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술꾼 위한 불꽃쇼 현장 마산 오동동 미나미

김훤주 2011. 12. 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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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도 더 지난 11월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어져서 마산 오동동에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가면서 생각해 보니 '미나미'가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시는대로 미나미는 일본식 술집인데요, 노부부 두 분이서 장사를 하십니다. 창동 오동동이 붐비고 술집 아가씨들이 많았을 때는 장사가 잘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고 지금도 손님이 적게 드는 축은 아니랍니다.

미나미에 가고 싶었던 까닭은 따끈한 한 잔 술로 몸을 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날씨도 찬데 몸까지 춥게 하는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가면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기 어려운 훌륭한 술이 있답니다.

히레사케라 하던데 일본말로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뜨겁게 데운 청주에다 살짝 태운 복지느러미를 조금 넣어 만들어 냅니다. 이렇게 하면 복지느러미에서 맑은 색깔이 우러나 술이 황금빛으로 물듭니다. 그리고 비린 맛이 조금 비치면서도 맹탕 같은 청주의 원래 맛을 스러지게 하는 그런 맛이 나옵니다.

이 집 주인 어르신은 복지느러미가 담긴 술잔에 따끈하게 덥힌 청주를 따를 때 불을 붙이는데요, 그러면 폭포처럼 떨어지는 술에서 푸른 불꽃이 한참 동안 일어납니다. 아무래도 불순물을 없애는 제독 노릇을 하겠지 싶은데 어쨌거나 이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은 옆에서 신기해하며 감탄을 연발합니다.

주인 어르신은 잔 두 개 있을 때는 언제나 왼쪽부터 불을 붙여 술을 따르십니다.

옮겨간 오른쪽 잔에서도 푸르스럼한 불꽃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술이 너무 뜨거워 입에 넣기 어렵지만, 함께 자리한 이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술이 식어서 알맞게 따뜻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한 입에 다 털어넣기는 여전히 뜨거워서 부담스러운데요, 조금씩 잘라 마셔서 입에 담고 돌리면 맛이 입 안에 골고루 스며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데운 술과 복지느러미. 오른쪽 위에 붉은 바구니에 송하단이 담겨 있습니다.

뜨거울 때는 이렇게 두었다가 복지느러미를 건져낸 다음 마십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일품인 것은 그렇게 머금었던 술을 꿀꺽 삼키고 나서입니다. 이것이 내장을 따라 내려가면서 청주에 고유한 짜릿함과 함께 따뜻함을 안겨주는데, 어떤 때는 사람 몸통이 단박에 후끈 달아오르게까지 할 정도랍니다.


복지느러미는 한 번만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고 여러 번 되풀이해 쓸 수 있답니다. 이렇게 마시는 첫 잔은 4000원을 받고 다음부터는 3000원을 받는데, 석 잔째나 넉 잔째가 가장 술맛이 좋다고 주인 어르신은 일러주십니다.(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습니다.)

주인 어르신 노부부.


보통 다섯 잔까지는 이렇게  마시고요 저는 일곱 잔까지 복지느러미 하나로 마셔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시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과음이나 폭음을 하지 않게 거든다는 것입니다. 술이 뜨겁기 때문에 폭음은 할 수 없습니다. 다섯 잔이나 여섯 잔 정도 마시면 복지느러미 기운이 다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마시기도 마땅찮습니다.


미나미에는 이처럼 쉽게 보기 어려운 좋은 술도 있지만 다른 데서는 맛볼 수 없는 그런 안주들도 많습니다. 먼저 '오뎅'입니다. 어떻게 만드시는지는 몰라도 국물이 아주 시원하고 맛도 괜찮습니다.

인심도 좋습니다. 바닥까지 긁어먹고 국물 좀 달라 했더니 이렇게 건데기까지 넣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맛뵈기일 따름입니다. 오리알로 만드는 '송하단'도 있습니다. 삭힌 녀석이 돼 놓아서 처음에는 저도 입에 담기가 어려웠습니다만 드나들면서 한 번씩 먹었더니 이제는 꽤 익숙해져서 그 맛을 음미할 정도가 됐답니다. 독특한 맛을 내면서도 툭유한 냄새가 그리 심하지는 않습니다. 흰자위를 씹을 때는 사각거리는 느낌도 좋았답니다.

송하단 원래 모습.

송하단 껍데기 벗긴 모습.


구운 시샤모도 좋고 얼 말린 명태포도 괜찮습니다. 물기가 나올 정도로 덜 말렸을 때도 꼬들꼬들하게 씹힐 정도로 제대로 말렸을 때도 있는데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두 경우가 모두 좋았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럴 듯한 것은 '유곽'입니다. 대합 조개살을 잘게 다진 다음 된장 고추장 같은 갖은 양념을 해서 통째로 불로 구워 익힌 요리인데요, 저는 여기 아닌 다른 데서 이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유곽만 먹어도 독특하고 좋지만 여기에다 앞에 말씀드린 얼 말린 명태포를 찍어 먹으면 더욱 좋습니다. 저는 아직도 짠 맛이 싫지 않은 편이라 더욱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 녀석들의 간간한 조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봤습니다.

다진 대합 조개살에 갖은 양념을 한 다음 불에 구운 유곽.


여기 이런 안주들은 값도 그리 비싼 편은 아닌데요, 얼 말린 명태포와 갖은 양념 대합 조개의 조합은 '문스 초이스(Moon's Choice)'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지역의 나름 이름난 연극인 문종근씨가 아주 좋아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문스 초이스'.


여기에 가시면 아주 이름난 '술타령'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하하. 이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나름 경지를 이룬 듯한 그런 글귀도 꽤 있습니다.


하나 보기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풋고추 막된장도/ 먹고 나면 허전해라/ 천하의 일만금도/ 쓰고 나니 허전해라/ 무자식 상팔자라. 그래도 허전해라." '망구' 제 생각일 따름이지만, 우리 삶 자체의 허망함에 대한 깨우침이 조금 비어져 나오는 그런 타령입니다. '허전하고 허전해라/ 그래도 허전해라.'고 하는……. 


지금처럼 강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한 번쯤 들러도 후회하지 않을 좋은 술집입니다. 허허로운 마음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따끈해진 술을 느긋하게 한 잔 기울일 수 있습니다. 허전해서 허전하지 않은 그런 느낌도 누릴 수 있습니다. 노부부한테서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도 있습니다.

김훤주
내가만난술꾼임범에세이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임범 (자음과모음,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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