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얼굴이 뭉개진 그 해 5월의 사진 한 장

김훤주 2019. 7. 1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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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이 한 장 앞에 놓여 있었다는 것 하나만 빼고는 모든 것이 기억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심지어 그 사진이 흑백이었는지 칼라였는지도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 속 그림은 개의 머리 같아 보였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까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눈, , , , , 눈썹 그 어느 것도 제 자리에 붙어 있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당연히 헝클어져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던 것이다.

19835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 때 나이 스무 살, 대학 2학년이었다. 태어나서 20년이 이르도록 그런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있었다.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지만 6.25전쟁 때 북한군에게 죽은 남쪽 민간인들 사진이었다. 그런 사진이 담긴 반공·멸공 화보가 집에 몇 권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옆에서 내게 말을 해주었던 것 같다. 선배였던 것도 같고 동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광주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19805월에 군인들이 대한민국 청년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합당한 이유 없이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이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독재 치하 그 때는 그랬다.

그러면서 다른 사진도 몇 장 더 보여주었던 것 같다. 리어카를 태극기가 뒤덮고 있는데 그 아래로 사람 손발이 조금 드러나 있었다. 또 한 어린아이가 젊은 아버지의 얼굴 사진이 든 액자에 턱을 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쩐지 슬픔을 넘어서 무심한 듯이 여겨졌다.

그날 나는 엄청나게 울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는 눈물만 줄줄 흘렸던 것 같은데 조금씩 흐느끼는가 싶더니 막판에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오랫동안 그쳐지지 않았던 그 울음은 그 뒤로도 대략 한 달 동안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왔다.

충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슬픔을 지나더니 분노로 이어졌다. 내가 배운 교과서에서 군대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전두환 일당은 거꾸로 자기 국민을 학살했다. 이런 군사독재정권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원수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나도 나서서 힘을 보태야 한다. 그리고 그런 원수 집단은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씨를 말려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사진을 본 뒤로는 그런 생각만 했다.

시인이 되고 싶어 대학에 들어갔고 들어가서 보니 문학평론도 재미있어 보였지만 학과 공부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접었다.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목표를 음풍농월에서 정권 타도와 사회 혁명으로 바꾸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뒤로 내 삶이 광주 5월의 자장을 벗어난 적은 없다. 학생운동을 마치고 노동운동·지역운동을 하면서도 광주에 반하는 일을 한 적은 없다. 20년 전 조그만 지역신문에 자리를 잡은 뒤로도 광주 5월의 양심을 거스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 스스로 생각할 때는 그렇다.

우여곡절이 한 번도 없었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권력과 자본에 빌붙지는 않았다. 몸과 마음을 비굴하게 놀리지 않고 남한테 해코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이 모두가 광주 5월 덕분이다. 광주 5월에 크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한참동안 광주를 찾지 않았다. 광주를 갔어도 볼일만 보고 돌아올 뿐 묘역은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마다 5월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로 몰려갈 때도 나는 그 대열에 끼어들지 못했다. 찾아가서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아울러 고맙다고 인사도 올려야 합당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자꾸 주저앉혔다.

그때마다 우리 지역에서 광주를 기리고 5월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려고 애썼지만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핑계였다. 이런 답답한 심정을 마음 맞는 동료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10년 전 2009, 5월이 지나 6월이었다. 제대로 사리를 갖추어 할 수 있는 정황이 아니었다.

동료는 나의 주절주절과 횡설수설을 묵묵히 듣고 나더니 동행할 테니 한 번 다녀와 보자면서 일단 부딪혀보면 무언가 나타날 지도 모른다고 했다. 머뭇대는 마음을 옆으로 밀쳐두고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햇살은 뜨거웠고 날씨는 무더웠다.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지만, 묘역에 들어서자마자 대책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고 나중에는 꺽꺽 목이 꺾어지기까지 했다. 묘비가 줄지어 서 있는 사이를 오가다가 거기 적혀 있는 글자가 하나라도 눈에 들어오면 다시 눈물이 터졌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늘에서도 울고 땡볕에서도 울었다.

혼자 나설 용기가 없어서 여태 오지 못했나 생각이 들었다. 아니고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이랑 오면 감당 안 되는 모습을 보일까봐 겁이 나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냥 지켜보면서 한참을 옆에 있기만 하던 동료가 한 마디 말했다. “너는 무죄야. 광주 영령들의 죽음 앞에 당신은 책임이 없어. 그러니까 눈물도 지나치면 가식이 되는 거야.”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내가 다시 광주 5월 묘역을 찾은 적은 없다. 그런데 찾아가지 않아서 켕긴다는 느낌도 크게 들지 않고 다시 찾아가야 한다는 강박도 크게 들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당신께서는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당신께서 죽지 않도록 하는 데 나는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아마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을 지금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김훤주

<전라도닷컴> 2019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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