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5) 성산산성

김훤주 2021. 10. 3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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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점령한 신라가 쌓아

수백년 전부터 고적 인정

 

오횡묵 기록서도 '옛 읍터'

가치 관심 가진 흔적 보여

1991년 본격 발굴 시작해

목간·아라홍련 발견 성과

무진정·말이산고분군 등

생태역사관광 연계 가능성도

 

 

오횡묵은 성산산성을 두고 옛 읍터(古邑基)’이고 이름은 조남산(趙南山)’이라 했다. 그러면서 189032일 오전에 올라갔다. 부임 이튿날 읽은 <군지>에는 고적(古蹟)조에 가야국 옛 터(伽倻國 舊墟)’로 소개되어 북쪽 5리 성산 위에 있다. 성터가 완연하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보면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것이 바로 성산산성이다.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

성산산성은 1991년에 발굴되기 시작했다. 성을 쌓은 주체는 신라인이었고 연대는 600년대 초반이었다. 아라가야가 먼저 쌓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나중에 신라가 아라가야를 점령한 뒤 새로 쌓았다. 산성은 대부분 누가 언제 쌓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성산산성은 당시 관직 등이 적힌 목간이 발견된 덕분에 주체와 연대를 특정할 수 있었다.

출토된 목간 308점 가운데 221호 목간은 1500년 전에 이미 신라 행정이 문서로 집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6월에 군대 제의를 마친 성인 남자들이 산성을 쌓으러 가려 했으나 고위직 인사가 갑작스레 죽는 바람에 못 가게 되었다고 한 촌주가 상부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경주뿐 아니라 지방도 법률에 따라 통치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4면 목간도 나왔다. 진내멸(眞乃滅) 촌주(村主)()에 있는() 미즉이지 대사(弥卽尒智 大舍)와 하지(下智)에게 올리는 보고서다. 이타리 급벌척(伊他罹 及伐尺)이 법()대로 한다며 30일 부역을 하고 돌아갔는데 법()으로 따져보니 60일이 맞아서 자기의 어리석음을 두려워하며 아뢰고 있다.

성산산성은 우리나라 고대 목간의 최대 보물창고다. 여태 발견된 목간이 모두 1239점인데 4분의1이 성산산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같은 지명과 보리·피 같은 곡물 이름이 적힌 하물(荷物) 꼬리표였다.

남쪽에서 바라본 성산산성 동문터.

기적 같이 환생한 고려시대 연꽃

성산산성은 오래된 연밥(=연씨)도 간직하고 있었다. 천연 습지에 조성한 인공 연못의 퇴적지층 4~5m 깊이에 연밥 10개가 박혀 있었다. 200958일 찾아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탄소연대측정을 했더니 650년 전~760년 전 고려시대로 나왔다.

닷새만인 133개가 싹을 틔웠고 하나는 포기가 나뉘어 네 개로 불었다. 이렇게 싹은 바로 나왔어도 꽃이 피기까지는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10620일 첫 꽃대가 솟았고 77일 첫 개화가 이루어졌다.

꽃빛은 처음 필 때는 통째 진한 선홍색이다가 아래부터 옅어지기 시작하여 질 때 즈음에는 끝부분만 홍색이다. 고려불화에 나오는 은은한 연꽃 그대로다. 함안군청은 700년 지나 환생한 연꽃을 아라홍련이라 명명했다. ‘아라는 당연히 아라가야에서 나왔다.

북쪽에서 바라본 성산산성 동문터. 오른쪽 푸른 천으로 덮인 데가 연못 자리이다.

고려시대 연밥이 어떻게 조남산 꼭대기 성산산성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마른 땅에 억지로 물을 끌어들여 만든 연못이 아니고 자연스레 물이 고이는 천연 습지를 파서 만든 연못이기 때문이다.

이찬우 생태학 박사는 물억새·미나리와 고랭이·사초 같은 풀과 뽕나무·느릅나무·버드나무 같은 나무는 모두 물을 좋아하는 습지식물이다성산산성 안쪽에서 습지식물이 다수 확인되었는데 이런 산지습지는 상대적으로 희귀한 편이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에서 1910년대 찍은 유리건판 사진,

오횡묵의 기록과 유리건판 사진

성산산성은 1910년대에 찍은 유리건판 사진이 하나 있다. 동문과 남문 사이 어느 지점에서 북쪽을 향해 찍었다. <함안총쇄록>에 적혀 있는 모습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견주어 볼 수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자료다.

