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3월 끝자락엔

봄을 보내며

아쉬움 달랬다네

 

여름 앞두고 '전춘' 풍속 즐겨

형식 자유롭고 여러 번 열기도

전문 재인 불러 재주 놀음 관람

먹을거리 더해져 풍성한 행사로

 

세시풍속에 대한 오횡묵의 기록을 보면 아주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동작이나 행동은 물론 주변 경관이나 사람들의 반응에 더해 본인의 느낌까지 두루뭉술하지 않고 손으로 만지듯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적었다. 그 속에서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130년 전 당시 우리 지역의 민속 현장을 상세하게 알려 주는 소중한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섣달그믐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의 세시풍속들이 많았다.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수세에 관한 기록들이 <함안총쇄록>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섣달그믐밤 뜬눈으로 새우다

지금 40대 이상이면 어린 시절 '까치설날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어른들의 협박 아닌 협박에 겁을 먹고 쏟아지는 잠을 참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견뎌보려고 애쓴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이날 밤을 뜬눈으로 지내야 복을 받는다는 얘기가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안총쇄록>에는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밤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인들과 더불어 금학당(동헌)에서 섣달그믐날 밤샘(守庚)을 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1889) "지인들과 기생 금란과 한 번 만나 크게 먹었다. 닭이 이미 흐드러지게 울었다."(1891) "지인들과 금란과 더불어 술을 데워 마시면서 갖은 걱정을 없앴다. 조금 있으니 꿩이 소리를 보내 새해를 기쁘게 알렸다."(1892) 멋들어진 표현으로 새해를 맞는 오횡묵이다.

그렇지만 130년 전에도 이미 반드시 지켜야 하는 풍속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890년 섣달그믐에는 "밤이 깊어 손님들이 흩어지고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잠이 오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관아에서 푸닥거리를 하다

요즘 사람들에게 굿과 푸닥거리의 차이를 물으면 다들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굿은 무당이 무악을 울리고 제물을 넉넉하게 갖추어 신을 모신 다음 즐겁게 하여 보내드리는 것이라면 푸닥거리는 잡귀에게 간단한 제물을 주고 주술을 부려서 쫓아내거나 떼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뜻을 알고 나면 섣달그믐에 푸닥거리를 했던 까닭도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될 듯하다.

 

1890년은 "술각(戌刻)에 삼반관속의 제석 문안을 받고 나니 무격배들이 징과 북 등을 갖고 와서 요란하게 한바탕 놀았다. 전례에 따라 물건을 내려주고 평년과 같이 놀면 안 되니 멈추어 물러가라고 분부하였다." 1891년과 1892년에도 관아에서 제각각 푸닥거리패(儺隊)와 무부들(巫夫等)이 푸닥거리(儺戱)를 했고 물건을 주었다고 적었다.

이런 푸닥거리는 관아에서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오횡묵은 189213일 밀양으로 가면서 이렇게 적었다. "지나온 곳마다 푸닥거리(儺戱)를 했다. 거리마다 하지 않는 데가 없었으니 세시풍속이 그러하다." 귀신을 몰아내는 데는 민과 관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다.

 

섣달그믐밤 귀신을 묻다

섣달그믐밤 귀신을 묻는 매귀희(埋鬼戱)라는 놀이도 있었다. 옛날에는 특히 돌림병의 경우 귀신에게서 온다고 여겼다. 변변한 치료약이 없었던 당시는 돌림병은 바로 죽음이었다. 제사 지내줄 사람이 없는 무주고혼 또는 억울하게 죽었거나 비명에 횡사한 영혼의 해코지를 막기 위해 나라에서 나서서 어르고 달랬던 것이다.

매귀희에 대해서 오횡묵은 이렇게 적고 있다. "돈 열 냥, 백지 두 속(=100), 쌀 서 말, 북어 한 쾌(=스무 마리), 대구 세 마리, 막걸리(白酒) 한 동이를 내려주었다. 나누어 먹더니 내아(內衙)에 들어가 한바탕 소리를 내고 육청(六廳)에 가서도 그렇게 하였다. 대체로 해마다 하는 병마를 물리치는 일(辟退癘魔)이라 했다."

 

18891230일 밤 동헌 앞마당에서 귀신을 파묻던 장면을 기록해 놓은 글은 당시 사람들의 표정과 소리를 그대로 되살려 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다. 매귀희 놀이패는 이런 연행을 한 다음에 오횡묵에게 금품을 받았다.

"(동헌에 촛불을 켜고 있는데) 갑자기 횃불과 청사초롱이 켜지더니 돌층계 아래 마당이 휘황하였다. 관속들의 정월초하루(正朝) 문안이 끝나고 바로 북···생황 소리가 났다. 어린아이 서른 명 남짓이 부르고 답하며 들어오고 뒤이어 장정 수십 명이 들어와 제각각 장기에 따라 넓은 마당에서 쇠악기와 가죽악기가 서로 번갈아들도록 연주를 하였다.

책상다리를 하였다가 펄쩍펄쩍 뛰곤 하는 가운데 특히 덩치 큰 한 사람이 얼굴에 탈을 쓰고(面裏偎儡, 외뢰(偎儡)는 원래 꼭두각시 인형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꼭두각시 얼굴에 씌우는 탈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했다. 게으른 소리로 거만한 모습을 짓기도 하고 엎어지는 척하면서 중풍을 맞은 흉내를 내기도 하였다. 몇몇 예쁜 아이가 어른 어깨 위에 똑바로 서서 손을 들어 나풀거리며 춤을 추면서 나아가고 춤을 추면서 물러갔다. 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구경하면서 모두들 배를 잡고 실성을 하였다."

