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함안총쇄록 답사기 (6)세시풍속 1

김훤주 2021. 11. 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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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줄 엮어 5000명 힘겨루니

천지가 들썩들썩

 

줄다리기로 그해 작황 점쳐
면민 25% 참가해 장관 연출
승패 떠나 놀이 즐기기도

 

오횡묵은 역시 기록의 달인이었다. 여태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았던 당시 풍속을 <함안총쇄록> 곳곳에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오횡묵은 자기가 봤을 때 새롭거나 흥미로운 것을 자세하게 적었다. <함안총쇄록>에 적혀 있는 당대 세시풍속을 보면 지금 우리한테 잘못 알려진 것도 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도 있다. 바로잡고 고치거나 새로 되살려야 할 것이 그만큼 된다는 얘기다.

 

복날에 팥죽을 먹다

팥죽은 동짓날에 쑤어 먹는다. 지금도 그렇고 <함안총쇄록>에서도 그렇다. “팥죽을 끓여 삼반관속에게 나누어 먹이고 동지음을 지었다.(煮豆粥 頒饋三班 作冬至吟)”(1892. 11. 3.) 삼반관속은 관아에 딸린 아전·장교과 관노·사령들이고 동지음은 요즘 말로 동짓날 기념시쯤 된다.

    “여느 해처럼 붉은 팥죽으로 여귀(厲鬼)를 쫓고

     사방에서 보고 있는 삼반관속을 불러 같이 맛보네.”

여귀는 억울하게 죽어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인데 옛날 사람들은 이들이 돌림병을 일으킨다고 여겼다.

 

그런데 깜짝 반전이 일어난다. 복날에도 즐겨 먹었던 것이 바로 팥죽이었다. 우리는 옛날에는 복날이 되면 주로 개장국을 끓여먹었다고만 여긴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먹을 것이 많지 않았다. 모내기를 마치고 더운 여름이 되었을 때 기력을 보충해야 하는데 소는 논밭을 갈아야 하므로 손댈 수 없고 대신 만만한 개를 잡아 보신탕을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함안총쇄록>을 보면 복날에 가장 많이 먹은 세시음식은 개장국이 아닌 팥죽이었다.

 

팥죽을 먹었던 까닭은

복날 팥죽을 먹은 기록은 여러 곳에 나온다. 1889년 초복을 보면 관아에 있는 손님과 통인들에게 팥죽을 베풀어 다함께 실컷 가절(佳節)을 즐겼다.”(1889.6.16.) 이듬해는 초복(1890.6.2.)점심으로 팥죽을 관아 손님과 삼반관속에게 나누어주었고 중복(1890.6.12.)에도 팥죽과 떡을 관아 소속들에게 나누어 먹였다.” 이태 지난 뒤의 말복(1892.6.24)에도 팥죽으로 호궤(犒饋)했다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팥죽을 그냥 그대로 먹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한 사발 얼음 쟁반 붉은 팥죽이여(一椀氷槃紅豆粥)”라는 한시(1890.6.2.)가 나오는 것을 보면 지금 여름철에 먹는 팥빙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처럼 복날에 팥죽을 먹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추울 땐 염병을 물리치고 더울 땐 더위를 물리치니

      색은 불그스레하고 맛은 달콤하네

      오늘 아침 한 대접에 소갈증이 사라지니

      황매우(장맛비)에 젖는 것보다 나은 듯하네.”

예로부터 팥죽의 붉은색은 액을 막는 상징이었다.

 

복날에는 곤드레만드레?

오횡묵은 또 복날에 술도 마셨다. 안주는 닭고기였다. 189062일 초복날 저녁에 해가 서쪽에 있을 때 닭을 삶아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하삭지음(河朔之飮)을 본받았다고 했다. ‘하삭지음은 중국 후한 말 유송(劉松)이라는 사람이 하삭 땅에서 원소의 자제들과 삼복에 밤낮으로 술자리를 벌인 옛 일에서 나왔는데 피서를 위하여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서울은 복날 차림표가 달랐다. 1891년에는 초복이 68일이었는데 이 때 오횡묵은 서울에 있었다. “막걸리(白酒개장국(狗湯돼지고기(豬肉쌀밥과 참외 등속을 소내(所內)(공상소(工桑所) 내부를 말한다. 공상소는 왕실 직영 뽕나무 농장이다. 오횡묵은 여기 실무책임(감동=監董)도 맡고 있었다)의 비장 이하 수직 군사들에게 보내어 먹였다.” 팥죽이 빠지고 개장국이 들어가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살짝 궁금해졌다. 복날에 개잡는 풍속이 서울을 비롯한 중부 지역에만 있고 남부 지역에는 없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난 2016년 3월 12일 함안군 칠원읍사무소 앞 도로에서 열린 '삼칠 민속줄다리기' 행사 모습. 삼칠 민속줄다리기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경남도민일보

