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아들 위해 술심부름을 했다

김훤주 2008. 8. 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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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다 보니 그런 일도 다 있네 그래.” 그렇습니다. 진짜 생각도 못한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즐겁기도 하니 이게 이상한 노릇입니다.

고3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방학을 맞아 그림을 공부하러 서울에 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학원이 쉬는 바람에 이틀 한도로 4일 새벽 창원 집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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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밤 지면평가위원회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들 녀석으로부터 문자를 받았습니다. 술 좀 사 줄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받았을 때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아들이 아버지한테 술심부름을 다 시키다니……. 곧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왜 술을 사 달라느냐고 물었겠지요.

“아빠 있잖아요, 수능 치기 100일 전이에요. 친구들이랑 마시려고요.” 그래 제가 “그러면 니가 사면 되지, 왜……” 하고 물으려는데 불현듯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는 아무나 술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른바 어른이 아니면 살 수 없게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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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와 아들이 시키는대로 맥주 1.6ℓ 짜리 다섯 병 하고 안주를 좀 샀습니다. 냉장고에 넣었습니다. 아들은 자정 전후해 들어온다 했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볼는지 모르지만, 저는 아들이 고맙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고, 아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믿고 아버지한테 술심부름을 부탁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마음으로부터 이해를 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사실 저는, 4일 새벽 아들이 서울에서 돌아왔을 때 무척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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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돌아오자마자 제게로 다가와서는, 진짜로 반가운 얼굴 표정으로, 제 손을 으스러지게 꽉 쥐어줬습니다.

저는 그런 아들이 반갑고 고마워서, 한껏 품을 벌려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기에, 불쾌할 수도 있겠다 싶어, 등을 토닥거리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아들은 그날 밤 자기 친구들이랑 우리 집에서 제가 사놓은 술을 재미있게 마셨습니다. 다른 두 친구랑 함께 인생살이를 얘기하면서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친구들은 학교 보충수업 때문에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나갔고, 제 아들은 새벽까지 주고받은 얘기들을 꿈결에 되새기며 아침까지 잠을 잤습니다.

언젠가 제 아들은 이리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사람들이랑 어울리려면 술은 마셔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담배는 피우지 않을래요.”

제가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지난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대목이 담배를 배운 것이란다. 정말 잘 생각했다. 그런 아들이 나는 자랑스럽다.”

저는 그 날 제가 술심부름했던 그것이 아들에게 친구랑 더욱 많은 얘기를 나누고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많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들한테 듣기로, 사생활과 관련되는 얘기라 자세하게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실제로 그리 된 것 같아 저는 흐뭇합니다. 친구들끼리 고민과 따위들을 많이 공유한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아들 술심부름을 하면서, 제가 처음 술을 마신 시절로 기억이 돌아갔습니다. 고1 겨울방학입니다. 1980년 2월 17일 설날 다음이었습니다.

저는 이른바 ‘떡’이 됐습니다. 마땅한 까닭도 없이 술을 마셨습니다. 아마 제게 연락이 되지 않아 친구들이 따로 모였을 뿐인데도, 저는 저를 따돌리느라 그랬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이쁜 여자애도 몇 명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있는 산기슭을 향해 소주 두 되를 사서는 지고 올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고 간 것보다 더 많이 마시고는 뻗어버렸습니다.

친구들은 당연히 감당이 되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저를 억지로 산에서 끌고 내려오기는 했지만 집에다 데려다 줄 생각은 하지 못했나 봅니다.

친구들은 저를 집 앞에다 팽개치고 돌아갔습니다. 저는 쓰러져 있다가 어머니 눈에 띄어 업혀 들어갔고 어머니는 쌀을 물에 갈아 제 입에 넣었습니다.

이랬던 저에 견주면, 우리 아들은 그야말로 젊잖게 술을 마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도 제가 무슨 치울 거리는 전혀 없었습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제가 적어도 절반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아들이 저를 믿어주니까요. 제가 아들을 믿는다는 사실을 우리 아들이 믿어주니까요.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요!!

제가 고3 아들이랑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신 적은 없지만, 저보다 더 정겹게 생각하는 친구들이랑 술을 마실 수 있게 장만해 달라고 주문하는 바람에 아들이 더욱 믿음직스러워졌습니다.

나중에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뭐 이런 느낌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를 친구처럼 삼아 편하게 얘기를 나눌 아들이 그렇게 흔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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