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3) 함안읍성의 130년 전 모습

김훤주 2021. 10. 2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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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은 장대 남쪽은 달구경 명소

동서남북 44

 

서문, 지금 '성고개'에 위치

비밀통로로 쓰다 허물어져

남문은 민관 어울리던 장소

등불 낙화 구경 등 함께해

방 내걸고 치안 살피고

사람 출입 잦았던 동문

북문은 위치 탓 이용 적도

북장대는 군사지휘소·피서지로 활용

무너지지 않은 지과정 남쪽 성벽

 

함안읍성은 1510년 경상도에서 삼포왜란이 터졌을 때 처음 쌓았고 1555년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고쳐 쌓았다. 오횡묵이 함안군수를 지낸 때는 이로부터 330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읍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889421일 부임 행로에 읍성이 나온다. “(무진정 방향에서 오면) 지과정 오른편(서쪽)이 읍성이다. 북문은 오래 전에 무너졌고 지과정 남쪽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동문은 절반쯤 가운데 우뚝 섰는데 파동루(巴東樓)라는 현판이 달렸다. 성 위에 남녀가 빽빽하게 서서 구경하는데 사람성(人城)이라 할 만하였다. 남문 밖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곡성(曲城)으로 들어가니 파남루(巴南樓) 현판이 걸렸다.” 곡성은 성문을 가리려고 반달꼴로 덧쌓은 옹성(甕城)이다.

 

사라진 현교와 새로 생긴 서문

이튿날 아침부터 <군지(郡誌)>를 가져다 여러 볼 만한 것들을 살폈다. 전체 현황을 대략 파악하기 위해서였겠지.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 7003, 높이 13척이다. 여첩(女堞=몸을 숨길 수 있도록 낮게 덧쌓은 담)504개다. 보지(堡池=해자=침입을 막으려고 성 둘레를 파서 만든 못)는 깊이 6, 너비 12척이다. 동남서북 4문이 있다.”

1587년 나온 <함주지(咸州誌)>에도 읍성이 나온다. <군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곽의 둘레를 세 구간으로 나누어 좀 더 자세히 적은 정도가 차이가 난다. “둘레가 7003척인데 남문~북문 4263, 북문~동문 1740, 동문~남문 1000척이다. 높이는 13, 치성(여첩의 잘못)504개다. 해자는 깊이 6, 너비 12척이다. 남동북 3문이 있고 들어올리는 현교(懸橋)를 두었다.”

<함주지> 기록과 달라진 대목도 있다. 첫째, 성문 앞에 있던 들어올리는 현교가 보통 다리로 바뀌었다. 남문 앞에 작은 다리가 있다고 부임길에 나오지만 들어올렸다는 기록은 없다. 어떤 형태를 하고 있었을까? 1890115일 정월대보름에 읊은 시가 단서다. “남문 밖에 나가니 무지개다리가 드리워 있네(去南門外垂虹濱)”라 하였으니 아래쪽과 위쪽이 모두 동근 모양이었겠다. 이밖에 동문·북문 현교도 따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보통 다리로 바뀌었거나 없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서문이 새로 생겨 성문이 3개에서 4개로 늘었다. 서문은 427일 비봉산(飛鳳山)에 올라 읍터를 살필 때 나온다. 비봉산은 동헌에서 서쪽으로 100미터가량 떨어진 야트막한 뒷산이다. “둘레가 5리쯤으로 간간이 무너져 근근이 형태만 갖추었다. 동문과 남문은 우뚝하게 있고 서문과 북문은 허물어졌다.”

서문은 지금 성고개라 하는 데 있었다. 권순강 우리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부장이 논문 경상도 남부 지역 읍성의 축조 양상과 공간 구조에 관한 연구에서 암문(暗門)으로 표시한 부분이다. 암문은 몰래 드나들려고 표시가 나지 않도록 문루를 세우지 않았는데 시나브로 허물어진 모양이다.

