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내가 왼손잡이라서 유리했던 점들

김훤주 2010. 2. 2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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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왼손잡이라서 오랫동안 서러운 세월을 지내야 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받지 않아도 되는 구박을 받았고 어떤 때는 얻어터지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또 망치질이라든지 이런저런 일을 할 때 왼손으로 하면 오른손잡이 눈에는 낯설고 어슬퍼 보이기 십상이니까, 저를 두고 불안해 하는 그런 눈길을 늘 느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는 제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이 고맙게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왼손잡이라서 겪거나 받았던 구박과 폭행, 그리고 불편 따위는 별로 억울하지 않아졌습니다.

☞관련 글 : 커피 잔이 일깨운 왼손잡이의 추억

왼손잡이는 이처럼 바지 지퍼 하나를 내리는 데도 손을 비틀어야 합니다. ^.^;


이런 소중한 말을 해 준 사람이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겪게 마련이고, 그 어려움이나 괴로움에 꺾이지 않고 잘 견디어 내면 그것이 사람 살아가는 데 커다란 힘이 된다는 얘기 말입니다.

왼손잡이에게 주어지는 구박과 폭행을 저는 잘 견디어 낸 것 같습니다. 

제게는 그래도 왼손잡이라서 빛나는 한 시절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씀부터 합니다. 
이어서 왼손잡이로 구박을 받은 덕분에 양손을 모두 쓸 수 있게 됐다는 말.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소중한 마음 속 자산인데요. 세상살이 여러 국면에서 같아야 하는데 다르다든지 달라야 하는데 같다든지 하는 차이, 나아가 차별에 감응을 꽤 할 수 있게 됐습니다.

1. 왼손잡이여서 빛나는 한 때가 있었다

창녕국민학교 다니던 70년대 초·중반에 저는 학교에서 탁수 선수 노릇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뭐 제가 특별하게 탁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키가 크고 날렵해 보이니까 뽑혔습니다.

제가 들어 있는 창녕국민학교 탁구부가 창녕군 대표가 되고 나아가 김해·밀양·창녕 3군 대표가 되고 마지막에는 경남 대표가 됐습니다. 7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여섯으로 구성된 우리 탁구부에서 세 번째나 네 번째 정도 실력이 됐습니다. 그 때 5단식 2복식으로 단체전 승패를 겨뤘는데 단식과 복식 경기에 다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간 전국 규모 대회에 문교부장관기와 국무총리기가 있었는데 여기서 우리 탁구부가 모두 3등을 하게 됐습니다. 조그만 시골 동네 학교에서 엄청난 성적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녕읍내 시가지를 한 바퀴 도는 카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국무총리기 대회를 마치고 나서이지 싶은데, 꽃다발을 목에 걸고 용달차보다는 조금 큰 화물차 짐칸에 탔었지요.

왼손잡이가 아니었으면 누리기 어려웠을 호사였습니다. 스포츠에서 왼손잡이가 누리는 이점은 널리 알려져 있는 그대로고, 그러므로 같은 실력이라면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가 유리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제가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탁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또 당시로서는 드물게 우리 탁구부에 왼손잡이가 저를 비롯해 두 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3등이나마 손쉽게 하지 않았나 여깁니다.

2. 구박 덕분에 양손 다 쓸 수 있게 됐다

다음입니다. 저는 수저질과 글쓰기를 오른손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왼손 쓰는 데 대한 구박이 없었다면 그리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힘쓰는 일은 아무래도 왼손이 낫지만 어지간한 일은 오른손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 구박이 없었으면 익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날 때부터 오른손잡이여서 아예 줄곧 구박이나 폭행 따위 없이 살았다면 왼손 쓰는 방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것 또한 틀림없습니다.

오른손이든 왼손이든 한 쪽 손만 쓰는 사람보다는 두 손을 모두 쓰는 사람이 신체 균형 감각도 뛰어나기 십상이고 이른바 좌뇌-우뇌 균형 발달도 낫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보람을 저는 제가 왼손잡이이기에, 또 왼손잡이에게 주어지는 집안과 세상의 구박이 있었기에 제가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여깁니다.

3. 구박 받다 보니 차별에 민감해지게 됐다

마지막 차이 그리고 차별에 민감해진 까닭 또한 저는 제가 왼손잡이라는 사실에 작지 않게 기대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나이에도 저는 왼손잡이라서 구박받고 얻어터지는 일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모자라고 덜 떨어진 인간이 아닌데도, 수업 시간에 왼손으로 연필을 잡고 오른손을 치켜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이기 우째 됐는지 손도 하나 제대로 못 드노!" 하면서 선생님이 꾸중과 매질을 퍼부을 때 저는 억울했던 것입니다.

왼손잡이나 오른손잡이나 똑 같은 인간인데, 다만 주로 쓰는 손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라는 조그만 다름만으로 차별과 불이익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조금씩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 왔지 싶습니다.

이런 덕분으로 저는 세상의 불평등과 불공정에 나름대로 민감해졌습니다. 어릴 적에도 별스럽지 않은 일로 구박을 받아야 하는 친구들이 안타까웠습니다. 더럽다거나 못 생겼다거나 집안이 가난하다거나 하는 까닭으로 차별 받는 아이들이 불쌍했습니다.

이를테면 동병상련이지요. 제가 차별을 받아 봤기에 그런 차별이 당하는 이에게 얼마나 서럽고 상처가 되는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동병상련 또는 차이 그리고 차별에 대한 민감함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외람되지만 자기 자랑이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좀 거창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동안 저는 편안함과 부유함 같이 누리면 좋겠다고 많은 세상 사람들이 여기는 그런 것들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그런 것들 누릴 깜냥이 아예 안되기도 하지만 ^.^)

대신 평등을 중심으로 삼은 기준이랄까 가치관을 나름 흐트러뜨리지 않고 40년 넘게 살아 왔고, 그렇게 올 수 있게 해준 힘의 많은 부분이 여기에 있다고 저는 여긴답니다. 서정주 시투를 빌리자면,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왼손잡이에 대한 구박이었다, 이렇게 되겠네요.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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