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말하자면, 사랑도 모르고서는 인생을 말하지 말라, 이런 정도가 되겠지요.
그러면 전쟁은? 이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니잖아, 특정 세대가 어쩌다 겪는 유별난 일일 뿐이잖아? 그럴까요? 남자라면 빠짐없이 군대를 가야 하는 대한민국 현실은? 이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대는 또 무엇인가요? 그러니까 역사와 현실이라는 양면을 모두 보더라도 언제나 세상은 “‘전쟁 중’이거나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의 지속’”인 셈입니다.
조선 시대 인간들의 전쟁과 사랑을 무(武)와 문(文)을 통해 들여다보는 책 두 권이 나란히 나왔습니다. <조선 무사(武史)>와 <눈물이 빗물처럼(淚如雨)>입니다. <조선 무사>는 이순신이라든지 이괄·권율·신립 따위들은 아예 들어내 버렸습니다. 대신 지금은 그런 사람이 산 적이 있었는지 존재조차 없어진 일반 백성을 중심에 앉혔습니다. <눈물이 빗물처럼>은 조선 시대에 이뤄진 이런저런 사랑을 대표함직한, 그리고 여러 시(詩) 속에 살아 있는, 일곱 쌍을 실감나게 재현했답니다.
◇영웅호걸들만 전쟁에서 싸우고 아파했을까?
<조선무사>의 문제의식은 “전쟁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아파하는 것이 비단 영웅호걸들뿐일까?” 하는 데 있습니다. 글쓴이 최형국은 싸우고 아파한 존재는 “총칼을 쥔 한 명 한 명의 병사들과 여러 물자를 보급했던 이름모를 백성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여태 역사는 잘난이들의 독무대였고, 그래서 뛰어난 장수나 지휘관 그리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되는 역사는 민중 관점에서 보면 빈자리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그이는 전체 흐름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역사의 기록 속에 흩어져 여기저기 조각나 있는 병사와 백성의 삶을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도 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조선 병사의 하루를 재구성하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잠자리 정리~땔감하기~물긷기~밥짓기~전투 훈련~행군~비상식량 만들기를 한 다음) 오후는 갑주(甲胄)를 입고 무기를 쓰는 훈련으로 일종의 완전 군장 훈련이다. 훈련장에서는 일부러 군장을 비롯한 무기를 더 무거운 것을 사용해 병사들 힘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명령을 일삼는 장군이나 대장 들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이 입고 쓰는 갑옷과 무기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답니다. 당연히 알고 있는 이들도 많겠지만, 백성들이 피눈물로 지은 것이지요. “군역으로 온 대부분의 병사들은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사야 했다. 가난한 집에서는 무기를 사느라 집안이 망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군법은 엄하기만 해서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으면 곤장 세례를 내렸다.”
조선 문예부흥을 이끌었다는 정조를 두고는, 요즘 사람들의 입질 경향에도 글쓴이는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문(文)과 예(藝)에만 초점을 맞추면 절반밖에 알지 못하는 꼴이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정조가 새 세상을 꿈꾸며 만든 조선 최고 정예 친위 부대 ‘장용영(壯勇營)’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실제로도 그랬겠지 싶습니다. 할아버지 영조 시절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거든 노론(老論) 권신을 누르려면 친위 군대가 필수였겠지요. 그리고 권신을 누르지 않고서는 혁신을 완결은커녕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노론은 중앙 병권을 오로지하고 있었다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할아버지 영조가 숨을 거둔 뒤 곧바로 1777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5년 30명 규모 친위 부대 장용위(衛)를 창설하고 이태 뒤 200명 크기 장용청(廳)으로 확대한 다음, 1788년에는 단독 군영인 장용영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조의 힘 있는 개혁 정치는 이 같은 무력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조 숨진 뒤 권신들의 첫 과녁은 장용영이 됩니다. 1800년 정조가 사라지자 장용영은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왕위를 이은 순조가 11살이었으니, 정조가 너무 일찍 죽은 셈입니다. 몇 해 더 살았다면, 잘 나가는 명문족벌들의 지배가 자리 잡는 대신, 군왕의 개혁 정치가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권신(權臣)들은 가장 먼저 장용영이 확보하고 있던 독자 재정을 흔드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정조 장례 치르는 데 든 비용을 장용영 재정으로 감당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시나브로 힘을 뺀 다음, 영의정 심환지가 ‘장용영 혁파 상소’라는 결정타를 날립니다.