오횡묵이 본 성산산성은 이랬다. 성곽은 돌로 만든 성가퀴가 산의 네 머리를 빙 둘러 있고 열에 일고여덟은 흙무더기인데 덩굴풀이 뒤엉겨 있었다.” 내부는 성은 안쪽이 깊숙한데 너비가 활 네 바탕 정도 된다. 활 한 바탕 거리 안쪽 바닥에는 조금 튀어나온 데가 있는데 이미 무덤이 모두 들어서 있다. 어린 소나무와 얕은 모래가 거듭 포개져(累累穉松淺沙) 있는 것이 자손이 없는 형상을 가까스로 벗어났다.” 그리고 북쪽 언덕에는 집(屋子)이 한 채 있는데 그 앞에 농부 한 사람이 방황하고 있었다.”

북쪽 언덕에 집이 한 채 있는 것은 같고 소나무와 모래도 양쪽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반면 성곽을 뒤덮은 덩굴풀과 안쪽에 들어선 무덤은 <함안총쇄록>에만 나온다. 사진을 보면 성곽 위(왼쪽에 조금 보인다)는 덩굴풀 대신 오솔길이 선명하고 안쪽은 무덤들 대신 농경지가 빽빽하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뚜렷하게 이어지는 산길도 눈길을 끈다. 20~30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이토록 달라진 것일까, 오횡묵이 보고도 적지 않았던 것일까?

1939년 10월 17일자 매일신문.

일제도 관심 갖고 고적 지정

성산산성에 대한 관심은 옛날부터 있어 왔다. 1587년 당시 군수 한강 정구가 주도하여 만든 <함주지>에도 가야국 옛 터(伽倻國 舊墟)’고적(古跡)’ 조항에 나온다. “1569년에 장범(張範) 군수가 여기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번에() 금천(琴川)으로 옮겼다고도 덧붙였다. 장범은 1568년 함안군수로 와서 1573년에 임지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일제도 관심을 보였다. 19391017일자 <매일신보> 2늘어가는 보물고적-새로 지정된 것 97기사를 보면 성산산성을 비롯한 산성과 도요지 30군데가 고적(古蹟)으로 지정되고 있다. “910일 전조선적으로 실시한 고적 애호일을 기회로 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여러 가지 사실(史實)을 고적과 천연기념물로부터 찾아내게 하고 영구히 기념 보존하기로 하였던 바 18일자로 새로운 지정을 하기로 하였다.”

해방된 뒤에는 1962년 문화재보호법 제정되고 나서 그 직후인 19631월 최초로 사적이 지정되었다. 성산산성은 이 때 제67호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성산산성 말고 포석정·김해 봉황동 유적·수원 화성·화왕산성·분산성·진주성·서울 사직단 등 124군데가 더 있었다.(2019226일 현재는 사적 제549호까지 나와 있다.)

 

군수가 백성 골탕 먹인 자리

오횡묵도 아마 이런 관심으로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뜬금없이 거기 있는 농부에게 골탕을 먹였다. 지금 관점으로 보면 명백한 직권남용이고 인권 유린이다. 하지만 당시는 반상에 따른 계급 차별과 관존민비(官尊民卑)가 사회를 지배하는 질서였다. <함안총쇄록>에는 농민과 아전 등을 군수가 골리고 괴롭히는 장면이 이밖에도 적지 않게 나온다.

말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리고 물었다. ‘어르신의 성은 무엇이며 여기 살면서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은 조가이고 이씨 묘를 지킵니다.’ ‘나는 서울 사는 사람인데 성안에 명혈(名穴)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밤이 깊은 뒤에 장사지낼 계획이었습니다. 어르신은 이씨 묘지기이니 금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금하지 않고 나를 위해 호장(護葬)을 해주면 반드시 논을 넉넉히 사서 바로 드리겠습니다.’ ‘비록 단독으로 금할 능력은 없지만 무덤 주인한테 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덤 주인에게 알려 금장(禁葬)을 하면 신상에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지인도 나서서 협박한다. ‘저 양반의 세도가 대단해서 허락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이고 허락하면 이씨 묘지기보다 백배는 나을 것이다.’ 그런 끝에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묶으십시오. 그래야 이씨한테 할 말이 있겠습니다.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십시오하는 대답을 받아낸다.

