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씨네 돌담 감나무밭 언덕

범상찮다 싶었더니 성벽이라네

 

산지 중심으로 자취 뚜렷

민가에도 일부 형태 유지

잡초·흙만 정리해도

옛 모습 회복 충분

 

1510년에 처음 쌓고 1555년에 다시 쌓은 함안읍성은 오횡묵 군수 시절에 이미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오횡묵이 1889422일 읽은 <군지>7003척이라 적혀 있고 닷새 뒤 비봉산에서 내려다보며 "넉넉잡아 5리 정도(洽爲五里許)"라 했던 많은 구간이 그랬다.

다시 13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다른 지역 사람들은 물론 함안에 사는 사람들조차 함안읍성이라 하면 대부분 무너지고 허물어진 정도를 넘어 거의 없어졌다고 여기고 있다.

산지에 쌓은 읍성은 대부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성벽과 치성에 더하여 마른해자와 명문 각석도 확인이 되었다. 옛날과 달리 빽빽하게 우거진 수풀 탓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평지에 쌓은 읍성도 북문터 서쪽 일대와 남문터~동문터는 자취가 뚜렷했다. 남문~동문은 민가 안쪽에 담장으로 남았고 북문 서쪽은 잡초에 가려져 있다. 반면 남문 서쪽 성벽과 동문 북쪽 성벽 그리고 해자는 모두 사라졌다.

 

그윽하고 포근한 마른해자

함안면 괴산리 253-3 민가에서 왼편으로 산길을 오르면 곧바로 허물어진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 바깥에는 알파벳 U자 모양이 펑퍼짐한 모습으로 길게 나와 있다. 깊이는 3미터, 너비는 6미터 정도다.

건호(乾濠) 또는 외황(外隍)이라 하는 마른해자다. 성벽과 함께 남쪽으로 꺾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어진다. 줄잡아도 200미터는 충분히 될 것 같다. 물이 채워지는 평지성의 해자와 마찬가지로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 쓰였다. 바닥에는 잔풀이 나지막했고 어린 나무도 군데군데 자라나 있다. 뒤에는 사람이 기르는지 매실나무가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위로 쳐다보니 그윽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마른해자. 그윽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명문 각석도 눈에 띄고

북성과 서성이 만나는 지점에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왼편(남쪽)으로 조금씩 휘어지던 성벽 윤곽이 90도 가깝게 남쪽으로 꺾이는 자리다. 나무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글자가 있는 것이다. 절반 넘어 가리고 있는 흙무더기를 파냈더니 한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세로로 두 줄로 넉 자씩 왼편은 "대구하말(大邱下末)" 오른편은 "비안상말(比安上末)"이라 새겨져 있다.

'대구'는 지금 광역시 대구이고 '비안'은 지금 경북 의성군 비안면으로 당시는 독립된 현()이었다. '상말''하말'은 지금 우리말로 첫머리와 끝머리다. 바위 왼편은 대구 사람들이 쌓은 마지막 자리가 되고 오른편은 비안 사람들이 쌓은 시작 자리가 된다. 북성은 대구 사람들이 쌓고 서성은 비안 사람들이 쌓았다는 얘기다.

북쪽 성벽과 서쪽 성벽이 마주치는 자리에 있는 명문 각석.

산지는 성벽도 대체로 온전

마른해자만큼은 아니지만 성벽도 제법 남아 있다. 흘러내린 흙더미와 수북한 수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가장 높은 자리로 여겨지는 지점에서 수풀을 헤치고 내려다보니 안팎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크지 않은 돌무더기들이 수북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정황들이 보니까 원래 치성을 두었을 만한 자리라 여겨지게 했다. 그렇다면 오횡묵이 올랐다는 북장대가 되겠다.

성벽은 분명하게 나타나거나 흙더미에 묻혔거나 수풀에 가려졌거나 거의 허물어졌거나를 되풀이하며 줄곧 이어졌다. 얼핏 그냥 언덕처럼 보이지만 흙무더기를 걷어내기만 해도 성벽이 곧바로 나타날 것 같은 데가 많았다. <함안총쇄록>에 서문이라 적혀 있는 성고개까지 줄곧 그랬다.

<함안총쇄록>에 서문이라 적혀 있는 성고개에 남은 성벽. 

서문 남쪽에는 치성이 잘 남았고

서문 남쪽에서도 치성이 하나 확인되었다. 성고개에서 맞은편으로 올라가니 성벽과 그 바깥으로 튀어나온 석축(石築)이 보였다. 잡풀에 덮여 있어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위에서 공격과 방어를 좀 더 쉽게 하려고 쌓은 치성이 분명했다. 앞서 본 치성은 심하게 허물어져 형태를 알기가 쉽지 않았으나 여기서는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서문을 지나면서 마른해자는 이미 자취가 희미해지거나 사라졌고 치성을 지나 내리막으로 접어들면서는 성벽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거의 끝자락에 나타난 감나무밭에서는 아래위로 길게 뻗은 성벽을 볼 수 있었다. 띠가 덮고 있어서 돌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은 "토성처럼 보이지만 흙과 띠를 걷어내면 바로 석축 구조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바로 아래 대숲에는 석축 내부를 보여주는 구조물도 있다"고 말했다.