지금은 사라진 함안의 줄다리기

지금 줄다리기를 행하는 고장은 많지 않다. 무형문화재로 올라 있는 줄다리기는 경남의 경우 창녕 영산줄다리기와 의령 의령큰줄땡기기 두 개뿐이다(창원 진동줄다리기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 전국으로 넓혀보아도 충남 당진의 기지시줄다리기와 강원도 삼척의 삼척기줄다리기 둘이 더해지는 정도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줄다리기가 일부 특정 지역에서만 행해졌던 민속놀이로 여기는 까닭이다. 그런데 130년 전에는 함안에서도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단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옛날에는 함안을 비롯한 더 많은 지역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줄다리기는 <함안총쇄록>에 세 번 나오는데 처음인 189021일이 가장 자세하다. “산내(山內)면과 상리(上里)면은 줄다리기로 승패를 가려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데 이는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다. 이 날 지과정 서쪽 곡성(曲城)에 자리를 정하고 관전하여 즐겼다.”

 

줄다리기 승패에 목숨을 걸다

장년과 젊은 사람들이 4000~5000명 모였다. 두 면의 사람들이 남북으로 서로 나뉘어 새끼줄을 동네마다 가져와서 합하여 하나로 묶어 새끼줄을 고리지어 연결하였다. 저마다 비늘처럼 차례로 서서 새끼줄을 잡는데 흡사 개미가 붙고 벌이 모여든 것 같았다. 높은 함성으로 힘을 합쳐 팽팽히 끌어당겨 기세가 올라가자 영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당시 함안 전체 인구가 2만 안팎이었으니 4000~5000명이 모였다면 엄청난 규모였다.

한 해 농사가 걸린 행사다 보니 죽기 살기로 매달렸고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한창 무르익었는데 어떤 사람이 다리가 줄 아래 눌려 문드러질 지경이 되었다. 끌어내어 구해야 했기에 내가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에 사람들이 파도처럼 달아나고 별처럼 흩어지니 다리가 눌린 사람이 지면에 드러났다. 옆 사람이 도끼로 줄을 끊어 끄집어내었으므로 죽지는 않았다.”

 

이를 본 오횡묵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머리를 맞대고 싸우는 놀이지만 대결에 나서는 장면과 이기려고 분발하는 기세는 전쟁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비록 타는 불과 끓는 물에도 달려가고 화살과 돌도 피하지 않아야 할 텐데 어찌 나팔 한 번 불었다고 저리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는가? 지금 위급한 일이 있으면 저들을 모두 몰아 써야 할 텐데 장차 어떻게 믿겠는가?” 신분 구별이 엄연했는데다 위에서 다스리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여기나 보다. 안위를 걱정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라 제대로 부릴 만한 깜냥이 안 된다고 한탄하는 지배자의 모습이다.

두 번째인 1891115일 정월대보름의 일기에는 장소가 명시되어 있다. “상리·산내 두 면의 백성들이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였는데 지난해와 같이 지과정 앞에서 내기를 걸었다.” 지과정 앞은 군사들이 무예기술을 연습하는 광활한 교장(敎場)이 된다.

상리가 이겼고 이긴 쪽이 줄을 모두 갖는 것이 전례다. 그런데 산내 사람들이 주려고 하지 않아 해가 지도록 붙들고 쉬지 않고 다투었다. 내가 줄을 잡고 양쪽을 불러 승부에 집착하지 말라고 꾸짖고는 도끼로 한가운데를 끊어 나누어 갖도록 했다.”

