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6. 진주 남강이 만든 그윽한 배후습지의 풍경

김훤주 2019. 4. 15. 09:05
반응형

-진주 장재늪·서원못·연못 일대 들판

 

작지만 전형적인 배후습지

진주시 집현면 장흥·월평·신당마을 일대 들판에는 습지가 셋 남아 있다. 장재늪과 서원못 그리고 연못이다. 오래 전부터 여기에서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붙인 이름들이다. 전부가 벼논인 일대 들판은 생김새가 네모꼴이다. 가로와 세로가 모두 2km 안팎이다. 동쪽에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남강이 놓여 있다. 서쪽과 북쪽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서쪽 야산과 북쪽 야산 사이에서는 지내천이 비집고 나와 동쪽 남강으로 흘러간다. 남쪽으로는 하촌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그보다 더 남쪽에 있는 들판과 구분지어 준다. 하촌천 일대가 모두 들판인 것은 아니다. 끝머리가 봉긋하게 솟아 있는데 높이가 낮아서 무슨 야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다.

 

남강은 수량이 풍부하다. 많을 때는 낙동강 전체 수량의 40%를 웃돌기도 한다. 진주는 물론 하동·산청·합천·함양·거창 등 경남 서부 지리산 자락들에 쏟아지는 빗물을 모두 쓸어 담고 흐르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풍부한 수량이지 홍수와 관련지어 보면 그것은 엄청난 물난리가 된다.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 남강을 이루는 진주 서쪽 즈음(지금 남강댐 자리)에서는 더욱 불어난다. 이렇게 불어난 물이 진주를 태극 모양으로 휘감아 관통하면서 동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장흥·월평·신당마을 들판이 있다. 불어난 남강 물은 지내천·하촌천 같은 지천의 흐름을 가로막는다. 불어난 물은 더 나아가 이런 지천의 물줄기를 타고 거꾸로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오르기까지 한다.

월평교에서 지내천 쪽으로 바라본 습지 모습. 지내천은 오른편으로 흘러 남강으로 들어간다.

역류(逆流)와 범람이다. 일대 들판은 꼼짝없이 물에 잠긴다. 들판을 가득 덮은 물은 며칠 동안 들어차 있다가 천천히 빠져나간다. 만약 모내기철이 지났다면 나중에 물이 빠지고 나서 무슨 곡물을 대파(代播)해야 좋을지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낮은 지대에 들어간 물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장재늪·서원못·연못 자리다. 그런데 이들 세 습지는 야산 비탈 바로 아래에 있거나 들판 한가운데 있다. 야산 비탈 바로 아래와 들판 한가운데는 가장자리인 강가보다 높은 지대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장자리보다 낮아지게 되었을까?

월평교에서 장재늪 쪽으로 바라본 습지 모습(봄)
월평교에서 장재늪 쪽으로 바라본 습지 모습(겨울)

물론 강물이 범람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가장자리가 더 낮았을 것이다. 하지만 범람은 거듭되었다. 그 때문에 물과 함께 섞여 흐르던 모레와 흙이 지내천과 남강 가장자리에 내려앉으면서 두툼하게 쌓이게 되었다. 이를 두고 자연제방이라 한다. 가장자리가 높아지면서 빠져나가는 물길을 가로막게 되었던 것이다. 하천 뒤쪽에 배후(背後)습지가 형성되는 원리다. 지금은 자연제방이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장재늪·서원못·연못은 창녕 우포늪처럼 크지는 않다. 대신 한 눈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배후습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배후습지가 낳은 홍수 관련 설화들

옛날 사람들은 배후습지를 둘러싸고 있는 둘레 야산이나 언덕 또는 자연제방에서부터 먼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원래는 습지였던 것을 인간이 노동을 더하여 농지로 변환시켰다. 이런 인공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농지에 공급되는 농업용수는 배후습지에서 나왔다. 장재늪·서원못·연못은 지금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장재늪 양지바른 데 모여 볕바라기를 하는 오리떼.