 

매귀희는 우리 지역 오광대의 시원

노성미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부교수(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함안총쇄록>에 나오는 '매귀희' 부분을 두고 "낙동강 서쪽 통영·고성·사천(가산진주·김해·마산 등에 전해지는 오광대들의 시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라 밝혔다.

노 교수는 "'매귀희'를 경상도 지역말로 '매구놀이'라 하는데 시골 탈춤인 이 매구놀이에 도시 탈춤인 산대놀이가 영향을 입히면서 새로 생겨난 놀이가 오광대"라며 "전국을 떠돌며 연행하던 산대놀이 패거리가 밤마리에 와서 노는 것을 보고 매귀희 놀이패가 이를 변형시켜 오광대를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밤마리는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일대를 이른다. 경남 지역 여러 오광대가 여기서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낙동강과 회천·덕곡천이 합류하는 밤마리는 옛날 물길을 따라 갖은 물산이 집결하는 교통 요충이었다. 그래서 전국 각지 여러 놀이패들도 여기에서 연행을 많이 하였다. 서울에서 생겨난 '산대놀이'가 여기 밤마리에서 경남 여러 지역에 있던 토착 탈춤놀이를 만나면서 지역 오광대들이 생겨났다는 얘기다.(합천밤마리오광대도 있는데, 마산오광대와 마찬가지로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통영·고성·가산은 국가 무형문화재로, 진주·김해는 경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노 교수에 따르면 그렇게 보는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매귀희가 귀신을 묻고 병마를 물리치도록 비는 내용인데 오광대가 이를 이어받아 종교적인 제의가 많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함안총쇄록>의 매귀희 묘사에 나오는 탈춤놀이 춤사위가 오광대에도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낭만적인 3월의 마지막 날

세상에 봄을 맞아 즐기는 꽃놀이는 있는 줄 이미 알았지만 여름을 앞두고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는 전춘(餞春) 풍속이 있는 줄은 까마득하게 몰랐다. 옛날 삶이 특별히 더 낭만적이고 지금 삶이 더 팍팍한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어쩌다 이런 멋진 풍속이 소리도 없이 사라졌을까 싶다. 전춘은 형식이나 내용이 특별하게 정해져 있는 대신 그때그때 사정이나 기분에 맞추어 마음대로 펼치면 되는 음력 3월 마지막 날의 자유로운 세시풍속이었다.

1891329일이다. 30일이 없는 음력 3월이었다. "아침조회를 한 다음 지인과 남성(南成)에 올라 전춘을 했다." 이날 지은 시에서 한 구절을 가져왔다. '흩날리는 버들개지는 천 가닥 실로도 지탱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꽃잎은 백만금으로도 멈출 수 없네.'

 

차수 변경도 가능했다. 이날 오횡묵은 이어서 양사재에 들렀다가 점심 무렵 신교촌 구안일(具安逸)의 초당에 들어가 따라온 수십 사람과 함께 2차 전춘을 했다. 처음에는 술과 안주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수리(首吏) 조기선(趙其宣)이 집에서 술과 떡을 푸짐하게 차려왔다. 오횡묵은 "처음부터 술을 마시려 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오늘의 정사는 이것이니 어찌 술을 보내올 사람이 없겠는가?" 하였다.

재인 놀음 보면서도 봄을 보내고

전문 재인(才人)들의 재주 놀음은 전춘을 풍성하게 하는 구색 가운데 하나였다. 1890330일 오횡묵은 읍성 동문 앞 지과정 앞 광활한 마당에서 땅재주와 줄타기를 여럿이 함께 즐겼다.

"재인 의령 박인복(14)이 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모인 사람들이 모두 한 번 보기를 원하였다. 기둥을 세우고 줄을 걸었다. 먼저 박인복에게 땅재주를 부리게 하였다. 한 자 남짓 작은 아이가 문득 몸을 뒤집으니 나비가 바람에 날리듯 제비가 오르내리듯 하였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뒤집어졌다가 엎어지고 하는 모양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재인 진주 서계영(15)의 재주는 인복과 백중하지만 숙련은 버금이었다. 또 줄타기(索戱)를 시켰더니 놀고 걷고 달리는 것이 넘어지고 거꾸러지고 기울어지고 엎어져서 보는 사람을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였다. '공중을 오르고 허공을 밟는다(凌空步虛)'는 말은 오히려 기이함을 비유하기에 부족하였다. 참으로 나이는 어리지만 으뜸가는 재인들이다."

오횡묵은 이 재인 둘과 옆에서 장단을 맞춘 창부(唱夫) 하동 이형진(17)에게 상으로 돈 열 냥을 주었다. 본인뿐 아니라 고을의 여러 백성들도 두루 함께 즐겼기에 이렇게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오횡묵에게는 석성(石醒)이라는 지인이 있었다. 이날 다른 전춘 자리에 가느라 이 놀음을 보지 못했는데 이튿날 돌아와서는 다녀온 자랑을 하였다.

"시로 이름난 다섯 사람과 정자 주인 예닐곱이 함께 봄을 보내는 시를 짓고는 개를 삶고 잉어로 회를 떠서 실컷 먹으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네."

 

그러자 오횡묵은 바로 타박을 놓았다. "전춘시를 짓는 것은 다반사지만 나는 어제 지과정에서 재인들의 놀음으로 봄을 보냈다네."

그러고는 또 시를 지었는데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 '이처럼 공연히 지는 꽃(落花)에 이웃이 되었네/ 헤어지는 아쉬움은 방초(芳草)의 초록을 이기지 못하고.' 저무는 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무리 태산 같아도 짙어오는 풀잎은 그것을 타고 넘는다는 말이겠다.

 

경남도민일보 2019724일자에 나가고 2020년 펴낸 책자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실린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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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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