정조 떠난 지 이태만인 1802년입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꿈, 군왕 주도 개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조선무사>는 우리 앞에 놓인 역사의 너비와 깊이를 확실하게 키워주는 것 같습니다. 이밖에도 기병(騎兵)의 역사도 일러주며, 봉수대와 관련해서는 만약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거나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경이면 봉수군이 다음 봉수까지 죽도록 달려가야만 했던 고달픔 따위를 생생하게 일러줍니다.
성곽을 다루는 데서는 조선 성곽의 장점 등등을 얘기하면서 그 성곽을 쌓는 데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겠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창녕 화왕산성이나 진해 웅천읍성을 절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시 고생했던 민중들이 눈에 밟혀서 말입니다.
호랑이 잡는 착호군(捉虎軍)이라든지, 임금을 호위하면서 말 키우기도 맡았던 겸사복(兼司僕) 같은 특수부대의 존재도 드러내 보입니다. 아울러 여러 전투에서 썼던 무기들, 비밀 병기 따위에 대한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였으나 사랑을 시보다 더 사랑하였노라’
<눈물이 빗물처럼>은 홍낭과 최경창, 매창과 허균, 황진이와 소세양, 한우(寒雨)와 임제, 이옥봉과 조원, 김부용과 김이양, 김삼의당과 하립이 주인공입니다.
여기 나오는 여자 가운데 기생 아닌 사람은 김삼의당 말고는 없답니다. 홍낭 매창 황진이는 이를테면 ‘국민 기생’ 수준으로 잘 알려져 있고요 한우와 이옥봉과 김부용도 대중의 인기를 적지 않게 누리고 있습지요.
주인공들은 죄다 유별납니다. 최경창에게 ‘꽂힌’ 홍낭부터도 남다르지요. <눈물이 빗물처럼>을 읽어보면, 지은이 이상국은 문학(시)보다도 인생(관계)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커다란 장점입니다. 문학을 풀어놓기 위해서라도 인생(관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최경창이 있는) 함경도 경성으로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홍낭은 자살을 시도한다.” “미친 듯이 몸부림쳐서 천리 길을 달려가 겨울 동안 품었던 사람을, 봄날에 문득 내놓고 돌아선 여인이, 못내 아쉬워 길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저 멀리 가고 있을 남자에게 보내는 그 마음이야말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시가 아니던가.”
아시죠, 이 시조?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자시는 방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 ‘밧긔’에서는 거리감이 나타납니다. 정실이 될 수 없는 운명으로 주로 바깥에서 바라기만 할 수밖에 없는 신세지요. ‘나린가도 너기쇼셔’에는 이런 쓸쓸함이 있습니다. ‘도’라는 토씨 하나로 그런 느낌을 온전하게 묻혀 왔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에 묏버들을 받은 최경창은 이내 돌아와 난초 한 촉을 건넸나 봅니다. 이런 한시가 남아 있습니다. “마주 보며 흐느끼다 유란(幽蘭)을 주노라/ 이제 가면 하늘 끝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의 옛 노래는 부르지 말아라/ 지금 운우(雲雨)의 정 가득하니 청산이 어둡다”. 마지막 ‘청산이 어둡다’가 사무치지 않습니까? 현실에 있는 구름과 비에 가려 어둡기도 하고, 홍낭과 나눴던 운우지정이 눈앞을 가리는 바람에 어둡기도 하고 말입니다.
