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2) 관아 건물과 공간의 재구성

김훤주 2021. 10.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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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따라 그렸더니

선명히 드러난 읍성 진면모

 

옛 모습 전쟁·풍화로 상실

문헌 바탕으로 본보 재현

관광자원 활용 가치도 충분

 

함안읍성 안팎의 조선시대 관아 건물은 6.25전쟁 때 모두 불탔다. 담장·주추·비석 등 돌이나 흙으로 된 것은 타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객사·동헌을 비롯한 몇몇 누대가 이름 정도만 이런저런 그림과 글로 흩어져 있을 뿐이고 사람들 기억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함안총쇄록>을 살펴보니 130년 전 모습을 상당 부분 재현할 수 있었다.

 

군수 부임 행차

오횡묵은 1889421일 함안읍성 동문 밖에 이르러 지과정에 올라 잠시 쉬었다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간다. 다시 태평루를 지나 객사에 먼저 들렀다가 동헌 정청(正廳)에 자리 잡고 부임 행사(=좌기취坐起吹)를 치른 뒤 안팎을 둘러본다.

이 과정에 관아 건물과 공간이 여럿 등장한다. 건물이 많은데다 같은 건물도 동선이 움직임에 따라 묘사나 표현이 흩어져 있기에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다. 해당 기록을 다 모아 건물·공간별로 헤쳐모여했더니 좀 가지런해졌다.

<함안총쇄록>을 따라 재현한 함안읍성과 관아 건물 위치도.

지과정(止戈亭):동문 밖에 있다. 6칸으로 현판이 지과헌(止戈軒)이다.

감옥(囹圄):군옥(郡獄). 동문 동쪽에 있다.

읍장시(場市):동문 앞에 수십 호 인가가 있는 자리다. <군지(郡誌)>에 방목시(放牧市)로 나온다.

교장(敎場):동문 밖으로 광활(廣闊)하다. 무예기술(武技)을 연습한다.

홍전문(紅箭門):남문에서 북쪽으로 활 한 바탕 거리(一武地100미터)에 있다.

삼수정(三藪亭):홍전문에서 북쪽으로 40여 걸음(40여 미터)에 있다. 장시인데 관문(官門=관아 외삼문) 밖이다.

태평루(太平樓):객사 문루로 삼수정 북쪽이다.

파산관(巴山館):객사(客舍). 태평루 북쪽이다. 외삼문·내삼문(모두 일주문)을 갖추었다. 대청(大廳)이 셋인데 가운데가 전패(殿牌)를 봉안하는 장소다.

관아 외삼문:태평루 서쪽에 있다. 성읍 문을 여닫는 의식을 치르는 폐문루(閉門樓). 파릉아문(巴陵衙門) 편액이 있다.

외통방(外通房):파릉아문(巴陵衙門) 북쪽의 작은 문이다.

관아 내삼문:현판이 파릉청사아문(巴陵廳事衙門)이라 되어 있다.

헐소(歇所):관아 내삼문 북쪽에 있고 찾아온 손님이 잠깐 쉬는 방이다. 마루와 방이 1칸씩이다.

사령수직처소(使令守直處所):관아 내삼문 남쪽에 있고 2칸이다.

금학헌(琴鶴軒):군수가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이다. 축대 위에 있고 동향(東向)이다. 10칸인데 큰방이 3칸이고 대청이 6칸이다. 방문 위 들보(門楣)에 남덕정(覽德亭), 뒤쪽 처마(堂之後軒)에 은선대(隱仙臺) 현판이 있다.

통방(通房):통인들이 있는 방이다. 동헌 대청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통인은 군수 수행 비서로 보면 된다.

금천재(琴川齋):4칸으로 통방 서쪽 뒤에 처마가 잇달아 있다. 공문 등을 모아놓는 책실(冊室)이다.

급창직소(吸唱直所):동헌 남쪽에 있다. 급창은 군수의 명령을 큰 소리로 되풀이해서 알리는 확성기 구실을 한다. 직소는 근무처를 뜻한다.

저치고(儲置庫):쌀 창고로 동헌 마당 남쪽에 있다.

호적고(戶籍庫):동헌 북쪽에 있다.

전적고(田籍庫):동헌 북쪽에 있다.

내아(內衙):동헌 남쪽에 있고 동향(東向)이다. 18칸으로 장려(壯麗)하다. 닫아두고 살지 않아 거미줄과 이끼가 끼어 있다.

'함안공립보통학교  9년  3월 졸업생' 이라 적혀 있다. 9년은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 9년인데  1920년이다.  학교로서는 8회 졸업식 사진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함안 객사 파산관으로 짐작된다.  객사만이 저처럼 우람한 둥근 기둥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함안초등학교

수령의 읍터 몸소 살펴보기

오횡묵은 부임 엿새 뒤인 27일 통인과 관노를 1명씩만 데리리고 읍터 전반을 살펴보았다. 부임 당일 묘사되지 않았던 건물과 장소들이 많이 나온다. 둘을 합했더니 읍성 안팎의 건물·공간이 대부분 재구성되었다.

 

향사당(鄕射堂): 양반들이 고을 업무를 집행하는 향청(鄕廳)이다. 객사 뒤에 있는데 크고 아름답다. 가운데에 청이, 좌우에 방이 있다. 동방은 좌수가, 서방은 별감들이 쓴다. 청 북쪽 벽 닫집()에 향안(鄕案=양반 명단)이 들어 있다고 한다. 좌수는 향청의 우두머리, 별감들은 2인자다. 서문로를 따라 객사 뒤를 거쳐 향사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

소리처소(所吏處所): 향사당 마당 서쪽에 있다. 소리는 향청의 3인자로 보면 된다.

