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TV '가짜교사 사건' 뒷얘기 추적해봤더니…

기록하는 사람 2009. 3. 2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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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가짜였지만 정말 훌륭한 교사였어요"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50분 MBC TV에서 방송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지난 15일 이 프로그램의 '진실 혹은 거짓' 세 번째 이야기로 경남 함양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학교 괴담'이 소개됐다. 그 내용은 이랬다.


1972년 함양군, 5학년 진희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10년 전 우울증에 시달리던 한 여선생님이 자살한 후, 그 선생님이 귀신이 되어 학교를 떠돌아다닌다는 괴담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숙직근무 중이던 진희의 담임 선생님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선생님이 부임해온다. 새 담임 선생님의 이름은 석태윤(당시 35세).

석 선생님은 부임해오던 날부터 비밀스럽고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데, 이를 이상히 여긴 아이들이 몰래 선생님 뒤를 따라가본다. 선생님의 집에서 아이들이 발견한 것은 얼굴이 잘려져 나간 석태윤 선생님의 대학졸업앨범.


놀란 아이들은 그날 이후 담임 선생님을 귀신으로 의심하게 되고, 그 소문은 교장 선생님의 귀에 들어간다. 이상히 여긴 교장 선생님이 교육청에 찾아가 석태윤 선생의 인사기록카드를 확인해봤더니, 놀랍게도 그는 5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었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 3월 15일짜 진실 혹은 거짓 세 번째 이야기로 소개된 '함양 가짜 교사 사건'의 한 장면. /MBC홈페이지


사실을 알고 보니, 석태윤이라는 이름으로 5년 간 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해 온 사람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교사 자격증을 주워 사진을 위조한 뒤, 석태윤 행세를 해온 가짜였던 것이다. TV속 이야기는 가짜 교사가 수갑을 찬 채 경찰에 연행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진실일까, 거짓일까? 이어지는 정답 발표는 이 사건이 보도된 한 매체의 기사를 보여주며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본 기자는 이 사건의 뒷이야기를 취재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름아닌 경남에서 일어난 일인데다, 그 내용도 워낙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진실 혹은 거짓' 5년 전 죽은 교사가 살아서 근무?

일단 방송의 근거가 된 기사는 1972년 2월 6일자 <선데이서울>에 실린 것이었다. 다음은 당시의 기사 전문.

"이미 사망한 국민학교 선생님이 멀쩡하게 살아 5년 3개월동안 교편을 잡은 희한한 미스터리. 황모씨는 전남 나주군 출생으로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66년 3월에 신병으로 사망했는데, 지금까지 경남 함양군 Q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학부형들이 경악.

알고보면 황씨는 분명히 사망했는데 누군가의 실수로 66년 3월 사범학교 졸업장과 교사자격증을 나주군에서 분실한 것이 '미스터리'의 시초. 이 자격증을 주운 이모 교사(36)는 황씨로 행세하며 66년 10월부터 지금까지 함양군 Q국민학교에 교편을 잡아왔을 뿐 아니라 나주보건소장 명의로 신체검사서까지 발급받아 그럴싸하게 선생님 행세를 해왔다는 것."

◇함양 옥당국민학교 실제 사건 = 우선 사건의 무대가 됐던 학교는 어디일까? <선데이서울> 기사에는 'Q국민학교'로 나왔지만, 방송에서 보여준 석태윤 선생의 인사기록카드에는 '경남 함양 초등학교'라고 나온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지금도 함양읍 함양군청 바로 옆에 있는 '함양초등학교'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특히 아이들 사이에선 'TV에 그렇게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실'로 굳어져버릴 가능성이 높다.

취재 결과 그 학교는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추하마을에 있던 '옥당국민학교'였다. (함양초교 학생과 교사들은 안심하시라!) 지금도 학교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1995년 서상면 대남리에 있는 서상초등학교에 편입돼 폐교된 상태다. 현재는 학교 터도 개인에게 팔렸다.

당시 이 사건을 가장 잘 알만한 사람을 물색하던 중 같은 시기 옥당국민학교에서 동료교사로 재직했던 김흥식(65·함양군 함양읍) 선생을 찾을 수 있었다. 김흥식 선생 2006년 진주 도동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김 선생은 당시 그 교사의 이름을 '황봉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중에 경찰에 잡혀간 뒤에야 우리도 그 사람이 가짜라는 걸 알았는데, 진짜 본명은 지금도 모릅니다. 나중에 들으니 이씨라고 하던데, 교사로 있던 중에는 모두 황봉주 선생으로 알았죠. 혼자 살았던 것도 아니고 처와 아들까지 함께 금당리 학교 근처에서 살림을 했는데, 어떻게 아들 성까지 그렇게 바꾸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죠. 키는 작았지만 인물은 훤했고, 사람도 참 좋았습니다."