홍낭은 최경창이 세상을 떠난 뒤 그 무덤을 9년 동안 지켰다고 합니다. 요즘 눈으로 보면 ‘완전’ ‘미친 년’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미색(美色)이 혹여 방해가 될까 스스로의 얼굴을 칼로 그려 상처를 냈다.”고까지 하니까 돌아도 단단히 돌아버린 셈입니다.
매창과 허균은 또 얼마나 진하게 노닥거렸을까요. “우리는 하루도 같은 방에서 잠을 잔 적이 없으니 한 방에서 잠든 화담(서경덕)과 명월(황진이)보다 한 수 위가 아니겠소?”(허균) “우리가 이승에서 함께 잠자지 않은 것은 무덤에서 영원히 함께 잠들기 위해 아껴둔 것이 아니더이까?” 그이들 사랑의 붉디붉은 빛깔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서경덕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한 황진이는 자기자신의 아름다움에 파묻히지 않고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또 판서 벼슬을 지낸 소세양을 ‘30일 전투’에서 완벽하게 제압하기도 합니다. 딱 서른 나날만 함께 지내고 떠나겠노라(다음 명월(보름달)이 뜨고 나면 명월(황진이)을 다시 품지 않으리라)면서 찾아온 소 판서를 더 머물지 않을 수 없게 만들지요. 그러나 글쓴이 이상국은 소세양을 패배자로 그리지 않습니다.(궁금하면 한 권 사서 보세요, 하하.)
그러고는 나중에 모든 것을 버리고 금강산에서 지리산까지 무전여행을 나섭니다. 여기서 이상국은 지금도 만만찮은 무전여행의 고단함을, 그리고 그 고단함을 마다않고 길거리 매춘까지 감행하면서 자유를 누리려는 황진이의 정신세계를 이상국은 실감나게 펼쳐 보입니다.
몰락 양반 가문 부부 김삼의당과 하립의 사랑은 더욱 유별납니다. 남편 출세를 위한 눈물 프로젝트라 할 만합니다. 결국 과거 급제를 못해 농사밖에 지을 수 없는 신세가 된 뒤에도 이 부부의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조선 후기 명문 권력가 안동 김씨 김이양 첩살이를 한 김부용 얘기는 여기 나오는 다른 주인공들과는 달리 한결 느긋합니다. 김부용의 한강변 별장이 권문세가들의 사교장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실수로 깨져버린 첩실 이옥봉의 남편 조원에 대한 사랑은 그야말로 애를 끊습니다. 쫓겨난 옥봉은 남편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가지가지 시편(詩篇)에다 담았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방 안에 놓인 저 시들로 내 몸을 산 채로 염을 해서 나룻배에 묶어 강으로 밀어주시오”.
<눈물이 빗물처럼> 일곱 스토리 가운데 남자를 이야기꾼으로 삼은 꼭지는 마지막 백호 임제뿐입니다. 임제는 참 당대 현실과 어울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이가 평생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했던 까닭을 지은이는 시대 상황에서 주로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제와 한우가 주고받은 수작은 한편으로는 깜짝 놀랄 만큼 뻔뻔하답니다.
“북천이 맑다커니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임제). “어이 얼어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암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한우). 여기서 찬비가 기생 한우(寒雨)를 비유하고 있음은 잘 아실 테지요.
또 옛말 ‘얼다’에 두 가지 뜻이 있는 줄도 다들 아시지요? 하나는 지금 말로도 ‘얼다(凍)’고요 다른 하나는 지금 말 ‘사랑하다’에 맞갖을 것 같습니다.(물론 사랑하다에서는 마음의 느낌이 세고, 얼다에서는 몸의 느낌이 세다는 차이는 있지요만.) 그러니까, 찬비-얼다(凍)라는 짝은 시리도록 춥고요, 한우-얼다(愛)는 웃통 벗어젖힐 정도로 덥습니다.
여기 이런 모든 것을 다 떠나서요, <조선 무사>와 <눈물이 빗물처럼>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둘 다 엄청나게 재미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4월 16일치 13면 ‘책 소개’에 실은 글을 좀 많이 늘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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