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내린 눈(雪)과 인간 존재의 공통점

김훤주 2010. 3. 1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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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학년 올라가던 1985년 1월 이런 구절을 담아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시대의 슬픔과 아픔에 몸부림친다면 도중에 쓰러져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그런 주제였습니다만. 하하.

"눈의 내림이
아름다운 까닭은, 쓰러질 때와 똑
같은 모습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음이니…"

("눈의 내림이 '슬픈' 까닭은"이라고 하지 않고 "눈의 내림이 '아름다운' 까닭은"이라고 비틀어 말한 이유는요, 그래야 있는 그대로가 다 드러나는 대신에 생각과 짐작을 할 수 있게 하는 여백을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밤부터 눈이 왔습니다. 눈이 뿌리기 시작할 즈음에 저는 통영에 가 있었습니다. 마산문인협회 이달균 회장을 만나 문학의 활로를 두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이제 밤이 깊어지면서 굵어지기 시작한 눈발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보다 눈발이 가늘어져 있기는 했지만 그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김주완 선배가 찍은 사진을 슬쩍 가져왔습니다.


갑자기 슬픈 느낌이 밀려올랐습니다. 눈과 인간 존재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눈이 처음에는 깨끗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저분해져서 소천(召天) 직전에는 눈인지 물인지 흙인지 구분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어머니 뱃속에서 빠져나왔을 적에는 그야말로 티 하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자라나서 세상 물정을 알아가고 나중에 스스로 세상 물정을 만들어 나가는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더러워질 수 없을 만큼 더러워집니다.

그야말로 오호애재(嗚呼哀哉) --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입니다. 어디에 태어나느냐에 따라서 더러워지는 정도와 과정이 달라진다는 점도 닮았습니다.

눈이 어디에 떨어지느냐는 눈의 의지와 전혀 무관합니다. 산에 떨어질 수도 있고 논이나 밭에 떨어질 수도 있고 도로나 지붕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눈의 운명은 결정됩니다.

산에 떨어진 눈은 가장 깨끗하게 오래 갑니다. 논이나 밭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지붕에 떨어지면 오래는 가겠지만 그러는 동안 갖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그 먼지랑 몸을 섞어야 합니다.

도로, 그 가운데서도 자동차가 내달리는 데에 떨어진 눈은 집단으로 흉악한 몰골을 보입니다. 사람 다니는 길에 떨어진 눈은 오랫동안 질척거려야 합니다. 이 모든 운명이 눈의 의지와 아무 관계없이 결정됩니다.

사람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가 이라크에 태어났을 때 그것은 그 아이의 뜻과 무관한 일입니다. 미국 침략으로 말미암아 갖은 무기가 살벌하게 설쳐대는 그런 나라에 누가 태어나고 싶어하겠습니까?

흑인으로 태어나고 황인으로 태어나고 백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태어나는 아이의 의지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로 아이의 운명을 크게 결정합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참으로 허망합니다.

불교권 나라, 기독교권 나라, 이슬람권 나라, 개신교권 나라에 태어나는 일도 아이와는 무관합니다. 어디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자기가 누릴 종교와 사상도 대체로 결정돼 버립니다. 마음의 무늬와 결조차 이렇게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결정돼 버립니다.

사람 살이가 참으로 허망하다는 것을, 눈은 이처럼 자기 한 몸을 있는 힘껏 내던져서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이 태어나 살지만,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어쩌면 "살아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설(瑞雪)이 내린 이튿날 아침, 뜬금없이 슬펐던 까닭을 떠올려 봤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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