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떤 시인에게서 ‘겨울이 되면 풀들이 다 말라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시인과 흉허물 없이 말해도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아무 말 않았습니다만, 아무리 춥고 메마른 겨울이어도 풀이 죄 죽지는 않지요.

따뜻한 양지 바른 데 바람이 몰아치지 않는 곳에는 겨울에도 풀들이 싹을 내밀고 잎을 틔웁니다. 또 그런 자리는 낙엽 덕분이든 아니면 지형 때문이든 물기도 촉촉하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겨울에도 자랄 조건이 되면 자란다 이 말입니다.

멀리를 보면 실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가까이를 봐야 실체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높이 들어 멀리 산을 보면 거기서 파란 풀을 볼 수 없습니다. 그냥 이미지만 머리에 남겨집니다. 그러나 고개 숙여 눈 앞 뜨락을 훑어보면, 거기에는 뚜렷한 실체를 가진 파릇한 풀이 있습니다.

이런 들판과 산에서는 멀리 눈길을 둘수록 실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13일, 양산 통도사 들어가는 길머리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이 풀들의 푸른 빛이 아주 장하기만 했습니다.낙엽 수북하게 쌓인 가운데에 이렇게 풀들이, 마치 민란이라도 일으키는 듯이 한꺼번에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여린 새순이 조금은 안타까웠지요.


겨울철에 이리 장한 푸른 풀들을 들판에서 눈에 담고 나서,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 말씀드린 대로, 멀리 떨어진 데보다 가까운 데에 더 많이 눈길을 돌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공력에 힘입었기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돌려보니, 사람 사는 구체 정황과 나무와 풀들 살아가는 모습이 좀더 보이더라는 얘기입니다. 옛날에는 옆집에서 누가 나와도 그저 사람이겠거니 그냥 넘어갔는데 눈길 꽂고 보니 실감 있는 인간이더라는, 그래서 이웃 같은 느낌이 조금은 더 들었다는…….

물론 당연히 자연도 달라 보이겠지. 전에는 동요 ‘겨울나무’처럼 겨울이면 모든 나무가 딱 멈추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뜨락을 한 번 뜯어보고 나서 달라졌겠지요. 딱한 것 같은 겨울나무도 보면 맨숭맨숭 잎눈과 보풀보풀 꽃눈이, 촘촘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들이 겨울에 열심히 생명 활동을 해서 잎과 꽃을 미리미리 안으로 준비를 한답니다. 겉으로 표시는 크게 나지 않지만.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가을에 낡은 잎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나무가 이런 눈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새 봄에 새 잎과 새 꽃을 밀어올리지 못한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가까이 있는 풀과 나무와 옆집 아줌마 아저씨를 더 눈여겨 들여다보는 경험들을 하다 보면, 멀리 있는 고상한 존재들보다 가까이 있는 범상한 존재들과 더 친해질수록, 이처럼 여러 진실을 마주하는 즐거움이 더욱 커지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싶습니다.(그렇지 않습니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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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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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2.14 23: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hankyung.com/kim215 광파리 2008.12.15 04: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심코 지나쳤던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이렇게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군요.
    잘 읽고 갑니다.

  3.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기록하는 사람 2008.12.15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리도 겨울에 푸르죠.

  4. 모과 2008.12.15 0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산에서 오래 살면서 (양산과 경계선이 있는 동네) 해가 갈수록 초목의 이상 현상을 보았습니다.
    기후가 따뜻해서 한 겨울이 없는 것 같은 부산의 날씨는 봄과 가을이 긴 것 같습니다.
    한 겨울에 아파트 화단에 개나리꽃이 노랗게 핀 것도 여러 해 봤습니다.
    한여름에 지하철 주변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코스모스도 봤습니다.
    부산 지하철[동원역]과 [화명역] 사이의 버스길 가입니다.
    한겨울에 파랗게 돗아 난 풀의 생명력을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시국에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5. 이풀잎 2008.12.18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시골에 들어와 살기 전엔, 겨울 되면 풀들이 모두 말라죽는 줄 알았었습니다. 촉촉한 개울가 양지바른 둔덕이나, 빈 텃밭에 돋아난 겨울 풀들, 고 여리고 파릇한 것들을 감싸안고 있는 마른 풀잎(엄마 풀?)들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눈물겹고도 숙연합니다. 늦가을 햇살이 머무는 논둑에서, 지금까지 대표적인 봄꽃으로 알고있던 민들레와 제비꽃을 보기도 했지요. 우린 학교에서 봄,여름,가을,겨울에 피는 꽃을 배웠지만, 그거 외우는 거 별로 의미 없어요. 식물의 생장은 계절과 꼭 일치되는 게 아니라, 생장조건에 따라 돋아나고 꽃을 피웁니다. 풀들은 여리고 작은 것들일수록 이모작, 삼모작을 하기 때문에 양지바른 곳에서 저런 겨울풀을 볼 수 있지요. 요즘은 온난화 현상 때문에 겨울 풀들이 더 흔하고 무성한 것 같아요. 사진 속 풀은 별꽃 종류인 것 같은데, 저렇게 여린 잎은 나물로도 먹을 수 있답니다. 열 장의 하얀 꽃잎이 마치 별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꽃송이를 클로즈업시킨 사진 한장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