감나무밭 가운데에 남은 서문 남쪽 성벽.  토성처럼 보이지만 발굴하면 석성일 가능성이  100%라고 한다.

대문 너머 담장으로 남은 남문~동문

평지에 쌓은 읍성에도 성벽이 제대로 남은 데가 있다. 크고 잘생긴 면석(面石)이 뚜렷한 데는 봉성57 집 대문 너머 보이는 담벼락이다. 커다란 바위가 왼쪽과 오른쪽에 최소한 제각각 10개와 6개가 받치고 있는 것이 완연한 성벽 모양이다. 평면이 세숫대야 3~6개 엎어놓은 정도와 맞먹을 크기다.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았다고 허투루 여길 일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보전에 나서면 좋을 것 같다. 다른 읍성에서는 이렇게 큼지막한 면석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면석과 면석 사이를 자잘한 돌들이 채우고 있고 위쪽도 마찬가지였다.

지대석(地臺石)이 잘 남은 자리도 있다. 봉성521이다. 위쪽 성벽의 무게를 받치면서 지반을 단단하게 다지기 위하여 바닥에 튀어나오도록 박은 돌이 지대석이다. 최헌섭 원장은 "창원읍성 발굴 사례로 볼 때 지대석 아래에는 납작한 박석(薄石)이 깔려 있을 개연성이 높다. 빗물에 파이지 않게 하고 물빠짐을 좋게 하는 동시에 바닥을 안정시키는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500년 전 축성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실물이다.

텃밭으로 변신한 읍성도 있다. 봉성517에 있는 민가 안쪽으로, 남문터의 동쪽 구간이다. 문간에서 왼쪽 계단으로 1.5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략 너비 3미터, 길이 10미터에 상추와 들깨가 심겨 있다. 이 밖에 봉성531에도 성벽의 흔적이 미약하나마 남아 있다.

 

연못 앞에 노거수 우뚝한 북쪽 성벽

북문터 서쪽 함안대로 155 일대에도 성벽이 뚜렷하다. 토석과 잡풀에 뒤덮인 채 나지막이 앉아 있다. 위에 노거수가 몇 그루 솟았는데 회화나무는 말라 죽었고 팽나무들은 살아 있다. 읍성이 군사 기능을 했다면 당연히 베어냈어야 한다. 나무 나이만큼 오래전부터 성곽이 관리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남쪽(왼편)을 보면 바로 앞 농지 한가운데에 연못이 있다. <함안총쇄록>에서 오횡묵은 '동정호'라 했다. 여든이 넘었다는 이웃 어른께 이름을 여쭈었더니 "말한테 물을 먹였다고 해서 말못이라 했다. 어릴 때 어른들한테 들었다"고 하셨다. 가로(동서)와 세로(남북)가 각각 25미터와 15미터가량인데 사방 둘레를 편평하고 두껍게 떼어낸 퇴적암으로 비스듬히 세워서 어긋나게 쌓았다.

연못은 성안 물줄기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모여드는 자리다. 성벽의 안전과 직결되는 시설이다. 우리문화재연구원 권순강 조사연구부장은 "이렇게 모이도록 하면 물은 흐름이 약해지면서 파괴력을 잃는 동시에 이물질은 가라앉고 물만 천천히 밖으로 내보내진다""성벽과 못의 이런 배치는 고대 성곽에서도 보이는데 읍성이 이를 계승했다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북문 서쪽 성벽 위의 노거수와 <함안총쇄록>에 '동정호'로 나오는 연못.

가장 심각하게 망가진 구간은?

동문터 북쪽과 북문터 동쪽에 해당되는 성벽이다. 1970년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새마을운동을 비롯해 개발이 진행되면서 급격하게 사라진 모양이다.

다음으로 많이 망가진 데는 동문터 일대다. 커다란 바위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는데 콘크리트 범벅이다. 원래는 면석 구실을 했을 것 같지만 지금은 콘크리트로 두세 겹으로 쌓인 채 한 덩이가 되어 있다.

동문터 남쪽 봉성553~57에도 면석으로 쓰였을 큰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더불어 돌담장이 제법 길게 이어지지만 이는 어쩐지 성벽이 남은 자취라기보다는 허물어지고 사라진 흔적으로 여겨졌다.

봉성 5길7의 크고 잘생긴 남문 동쪽 성벽 면석들.

