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 역사는 이긴 사람의 기록입니다. 이기고 지고로 하는 구분이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상이 그러니 특정 개인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지요.
전쟁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긴 사람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대체로 이긴 편에 서서 그 기쁨과 즐거움을 대신 누립니다. 패배한 이들을 빼면, 대부분은 누구도 진 편을 들어 슬픔과 아픔을 가누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이긴 이들이 어떻게 왜 이겼을지만 살피고 배울 뿐, 깨진 사람들이 왜 졌으며 깨진 사람들이 다음에 이기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는지 따지지는 않습니다. 이 또한, 승자도 패자도 아닌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스페인 내전'은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패배한 쪽 관점에서 살펴보고 기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내전'의 '패배'는 여러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게르니카.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앙드레 말로의 <희망>, 피카소의 '게르니카', 로버트 카파의 '어느 병사의 죽음' 등이 그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이 '스페인 내전'의 역사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을까요?
2.
개인 경험이지만, 스페인 내전이 제 머릿속에 뚜렷이 박히게 된 계기는 1982년 대학 1학년 때 앙드레 말로가 쓴 소설 <희망(L'espoir)>이었습니다. 앙드레 말로는 잘 알려진대로, 1927년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인간 조건>을 쓰기도 한 프랑스 작가입니다.
1901년 태어난 말로는 베트남 독립운동 조직에 가담하기도 하고 중국 현실에도 뛰어들었으며 독일에 들어가 반나치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국제여단 지도자로도 활동했습니다. 나중에는 '우익' 드골 정부에도 입각을 했었습니다만.
저는 아쉽게도 <희망>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목적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에 등장한 파시즘에 맞서는 대항 하나였지만. 60여 명이 등장하는데다 저마다 국적과 당파가 달랐으니 유럽에 대한 이해가 얕은 상태에서는 더욱 어지럽기만 했던 것입니다.
3.
어떻게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단일한 목적 아래 모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것이 신기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일본 군국주의 저지를 위해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번에 나온 책 <스페인 내전>의 부제가 무엇인가를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이랍니다. 1936년부터 39년까지 스페인을 쑥대밭으로 만든 이 전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 갖은 이념들이 충돌한 공간이었으며 자본가·지주 계급과 노동자·농민 계급이 맞붙은 계급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스페인 민중과 이를 억누르는 권위주의 가톨릭 교회가 대립한 종교전쟁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울러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 가치의 절멸을 막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몰려든 3만5000여 명이 국제여단으로 조직돼 참여한 세계 양심의 투쟁으로 기억되는 전쟁이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와 소련이 개입한 국제전 성격도 띠는 내전이었다고도 합니다.
4.
내전의 시작은 군부 쿠데타였습니다. 1936년 7월 17일 내전을 일으킨 '국민진영'의 목적은 그 해 2월 선거로 집권한 '인민전선' 공화 정부를 무너뜨리고 '옛 스페인'을 되찾는 데 있었습니다. 국민진영은 프랑코를 지도자로 삼아 파시즘 세력인 팔랑헤당과 군부 가톨릭 자본가·지주 등 상류 계급이 일사불란하게 단결했습니다.
반면 맞서는 '공화진영'은 자유주의에서 공산주의 아나키즘까지 여러 세력이 공화(共和)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공화진영은 '공화'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사분오열 쪼개졌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공화 진영의 패인이 여기 이 분열에 있다고 봅니다.
1937년 봄 스탈린 지령을 따르는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이 권력 장악을 결심하면서 공화진영은 서로 피튀기며 투쟁했답니다. 공산당의 권력 장악과 동시에 숱한 사람이 '트로츠키주의자' '파시스트 제5열' '반역자' '스파이'로 내몰려 고문받고 살해됐습니다.
공산당 소속이 아니면 무기를 지급받을 수 없었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조차 진료를 거부당했습니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으며 지켜야 할 이상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대의명분을 잃어버린 공화진영은 아주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5.
그러나 <스페인 내전>을 읽는 의미를 이런 결론이 뻔한, 분열에 대한 경계에서 찾는다면 참 허망하지 않을까요?. '스페인 내전'은 가장 20세기다운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20세기가 이념의 시대였다는 데 동의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20세기 세계의 역사를 결정짓는 전쟁이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 20세기가 이념의 시대였다는 말이 틀리지 않다면 말입니다.
이는 국제여단 구성과 조직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국제여단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중간계급 출신인 고상한 지식인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답니다. 실제로 영국 출신 지원병의 경우 80%가 육체 노동자였지만,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참전 동기가 분명히 이타적이었다고 합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념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이런 엄청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는지요?
그들은 파시즘을 국제적으로 실재하는 위협으로 봤습니다. 국제여단이 거기에 맞서는 방법 가운데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을 세계의 앞날을 판가름하는 전장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이 아닌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까요?(물론 십자군전쟁에서처럼, 여러 나라들이 예전부터 서로 관련돼 왔다는, '유럽적'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겠지만은요.)
6.
마지막. 지은이 앤터니 비버는 머리말 끄트머리에서 "사실 스페인 내전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었다"고 못박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진실은 여러 맥락에서 읽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 어떤 팩트(fact) 따위는 아니고,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성,으로 좀 확장해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에 어떤 진실(들)이 있었는지, 그 진실(들)이 어떻게 희생되고 사라져 갔는지 궁금하다면 책 사는 돈을 좀 써야 하겠습니다. 전체 831쪽에 3만6000원입니다. 옮긴이 김원중은 원작에는 들어 있지 않은데도 우리나라 독자를 위해 '주요 인물'과 '스페인 연표'를 만들어 말미에 붙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스페인 내전> 이 역사책을 다 읽고 나면, 27년 전 못 다 읽은 앙드레 말로의 소설 <희망>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책꽂이에는 아직도 그 때 못 읽은 그 책이 그대로 꽂혀 있거든요. 대학 시절 장만했던 책은 거의 다 잃어버렸는데도, 그 책은 드물게도 여태 남아 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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