옛날에는 거의 전부가 논이었겠으나 지금은 비닐로 하우스를 지어놓은 밭들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습지 풍경은 여전히 완연하다. 물버들이 바깥에 줄지어 있고 안쪽으로 가면 갈대·억새··부들 같은 습지식물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2017123일 찾았을 때는 인상 깊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겨울철새인 오리들이 양지 바른 데 가로로 길게 모여 앉아 햇살을 따사롭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세 곳 습지는 이처럼 자연 그대로였다. 사람들이 머물러 쉴 수 있는 시설도 없다. 사람들이 놀러 오지 않는 까닭이다. 대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씨알 굵은 물고기가 적지 않게 잡히는 모양이다.

 

이런 일대에는 홍수 관련 설화가 많기 마련이다. 으뜸은 장대산이다. 장대산은 들판 서쪽 장흥 마을 뒤쪽에 있다. 옛적 이름이 잔대산이었다. 천지개벽이 되어 사방천지가 물에 잠기고 산들도 모습을 감추었는데, 잔대산만은 모두 잠기지 않고 꼭대기만 남았다. 그 모양이 제사지낼 때 쓰는 '잔대'만큼 남았다 해서 '잔대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 물난리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또 심했는지를 일러준다.

 

'월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눈여겨볼 만하다. 월평은 달()동네(). 옛날 이름은 수리월(水裡月)이라고 한다. () ()에 있는 달()이다. 일대가 물에 잠기지 않았더라면 가능하지 않은 작명이라 하겠다. 진주시청의 기록을 따르면 월평리가 장흥마을에서 독립하여 행정(行政)리가 된 해가 1947년이다. 이전에는 사람이 제대로 살고 있지 않아서 마을이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일대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다. 물의 드나듦을 일제가 토목기술로 막아낸 이후에야 정착해 살 수 있었던 땅이라고 보아야 한다.

 

절정은 장재늪이다. 장재늪에서 장재는 장자(長者=부자)에서 왔다고 한다. 부자는 만석꾼이지만 인색했고 성질은 고약했다. 시주를 받으러 온 스님을 그냥 보내지 않고 쪽박까지 깨어서 쫓을 정도였다. 그러나 참한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는 시주를 제대로 하려 했으나 시아버지가 막았다. 신통력이 있었던 스님은 그 보답으로 며느리한테 집을 떠나라고 일러주면서 절대 뒤돌아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지상정이 그러한가. 길을 나선 며느리는 집 쪽에서 큰 소리가 나자 뒤돌아보고 말았는데 살던 집터는 물에 잠겼고 며느리 또한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다. 실은 드물지 않은 얘기다. 가까이 같은 경남의 창녕 영산면에 있는 장척늪에도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물이 많이 담는 마을이라면 으레 있는 이야기로 보면 맞겠다.

장재늪 겨울 풍경
장재늪 봄 풍경

비운에 간 조지서를 위한 신당서원

서원못은 바로 앞에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신당서원인데, 주인공은 지족당 조지서(趙之瑞 1454~1504)이다. 조지서는 비참하게 삶을 마쳤다.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이 세자였을 때 스승 노릇을 맡게 되면서 그런 운명이 되고 말았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그이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 4보덕(輔德, 3)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가르치는 벼슬아치를 통칭하여 서연관(書筵官)이라 하였는데 그 직책상 성품이 방정단직(方正端直)한 이를 골라 썼다고 한다. 조지서는 이에 걸맞게 반듯하고 곧아서, 시류에 쓸리거나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세자를 제대로 가르치려고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간()할 정도로 무던하게 애썼던 모양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하기를 극도로 싫어했던 세자로부터 크게 미움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은 임금이 되자 조지서를 벼슬자리에 쓰지 못하게 하고 여러 차례 꼬투리를 잡아 벌주려고 했다. 그러다 결국은 갑자사화에 얽어매어서는 때려죽이고 말았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임금 자리에 오른 1495년 창원부사를 그만둔 뒤 줄곧 진주에 살고 있었다.(아마도 지금 서원못이 있는 일대였겠다.) <연산군일기>에 이렇게 나온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일이다.