오횡묵은 함안읍성 동쪽·남쪽의 성곽 치성들이 허물어져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군수 재직 중 남문루 등을 수리했다. ⓒ경남도민일보 서동진 기자

새뜻한 동문루, 남루한 남문루

이날 읊은 시에도 등장한다. “네 개 성문은 무너졌거나 남았거나 한데/ 떨어진 꿩이 동남쪽에서 공작과 더불어 어슬렁대네(一城四門或墟或存兮/敗雉與東南孔雀共徘徊)”. ‘떨어진() ()’이라는 표현에서 은 실제 꿩이 아니라 치성(雉城)을 뜻한다. 치성은 성 위에서 공격·방어를 손쉽게 하려고 꿩 꼬리처럼 삐져나오도록 쌓은 부분이다. 동쪽·남쪽 성곽의 치성들이 허물어져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모두 허물어지지는 않았다. 산내면(山內面)과 상리면(上里面) 주민들의 줄다리기를 지과정 서쪽 곡성(=동쪽 성곽의 치성) 위에서 구경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1890. 2. 1.)

동문루(=파동루)에 올라서는 한 해 전(1888) 봄에 전임 군수 권동진이 작성한 중수기(重修記)’를 읽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많이 무너지고 망가졌다. 옛 것이 쓸 만하면 그대로 쓰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새로 만들었다. 공사가 끝나 완성이 되니 훤하게 새로워졌다.”

동문루는 멀쩡했지만 남문루는 아니었다. “기울어지고 쓰러지고 벗겨지고 떨어져서(傾側剝落)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수리를 해야 하지만 재물이 축나고 없어 탄식만 늘어날 뿐이다.” 오횡묵은 이듬해 태평루를 먼저 고친 다음 1114일부터 12월 초순까지 관청·동창과 남문루를 중수했다.

 

올라가 즐겨 놀았던 남쪽 성곽

쓰임새는 무엇이었을까? 지어진 목적은 분명 외적 방비지만 군사용으로 쓴 기록은 <함안총쇄록>에 보이지 않는다. 사격 훈련이나 군사 행진이 가끔 있었지만 장소는 성곽이 아닌 교장(敎場=연병장)이었다. 성 위에서 병사들이 경비를 서거나 순찰을 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즐겨 노는 장소로 등장한다. 주로 남문이다. 남녀노소의 구분은 물론 관과 민의 차별도 없었다. 4월초파일 등불 낙화(落花)를 구경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밤중에 읍성 서남쪽 모퉁이에서 남루(南樓)에 오르려고 살펴보니 성중에 노는 무리들이 올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가만히 성의 구석 자리(城僻處)에 갔다.”(1890. 4. 8.) 군수 위세를 내세워 내쫓지 않고 백성들이 좋은 자리에서 보도록 배려한 셈이다.

달밤에 시원한 바람을 쐬러 남쪽 성곽(南城)으로 걸어갔다. 성 아래 민가에서 시를 읊는데 제법 흥이 도도했다. 시를 지어 보냈더니 박용하·박영수·조성호가 서둘러 왔다. 남루가 달구경에 참 좋다고 하여 함께 올라가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었다.”(1890. 6. 14) 관과 민이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루 어울리는 모습이라 할 만하다.

봄을 즐길 때도 봄을 보낼 때도 남성에 올랐다. 1891년의 경우 먼저 봄이 한창인 314일에 “(친구) 석성(石醒)과 함께 남성으로 걸어 나가 시를 읊었다.” 또 여름을 앞둔 329일에는 조회를 하고 나서 석성과 함께 남쪽 성곽에 올라 봄을 보냈다(餞春). 고을의 부로(父老) 대여섯 분이 와서 동참하였다.” 전춘은 4월 여름이 본격 시작되기 전인 3월 마지막 날에 봄날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 여러 가지로 즐기는 세시풍속이다.

공식·비공식 나들이에 나오는 성문도 남문이 가장 많다. 진주 병영과 통영 통제영으로 새해 인사를 갈 때(1890. 1. 10.)는 물론이고 다리밟기를 하러 지과정에 가면서는 동문이 가까운데도 굳이 남문을 지났다.(1890. 1. 15.) 권농(勸農)을 위해 신교동 들판에 나갈 때(1889. 6. 11.)와 의령 사는 선비 문수찬을 찾아갈 때(1889. 11. 12.), 원효암에 치성드리러 갈 때(1890. 1. 22.) 나선 문도 남문이었다.

