌레나 반딧불이에서부터 삵이나 황조롱이에 이르기까지, 물옥잠,..

해인사에는 '없어지는 부처님'이 있었다

9월 29일 해인사에 들렀습니다. 경남도민일보 갱상도 문화학교 추진단이 주관한 합천 블로거 탐방 일정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홍류동 소리길 걷기에 앞서 해인사에 가본 것입니다. 걸음이 보경당 앞에 머물렀는데, 들머리에 "김아타 '얼음 불상'" 이라 적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장경천년문화축전의 해인아트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김아타는 예전에 얼핏 듣기로 우리나라 보다는 미국 같은 다른 나라에서 더 알아주는 독특한 조각가입니다. 얼음을 조각해 상을 만들고 그것이 녹아내리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통해 무엇인가 메시지를 던지거나 말거나 한다는 그런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한 번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여기서 뜻밖에 마주쳤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경남도민일보 기사를 통해 이런 전시가 있다..

창녕 장날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 총각

7월 23일 창녕 장날에 거기 시장을 찾았습니다. 소벌(우포늪)에 대해 원고 한 꼭지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슨 느낌이 있는지 한 번 둘러보려고 나선 길이었습니다. 소벌은 장마에 잠겼던 자취가 뚜렷했습니다. 물풀들에는 개흙이 묻어 있었고 둘레 배수장 같은 건물 벽에는 2m도 더 되는 높이에 개구리밥 같은 물풀이 말라 붙어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다니며 사진도 좀 찍고 아이들 물에 들어가 노는 모습도 좀 담고 한 다음 돌아나왔습니다. 점심 때 치고는 좀 늦었습니다. 혼자라서 밥집에 들어가기가 궁상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냥 갈 수 없겠다 싶어서 장터 국밥집에 스며들었습니다. 수구레 국밥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방면 옥야에 가게가 있는데 그 가게에서 창녕 장날마다 여기로 나와서 천막을 치고 국밥과 ..

살아남는다는 것의 서글픔

밥집이나 술집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민속'을 앞에 달고 있는 음식점들에 가면 더욱 그렇습니다. 옛날에 쓰이던 민속품이 여기저기 나앉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데는 물건을 넣어두던 반다지나 내리다지도 나와 있고요, 호롱불 등잔이나 숯을 넣어 쓰던 다리미, 촛대, 됫박이나 말통이 나와 있을 때도 있습니다. 또 물지게가 끌려나온 데도 있었습니다. 옛날에 솜을 잣던 물레, 심지어는 1970년대 시골 마을에서 아낙네들이 많이 했던 홀치기 기구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존재들에 오랫동안 눈길을 던져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리저리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게 지내는 형편은 못 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이런 것들 때문에 쓸쓸한 느낌이 드는 때도 없지는 않습니다. 여기 이런 것들은 한 때..

얼마나 참을 일이 많았기에 이랬을까

며칠 전 동네 카센터에 들렀다가 이런 그림을 봤습니다. 어쩌면 글이라고 해야 될 것 같기도 한데, 한자로 참을 인(忍)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에 더해 왼쪽 옆에는 세로로 무인불승(無忍不勝)이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참음이 없으면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랍니다. 승이 있으니 따라서 패(敗)도 있게 마련인지라 여기가 바로 승패의 세계인 모양입니다. 물론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한 순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을 추슬러 어떤 상황에서든 제대로 맞서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겠지요. 어쨌거나 신기해 보여서 이렇게 사진을 찍어놓고 끄집어내어 보니 옛날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1980년대 초반 서울 있을 때 얘기인데 그 때는 광화문에서 종로까지 버스 정체가 아주 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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