이듬해인 1892년 정월대보름의 줄다리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상리·산내 두 면이 줄다리기 내기를 했다. 연이어 힘을 써서 서로 당겨 굴복시키려 했으나 어느 쪽도 끌어당기지 못했다. 포시(哺時=오후 3~5)가 되어 어두워지자 여럿이 다칠까봐 걱정되어 그만두고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지금 함안군 칠원읍에서는 해마다 삼칠민속줄다리기가 열리고는 있다. 칠원읍·칠서면·칠북면 등 삼칠 지역은 당시 칠원현으로 함안군과는 별도로 독립되어 있었던 행정 단위였다.

 

달밤에 줄다리기를?

이와는 다른 줄다리기도 기록되어 있다. 1890년 정월대보름 달밤이었다. 오횡묵은 이날 통인배·호적수(胡笛手) 등과 더불어 남문을 걸어나왔다. “달빛이 정말 아름다웠다. 노는 무리(遊戱之徒)가 성에 가득히 서로 어울려 줄다리기 놀이(挽索之戱)를 하고 있었는데 역시 장관이었다.” 한 해 풍흉을 걸고 죽자살자 덤벼드는 줄다리기도 있지만 이와는 별도로 놀이 삼아 하는 줄다리기도 있었나 보다.

정월대보름에는 다른 세시풍속도 있었다. 으뜸은 예나 이제나 달맞이였다. “달맞이(迎月之遊)는 없는 마을이 없다. 계수나무 그림자(桂影)가 동쪽에서 나오자 늙은 농부들이 서로 축하하며 모두 금년에는 반드시 풍년이 들 징조라고 한다.”(1890.1.15.) “조금 뒤에 얼음처럼 맑고 차가운 달이 올라왔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원만하면서 짙은 황색이었다. 모두들 근년에 정월대보름 달을 처음 보았으니 마땅히 제일 좋은 징험이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한 해 뒤인 정월대보름은 날이 흐리다가 맑아졌다. 줄다리기를 마치고 조금 있으니 달이 떠올랐던 것이다. 꽉 찬 보름달을 보고 오횡묵은 농사가 풍년이 들 것으로 점쳤다. 그러면서 송교(松膠)와 지포(紙砲)로 입과 눈을 즐겁게 했다. 송교는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려웠는데 잣술이 아닌가 싶다. 지포는 실패에 실을 수십 겹을 두른 다음 화약종이로 그 끝을 싼 것을 말하는데  불을 붙여 멀리 던지면 불을 내쏘며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러면서 명절을 헛되이 지내지 않아서 즐겁다고 여겼다.

 

같은 풍물이라도 대접이 달라

액을 쫓고 복을 부른다는 명목으로 정월대보름 전후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풍물을 놀고 금품을 받는 일은 요즘에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마을 단위 모임이 주체인데 이렇게 모은 금품은 대개 공동 경비로 사용된다.

옛날에도 그랬던 모양인지 <함안총쇄록>에 관련 기록이 두 번 등장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오횡묵의 대응이 다르다. 한 번은 놀게도 하고 금품도 주어 보냈지만 다른 한 번은 아예 놀지 못하게 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군북장 상인들과 서재(書齋)들이 한 해 경비를 동냥하려고 풍물과 복색을 갖추고 읍내를 한 바퀴 돌고는 관아 마당에서 놀기를 바라므로 하는 수 없이 놀게 하고 돈 10, 백지 1(=100. 옛날에는 엽전과 함께 반다지에 보관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 종이였다) 3말을 주었다.”(1890.1.17.)

창원 광산(匡山) 백련사(白蓮寺=지금 광산사)의 스님 하은·경담·대성이 경비를 동냥하는 일로 관청 마당에서 먼저 한 번 놀면 읍내를 모두 두루 다닐 수 있다고 간청하였으나 민폐를 염려하여 허락지 않았다.”(1890.1.26.)

군북장 상인 등과 백련사 스님 사이의 차이는 딱 하나다. 한 쪽은 자체 역량으로 읍내를 돈 다음 마지막에 관아를 들렀지만 다른 한 쪽은 관아에 먼저 들른 다음 그 위세를 등에 업고 읍내를 돌려고 하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격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알려주는 사례라 하겠다.

 

경남도민일보 2019717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책자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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