◇가짜로 들통났지만 학부모들 탄원서 내고 선처 호소 = 비록 남의 이름을 도용한 가짜 교사였지만 워낙 아이들에게도 잘하고 열성적으로 가르쳐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로부터도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처음엔 함양경찰서에서 구속돼 거창지청까지 넘어갔는데, 학부모들이 선처해달라고 탄원서를 넣고 하는 바람에 나중에 잘 풀려나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만 해도 중학교 입시가 있을 때였는데, 그 교사가 워낙 학생들을 잘 가르쳤거든요."

당시 같은 학교에서 기능직으로 '가짜 황봉주 선생'과 함께 근무했던 김재수(61) 씨도 "학부모들이 탄원서를 내서 빨리 나왔다"고 증언했다. 학부모였던 강수영(77) 씨도 "아동들을 잘 가르치고 이웃에도 잘해 신망이 높았다"면서 "황 교사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제자와 학부모들이 문상까지 갔다"고 말했다.  

지금은 폐교로 남아 있는 옥당초등학교. /경남도민일보 안병명 기자


당시 옥당국민학교는 전체 학생이 300여 명이었고, 학년당 한 학급씩 약 40~50명의 학생으로 편성됐다. '가짜 황봉주 교사'는 주로 5학년과 6학년 담임을 맡았었다고 한다. TV에서 '5학년 3반'으로 설정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TV에서 이 학교에 10년 전 우울증 여교사가 자살했고, 이후 숙직교사가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것은 허구였다. 김흥식 선생은 "옥당국민학교에서 교사가 자살하거나 죽은 일은 내가 아는 한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는 방송에서 드라마틱한 극의 전개를 위해 임의로 만들어넣은 내용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황봉주 교사 인사기록카드 그대로 =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아무리 오래 전의 일이라 해도,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려면 교육청의 발령을 받아야 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미 신병으로 사망한 '진짜 황봉주' 교사가 어떻게 옥당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혹시 당시 교육행정이 워낙 엉망이어서 발령이 없어도 그냥 교원자격증만 들고 학교에 찾아가면 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경남도교육청과 함양교육청에서 '황봉주'라는 교사의 인사기록카드를 찾아봤다. 카드는 아직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1966년 10월 5일 옥당국민학교 발령, 1972년 1월 17일 신규발령사항을 취소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TV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망' 사실은 기록에 없었다. 인사발령권자는 '경남도교육위원회 교육감'이었다.

<선데이서울> 기사대로라면 '진짜 황봉주'는 1966년 3월 신병으로 사망했는데, 어떻게 7개월 후인 10월에 인사발령이 날 수 있었을까? 불행하게도 그 경위를 증언해줄 사람은 찾지 못했다. 다만 교육청과 황봉주의 본적지인 전남 나주시 왕곡면 사무소 공무원으로부터 그럴듯한 추정이 가능한 이야기를 들었다.

"1966년이라면 아직 주민등록번호가 생기기 전이었어요. 주민등록번호는 1968년 11월부터 생겼거든요? 그런데다 그 땐 지금처럼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아 면사무소에 사망신고가 되었더라도 교육청엔 제대로 통보가 안되는 일도 적지 않았지요. 그러다보니 교육청에서는 살아있는 줄 알고 인사발령을 냈고, 마침 황봉주 교사의 교원자격증을 줍게 된 가짜인물이 발령사항을 알아낸 후 학교로 찾아갔겠죠."

사진 = 경남도민일보 안병명 기자


◇풀리지 않은 의문, 그러나 취재 중단한 까닭
= 하지만 그럼에도 5년이 넘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들통나지 않고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1968년 주민등록증이 생겼고, 이를 발급받는 과정에서도 들통나지 않았다면 중대한 행정의 허점이 아닐 수 없다. 이 의문은 결국 풀 수 없었다. 경찰의 수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양경찰서 관계자는 "수사기록은 20년이 지나면 폐기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1972년 사건이라면 기록을 찾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가 학부모들의 탄원에 힘입어 풀려났다고 하더라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면 재판기록은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재판기록은 본인이나 그 가족 외에는 열람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기자는 취재과정에서 그의 진짜 이름과 소재지를 알아내긴 했다. 그의 신분이 들통나게 된 계기도 알아냈다. 하지만 이쯤에서 취재를 중단하고 말았다. 몇 가지 의문이 있긴 하지만, 오래 전의 일로 그를 괴롭히면서까지 꼭 풀어야 할 일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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