 

"의금부 낭청 박기(朴基)가 조지서를 잡아 왔다. (연산군이) 명하여 당직청에서 국문하게 하였는데, 지서가 비중(肥重)한 몸으로 결박을 당하니 숨이 막혀 형장 3대를 맞고 그만 죽어 버렸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당직청에서 곧바로 머리를 베어 철물전 앞에 효수(梟首)하고 시체는 군기시(軍器寺) 앞에 두라'고 하였다. 죄명은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을 능멸한다는 것으로 찌를 써서 달아매고, 백관들로 하여금 차례로 서서 보게 하였다. 그때 밤이 4경이었다."(1504년 윤416).

 

연산군은 이어서 "능지(凌遲)하여 시체를 팔도에 전달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죄명을 판자에 새겨서 분명히 보이라"(417), "머리를 팔도에 조리돌린 후 구렁에 버려두라"(428), "뼈를 부순 가루를 강 건너에 날리라"(1505126)고도 하였다. 머리를 자르는 효수로도 모자라 몸뚱이에서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능지처참까지 자행할 정도였다.

 

이태 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지서는 곧바로 사면·복권되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청백리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몸이었다. 지역 선비들이 서원못 앞에 조지서를 모시는 신당서원이 세운 때는 그로부터 200년가량이 지난 1710년이었다.

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각
사제문비각 안에 있는 비석 몸돌

임금이 지어서 하사한 제문

1718년에는 당시 임금 숙종이 편액을 내리고 제문(祭文)까지 몸소 지어주었다. 여기에는 당시 정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사악함 막고 착함을 펼치고, 이치 나타내고 욕망은 막았네. 동궁이 생각지도 듣지도 않으니, 마치 물에다 돌을 던지는 격이었네. …… () 있는 임금이건 없는 임금이건, 사어(史魚, 중국 춘추시대 위나라 대부로 주군 영공을 위하여 죽어 시채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고 간()하였다고 한다)의 강직함 꺾지 못했네. 말의 기운은 더욱 엄하게 하고, 강학(講學) 권유를 날로 강하게 했네. 사람들은 나를 위해 두려워하지만, 나로서는 나의 직책 다해야겠도다. 어지러이 뒤집힌 시대 만나서, 몸이야 시골로 돌아왔지만, 충직(忠直)한 것 탈로 잡아, 그 원한 혹독(酷毒)했도다. 마침내 사화(士禍)에 걸려들어, 자신은 죽임 당하고 일족 멸하니(그러나 <중종실록>을 보면 자식과 아내는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다네.”(경상대학교 한문학과 허권수 명예교수 번역)

 

지금도 서원못 바로 앞 길가 공터에 이 제문을 새긴 빗돌(진주장흥리숙종사제문비)이 있다. 신당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1871)으로 헐리어 없어졌고 지금은 1857년 마당에 세워졌던 이 사제문비만 남아 있다. 어쨌거나 서원못은 신당서원이 생기기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 평생 한 목숨은 그 곡절이 많든 적든 산천에 견주어 보면 턱없이 짧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연못은 도로가 지나는 다리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세 곳 습지 가운데 연못은 찾아가기 쉽지 않다. 들판 가운데 있는 데 더하여 농로도 가닿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장재늪과 서원못은 바로 옆에 도로가 반듯하게 나 있어서 어렵지 않게 걸음할 수 있다. 풀과 나무도 우거져 있어서 전체 풍경이 푸근하고 그윽한 느낌까지 준다. 그렇지만 주변 환경은 어지럽고 거칠다. 건축자재 따위와 생활쓰레기가 곳곳에 널려 있고 안내팻말조차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일대를 돌아다녀보면 진주시청이 나서서 둘레를 꾸미고 가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대 환경을 좀 더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언제든지 손쉽게 찾아가 편히 노닐면서 거기에 어린 사람살이의 역사까지 함께 더듬어볼 수 있는 습지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김훤주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에 실린 글입니다. <습지에서 인간의 삶을 읽다>는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에서 2018년 11월 출간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