오횡묵은 함안읍성 남문을 남녀노소의 구분은 물론 관과 민도 차별 없이 즐겨 노는 장소라 기록했다 .  ⓒ 경남도민일보 서동진 기자

실무적으로 쓰인 동문

동문에서는 놀지 않았던 모양인지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파동문에 들어가니 집집마다 등불을 늘어놓아 밤인데도 낮처럼 밝았다”(1890. 3. 15.)거나 파동루에 올라 잠깐 쉬는데 수문장 이유관이 와서 보았다”(1891. 12. 30.)고 했다. 이처럼 동문은 놀이와 무관하게 실무에 주로 쓰인 것 같은데 그나마 남문과 견주면 뜸하게 등장한다.

방문(榜文)은 남문이나 동문이나 똑같이 내걸었다. 세곡을 함부로 쓰거나 빼돌리지 말라는 내용으로 소출을 조사해 조세를 매긴 다음(1889. 11. 15.)이다. “법을 어기거나 조세로 사채(私債술값(酒債)을 갚거나 노름(雜技)을 하거나 조세를 떼어먹는 폐단은 아전이든 백성이든 엄중히 국문하고 감영에 보고하여 유배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들락날락하는 장소였으니 군수로서는 당연히 방문을 붙였을 것이다.

 

높다란 데 자리한 북장대

반면 북쪽과 서쪽 성곽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친구 석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북문 밖으로 나간 적이 한 번 있다.(1890. 7. 3.) 실제로도 자주 드나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지막하기는 해도 산지(山地)에 걸쳐 쌓은 성곽이라 거동하기 불편해서 그랬을 것 같다.

다만 북장대(北將臺)는 몇 차례 올랐는데 거기가 높직하기 때문이지 싶다. 더울 때 시원한 바람과 풍경을 즐기거나 기강이 흐트러진 아전 등을 골탕 먹일 때 활용한 장소다. 장대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기 위하여 성곽 높은 자리에 만든 대를 뜻한다.

더위가 극성인 때에 북장대에 오르니 추운 데에 날아오른 듯하고 맑은 바람에 씻은 듯 시원했다. 또 대가 높아 사방을 바라보니 다시 흥취가 일어 시를 지었다. ‘성 위에 높은 대()가 반공에 솟았네/ 불어오는 서풍에 기대어 나는 신선을 만났네/ 늦더위 지상에 다 자란 새가 있어/ 신선은 되지 않더라도 바다배를 찾아가네.’”(1890. 7. 19.)

“(밤중에) 지과정에서 (나팔수가) 나팔을 부니 관속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물결치듯 바삐 다투어 달렸으나 비어서 아무도 없었다. 이어 북장대에서 나팔을 크게 부니 옮겨갔지만 아무도 없었고, 다시 장터에서 갑자기 나팔소리가 나서 서둘러 돌아왔는데 텅 비어 있었다.”(1890. 4. 9.) 낙지산(樂只山=비봉산 북쪽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짐작됨)에서 내려다보던 군수는 웃다가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이처럼 1890년대의 함안읍성은 고쳐 쌓고 나서 34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성문과 성벽이 많이 허물어져 있다. 또 읍성의 서쪽과 북쪽은 잘 나오지 않는 반면 동쪽과 남쪽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서성은 대부분이 산지이고 북성은 외따로 떨어져 있지만 동성·남성은 평지이고 민가·관아와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횡묵이 동문보다 남문을 더 많이 드나든 까닭은 무엇일까? 옛날 관아에서 중심 건물은 군수가 업무를 보는 동헌이 아닌 임금을 모시는 객사였다. 이런 객사는 측면이 아닌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동문이 아닌 남문으로 해서 들어갔던 것이다.

 

경남도민일보 2019625일자에 실리고 2020년 펴낸 책자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들어 있는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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