오횡묵은 관문(官門)이 지척인데도 내가 누구인지 멍하니 몰라보았다. 오직 속았다고만 생각하고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 참 순박한 백성(淳氓)이다고 생각했다. 어리석다고 놀리기는 했지만 그 진솔함은 평가했다고 할까.

괴항마을에서 성산산성으로 올라가는 자드락산길.

산성 가는 산길을 아무도 몰랐다니

오횡묵 일행은 산성 오르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성고개를 지나 소괴항에 이르러 조익규(趙益奎)를 방문하였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 우물거렸다. 마을사람을 불러 물었지만 보기만 하고 아무도 가리키는 사람이 없었다. 한 농사꾼이 멀리 가리키며 저리로 가십시오라 했는데 매우 모호하였다. 미심쩍어하는 사이에 길을 잡아 올랐으나 비 온 끝이라 매우 미끄러워 걷기 어려웠다. 산중턱에 와서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았다. 다시 돌아가서 가로세로 길을 오가며 꼭대기에 올랐다.”

군수의 행차인데도 이렇게 헤맸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오횡묵과 동행한 지인 3명은 외지 사람이라 그렇다 쳐도 통인(수행비서) 2명과 관노·방자(심부름꾼)1명씩 거느리고 갔는데도 길을 몰랐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가야국 옛 터옛 읍터는 그 시대 일반 백성들의 일상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고개를 지나 소괴항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대로 갔더니 먼저 신개마을이 나오고 다음에 괴항마을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오횡묵 일행이 오르기 시작한 소괴항은 지금 신개마을인 듯하지만 확정할 수는 없었다. 함안조씨 족보에서 1814년에 태어난 조익규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1890년 당시 생존 여부와 살았던 집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아내지 못했다.

올라가는 산길은 어땠을까? 지금은 좌우로 좁다란 농경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농사를 짓는 데도 있고 묵정이가 되어 있는 데도 있다. 농지가 길가에 있다면 사람들이 늘 다니므로 길을 찾지 못할 까닭이 없다. 당시에는 여기에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길도 제대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산산성 서쪽 성벽 위에 자라나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옛날 군사요충을 이제는 새 랜드마크로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성산산성은 서쪽과 북쪽이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높고 남쪽은 그 다음이며 가운데는 움푹 꺼져 분지를 이루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동쪽으로는 계곡이 나서 아래로 내려간다. 136미터로 높지 않지만 정상에서는 동북쪽으로 함안천이 한 눈에 보인다. 서쪽과 동쪽에서 신음천과 검암천을 끌어안은 함안천은 남강으로 이어지고 남강은 낙동강과 합류한다. 옛적 외적이 쳐들어온다면 이 물길을 거슬러 올랐을 것이다. 함안을 지키는 산성을 둔다면 예나 이제나 여기가 으뜸 적지라 하겠다.

옛날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군사요충이지만 지금 관점에서 새롭게 보면 역사·문화적으로 함안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서 손색이 없는 자리가 성산산성이다. 고대 목간의 최대보물창고라는 역사성이 첫째고 고려 연꽃이 700년 만에 환생한 유일본향이라는 화제성이 둘째며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연출하는 희귀한 산지습지라는 생태적 특징이 셋째다. 이를 제대로 살리는 방향으로 조금만 가다듬어도 성산산성은 함안의 킬러콘텐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높지 않고 야트막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작지 않은 장점이다. 사방을 빙 두른 성곽 안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는 경관과 전망이 모두 그럴싸하다. 무진정·함안읍성·말이산고분군·함안박물관 등 함안의 다른 명소들과 가깝다는 것 또한 썩 괜찮은 미덕이다.

 

경남도민일보 2019710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책자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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