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아직도 여성 해방 운운하느냐고?

김훤주 2009. 3. 26.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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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성 해방 운운하느냐고 말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남자지만, 그럴 때마다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앞으로 한참 더 여성 해방을 얘기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고요? 여전히 여성에게 억압이 있으니까요. 가부장제로 고통을 받으니까요.

여기 사실이 그러함을 일러주는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여성 억압에 대해 쉽게 또는 어렵게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입니다>와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와 <성 정치학>이 그것입니다. 요즘 들어 쏟아졌습니다.
 
◇전쟁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나

보스니아의 사페타. 36살. 남의 집 청소를 하고 산 열매를 따다 팔아 먹고 삽니다. 사페타는 이웃 사람과 병사들이 강간하던 그 때 공포를 떠올렸습니다. “고통스러웠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에 더 강해졌어요. 어떻게 아이들에게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보여줄 수 있겠어요. 만일 내가 주저앉아버렸다면…….”

그이는 버려진 집에서 여러 차례 강간당했습니다. 그이는 아직도 병사들 가운데 한 남자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죽일 필요도 없어, 어차피 자살할 테니까.” 하지만 사페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대신,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실 앞에서 몇 날 며칠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 달라고 끈질기게 청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살던 데로 돌아왔지만, 사페타와 남편을 기다린 것은 불타버린 집뿐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나디아. 19살. 9살 소녀일 때 집으로 로켓이 날아들었습니다. 큰오빠가 바로 맞아 숨졌고 나디아도 왼쪽 얼굴 따위를 크게 다쳤답니다. 이태 동안 병원에 있다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얼이 나가 있었고, 어머니는 심장 장애로 약에 기대어 살고 있었고, 어린 두 여동생은 헐벗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탈레반 지배 아래 여자는 바깥에 나갈 수도 없는 세상이었지만 11살 나디아는 나가야만 했지요. “최선의 선택이 오빠 옷을 입고 남자 아이로 일하는 것이었어요.” 이 어린아이가 처음 한 일은 벽돌 만들기와 나르기였습니다.

나디아는 벽돌을 나르다가 쏟아버려 엄청 얻어맞았습니다. 그러고는 우물을 파고 채소를 파는 등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몸이 성숙해지면서 본모습을 숨기기는 더 힘들어졌습니다. 생리를 시작했을 때는 들킬까봐 두려웠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감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비극적이지만, 그것은 바로 ‘왼쪽 얼굴에 난 흉터의 활용’이었습니다.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전방뿐 아니라 후방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후방에는 여성이 삶을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그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상실과 잔혹함 속에 있지만, 마찬가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용기와 창조력을 뿜어내기도 합니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나름대로 갖췄다고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노엄 촘스키는 다른 책에서 “여성은, 특히 빈곤할수록, 돌봐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도 창조적이고 능동적입니다. 남자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놓이면 마약이나 알코올 따위에 빠지지만.”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성 차별을 바탕으로 삼는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려고 많은 이들이 애쓰는 까닭이 여기에 있나 봅니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여성이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모두 행복하답니다. 하하.’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이 존재들을 얽어매 놓고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겠지요.

<우리가 희망입니다-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아름다운 약속>(자이납 살비 지음·권인숙 김강 옮김)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콩고민주공화국, 콜롬비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르완다 여섯 나라에서 일어난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상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나

전쟁터는 그렇다 치고, 전쟁이 없는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평온한’ 일상에서 여성은 어떤 모습일까요? “왜 결혼하고 애 낳은 다음 겪는 일은 대놓고 말 안 하지? 어째서 결혼 전에는 보지도 읽지도 못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쓴 책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안미선 글)가 나왔습니다.

“결혼하고 가장 힘들 때는 내가 그림자 같다고 여겨질 때였다. 주말 식구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옆에서 집안일을 하며 혼자 바쁘게 움직이다가, 내가 일을 하는지 마는지, 내가 있는지 없는지, 식구들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그랬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가사노동을 하는 아내는, 밤늦게 퇴근해 돌아온 남편이 잠든 후가 비로소 자기 퇴근 시각이다. 여자가 하는 일은 시시각각 변하는 남의 몸과 마음을 돌보고 책임지는 것이라 진을 빼놓는다. 게다가 남에게서 대가를 받거나 인정받는 일도 아니기에 자신이 쓸모없게 여겨지기도 한다.”

“내 시간은 마지막이다. 남편의 잠과 집에까지 가져온 일과 약속과 결혼식 같은 것 다음에, 가족 행사와 챙겨야 할 대소사 다음에, 아이의 병과 기분 다음에, 집안일과 또……. 어떨 때는 신데렐라 같다. 할 일만 다하면 무도회에 가도 된다고 덧없는 약속 받고선, 이것만 다하면 이것만 다하면 하고픈 것 하겠다고 혼자 다급해진.”

“엄마란 모름지기 가족 위해 몸뚱이 헌신하고 자기 위해선 한푼 한 시간 쓰지 못하고 죽자사자 자식 성공이 내 성공이요 가문의 영광이 내 영광이라. 그러니 엄마 노릇을 누가 완전히 해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죄책감에 빠져든다. 뼈 빠지게 일해도 살림 타박 한 소리에 쪽을 못 쓰고 자식 안 되면 가족 눈총 한몸에 받고 돌아서서 ‘그래 내 잘못이야’ 제 가슴 탕탕 치는 것이다.”

글쓴이 말처럼, 글쓰기가 여성에게 ‘다이너마이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 지금 모습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터져버리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우리가 희망입니다>와 마찬가지로 쉽게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여성 억압을 보는 대표 이론은 무엇일까

그리 쉽지는 않은 책, 그렇다고 아주 어렵지도 않은 책 <성 정치학>이 있습니다. 표지에는 대충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여성해방이 길고 지루한 싸움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싸움이다. 미래는 세계의 질서를 다시 볼 것을 요구한다. 여성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서 말이다. 인간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너무나 멋진 작업이다!”

<성 정치학>은 1970년 케이트 밀렛이 쓴 논문 <Sexual Politics>를 김전유경이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논문은 출판되자마자 크게 눈길을 끌면서 페미니즘 운동의 든든한 이론적 토대가 됐다지요.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여성 억압과 가부장제에 대해 에두르지 않고 곧바로 날 세워 비판하는 책이랍니다.

우리나라에서 이 책 번역과 발행이, 원작 출판 39년 만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남녀를 떠나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살고픈 이라면, 지금이라도 이 책을 곁에 두면 좋다고들 하는 까닭은 또 무엇일까요? 저도 아직 이 책은 읽지 않았습니다만.(어쩌면 한꺼번에 다 읽을 수는 없고, 두고두고 뜯어 읽어 먹어야 하는 책인 것 같기도 합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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