명문 각석 사라진 남문터 서쪽

일제강점기에 이미 남문터 서쪽 구간은 성벽 위에 도로가 났다. 도로 남쪽은 민가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북쪽은 함안초등학교와 이어진다. 도로는 이들 민가와 학교를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지나간다.

최헌섭 원장은 "우리 손으로 도로를 냈다면 저렇게 하진 않았을 텐데 성채를 못 쓰게 하려는 악의가 선명하게 느껴진다""하지만 그 의도와는 달리 도로 아래에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을 개연성이 크다"고 했다.

여기에 작업 구간을 표시하는 명문 각석이 있었다. <함안군 문화유적분포지도>(창원대박물관, 2006)에 나온다.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大正六年度 古蹟調査報告)>에 의하면 남문지 서쪽의 성벽에 '봉화상말(奉化上末) 영덕하말(盈德下末)'이라 2행으로 각자한 명문이 있었다고 하나 남성벽으로 파수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민가가 건축되면서 파괴된 듯하다." 하지만 명문 각석이 파괴되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대정 6년은 1917년이다.

 

해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읍성의 전체 구성에는 해자도 포함된다. 읍성 바깥 둘레를 파내어 물이 흐르게 한 침입 방지 시설이 해자다. 오횡묵이 읽은 <군지>는 이를 '보지(堡池)'라 적고 깊이 6, 너비 12척이라 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시기별 항공사진으로 시기를 가늠해 보았다. 가장 먼저 없어진 데는 남문 동쪽에서 동문까지이다. 19546·25전쟁 직후 사진에 이미 사라져 있다. 다음은 남문 서쪽이다. 1970년 사진에 띄엄띄엄 민가가 들어서 있다가 1982년 사진에서는 거의 모든 면적을 민가가 차지했다. 가장 늦게까지 해자가 남았던 데는 동문 북쪽에서 북문 동쪽까지이다. 2000년 사진에도 자취가 있다.

동문 일대와 그 남쪽은 옛날 해자 위에 민가 또는 농경지가 자리 잡고 있다. 동문 북쪽은 해자를 파묻은 위에 사람 다니는 인도나 화단이 개설되었다. 화단과 인도는 맨 흙이 그대로 드러난 구간으로 바뀌었다가 콘크리트 수로(水路)와 두 줄로 심긴 가로수로 다시 바뀐다.

권순강 부장은 "남문 서쪽에서 동문을 거쳐 북문 동쪽에 걸쳐 있었던 해자는 매몰된 시기가 다르다. 발굴을 하면 많고 적은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구간에서 옛날 모습을 상당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왼쪽 콘크리트 수로와 오른쪽 두 줄 가로수 자리를 걷어내면 바로 해자가 나타날 것이다.

산지 읍성부터 원형 회복을

함안읍성에서 산지는 상당한 정도로 원래 모습이 유지되고 있었다. 경관을 조금만 정비하고 관리하면 훌륭한 생태역사탐방자원으로 새로 태어날 것 같았다. 성벽과 해자 안팎을 무성하게 뒤덮은 수풀과 흙더미를 일단 걷어내는 것이다. 같은 함안의 성산산성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석축도 느낌이 있었지만 마른해자가 특히 색달랐다. 아무 데서나 쉽게 볼 수 없는 유적인 때문이겠지만 그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이 왠지 좋았다. 성벽과 마른해자의 나란한 동행과 조화로움도 은근히 감흥을 일으켰다.

최헌섭 원장은 "지금 성벽은 100년 넘는 세월을 지나면서 안정화되었기 때문에 수풀과 흙더미를 제거해도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이렇게만 정리해도 곧바로 130년 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거리가 1킬로미터 안팎으로 적당하고 가파른 비탈도 없어서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길이다. 조금만 손질을 하면 느낌도 산뜻하고 역사유적도 누릴 수 있는 산책로 하나가 새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평지 읍성은 다른 지역에서도 하는 것처럼 성곽 흔적에 대해 보기 좋게 안내판을 마련하면 좋을 것 같다. 함안읍성은 뜻밖에도 그 명성이 적지 않게 알려져 당장 크게 표시 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밖에 다른 부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상황이 진척되는 정도를 보아가면서 하면 되지 싶다.

 

함안읍성 일대를 찍은 1954년(위)과 1970년의 항공사진. 북문 아래에 <함안총쇄록>에 동정호로 나오는 연못이 선명하다. 논에 보이는 검은 반점은 둠벙으로 보면 된다. 옛날에는 이렇게 많았으나 지금은 동정호 아래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성곽 바깥으로 특히 동북쪽은 해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오른쪽에 위에 활처럼 굽은 것은 돌로 쌓은 옛날 수로인데 지금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국토지리정보원

경남도민일보 201975일자에 실리고 2020년 펴낸 책자 <조선시대 원님은 어떻게 다스렸을까>에 들어 있는 글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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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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