양무당(養武堂):향사당 동쪽 담장 밖에 있다. ·우천총(左右千摠)이 근무한다. 천총은 퇴직 아전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무관이다.

포수청(砲手廳):양무당 앞에 있다. 앞길이 동문으로 이어진다. 포수는 총잡이이다.

집사청(執事廳):양무당 앞에 있다. 앞길이 동문으로 이어진다. 집사는 행사에서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지과정:동문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

감옥:동문에서 보면 지과정 남쪽에 있다.

동창(東倉): 남문에서 북향하여 활 한 바탕 거리로 길 왼편에 있다. 통제영에 바치는 곡식을 되질하는 자리(統穀所捧).

이청(吏廳):동창 위()쪽에 있다. 아전들이 근무하는 장소다. 현판은 파릉연방(巴陵椽房)이다.

파릉군사(巴陵郡司):동창 위()쪽에 있다. 호장의 근무처다.

관청(官廳):파릉군사와 이청 사이에 있다. 먹을거리를 공급한다.

형방청(刑房廳):관청 북쪽에 있다. 추소(秋所)라는 현판이 있다.

관노청(官奴廳):형방청 서쪽에 있다. 폐문루(閉門樓)=관아 외삼문의 오른쪽이다. 관노는 군수를 위한 잡일 심부름꾼이다.

도서원청(都書員廳):현판이 전제소(田制所). 길 오른편(동창 맞은편)에 있다. 서원은 마을별 고을 업무 집행 책임자다.

백화당(百貨堂):장교가 근무하는 장청(將廳)이다. 전제소 동쪽에 있다.

한강 정구 비각:삼수정 남쪽에 있다.

유애비(遺愛碑):(한강 정구 비각에서 볼 때) 길 북쪽에 있다. 선정비들이다.

군기고(軍器庫):태평루 동쪽 50걸음(50미터)쯤에 있다.

사령청(使令廳):태평루 서쪽에 있고 장방(杖房)이라 한다. 명령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이 사령이다.

태평루에 대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1929년 고건축물 목록의 보고 내용. "전면 4칸 4푼"에 "측면 2칸 4푼 5리"인데, "무너져 쓰러질까 우려되고 보존이 어려운 상태" 라 적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새 군수의 조영

오횡묵은 1890년 가을과 겨울에 크게 공력을 들여 태평루를 새로 짓다시피 중수했다. 남문루·동창·관청·장청·감옥 등도 고쳐지었다. 반면 새 건물은 짓지 않았다. 책실 이름을 금천재에서 중향관(衆香館)으로 바꾸거나 마당에 못을 파고 정원을 조성하는 데 그쳤다.

계단 아래에 작은 못을 파고 어린 벼 묘를 가득 심었다.”(1889.5.16) 계단은 축대에 딸려 있는 것이다. <함안총쇄록>에서 축대 위에 지은 건물은 동헌뿐이다. 동헌 앞에 작은 못을 하나 만든 것이다.

사계화를 관원(官園)에 심었다.”(1890.5.16) “서원(西園)에 사계화 한 그루만 꽃을 피웠다.”(1890.10.20) “중원(中園)에 꽃이 피었다.”(1892.3.18) “화원(花園)에서 산보를 했다.”(1892.3.19) 관원·서원·중원·화원이 제각각 다른 것 같지만 맥락을 보면 동일하다. 동헌의 서(西)쪽이면서 중향관과 동헌 가운데() 있는, () 피는 관()아 정원인 것이다.

위치가 특정되지 않은 건물·공간도 나온다. 무부청(巫夫廳망향대(望鄕臺북장대(北將臺동정호(洞庭湖) 넷이다. 무부청은 객사에서 조곡례(朝哭禮)를 하고 무부청에 가서 상복을 갖추어 입었다”(1890.5.5)는 데서 객사 근처로 짐작된다. 북장대는 대가 높아 사방을 바라보니 다시 감흥이 일어 시를 지었다”(1890.7.19.)고 한 데 비추어 북쪽 성곽과 서쪽 성곽이 마주치는 가장 높은 자리로 짐작된다. 동정호는 북장대에 올라 동정호를 바라보았다”(1890.12.1)고 했으니 북문 가까이 있는 연못이다. 망향대는 오후 5시 넘어 올랐다가 저물어서 돌아온(1890.8.28) 장소인데 다른 단서가 없어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여 130년 전 함안읍성 안팎에 있던 관아 건물들과 공간을 종이 위에서나마 복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크기와 형태는 <함안총쇄록>에 적혀 있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적지 않게 허술하다.

그렇다고 보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먼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던 최초라는 의미가 하나 있다. 둘째는 나중에 일대를 발굴하여 옛 모습을 되살리려 할 때 다시 자료를 되풀이 뒤적이며 살피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또 관아 건물과 공간에 대한 옛날 기록이 이처럼 상세한 경우가 드문 만큼 적당한 장소를 골라 모형을 갖추어 놓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고 적절한 해설을 곁들이면 지역 역사에 대한 이해도 돕고 작으나마 관광 자원으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경남도민일보 2019618일자에 실리고 2020년 펴낸 책자 <함안총쇄록 답사기-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들어 있는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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