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모든 풀들이 시들어 버리고 푸른 잎은 아예 볼 수 없는 줄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밥벌이에 정신을 놓고 사는 대부분은 한겨울 푸른 잎의 존재를 제대로 모릅니다.
아마 이 여성 시인도 그랬나 봅니다. 저랑 나이가 비슷한데, 몇 해 전 어떤 매체에다 자기 사는 아파트 조그만 뜨락에서 한겨울에 푸른 풀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경험을 풀어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여성 시인, 며칠 동안 밤샘을 했겠구나, 였습니다. 무슨 밤일을 그렇게 하느냐고? 아닙니다. 하하.
사람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좋은 시 한 편 쓰려고 많이많이 끙끙거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생 좀 했겠다 싶었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이렇습니다. '눈길 끝에 얹힌 꽃밭 언저리에는/ 채 녹지 못해 아지랑이 하늘대며 오르지 못한 눈/ 아래에 아직 바스라지지 않은 마른 풀잎/ 아래서 삐죽 튀어나온 초록 이파리/ 옹송거리며 있었겠지요'.
며칠 전 제 사는 아파트 조그만 뜰에서 찍었습니다.
이 여성 시인은 놀랍고 신기해서 "겨울에도 우와, 푸른 잎이 있네" 이러며 쪼그리고 앉았겠지요. 그 서슬에 마른 풀잎 하나둘 정도가 슬그머니 살짝 몸을 틀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른 풀잎 아래 있는 푸른 이파리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다른 초록 잎에게 이렇게 얘기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늘 이렇는데, 저 이는 처음 보나 봐. 그렇지?"
여성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터로 가면서 입가에 웃음 하나 빼어물었을 테고요, 새로운 경험을 했다면서 밤새껏 못 다 쓴 시에다 대고 좋아라 이 느낌을 흐물흐물 녹여 넣었을 것입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 맨날 보면서도 느끼지 못한, 지난 마흔 해 남짓한 세월을 아픈 깨달음으로 버무려 쓰다 만 시에 들여앉혔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눈 아래 초록으로 빛나는 이파리, 자기 눈에 담은 짧은 한 순간을 냉동 상태 그대로 원형 손상 없이 적으려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시 따위 한 편 쓰는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음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맨 처음 자기 발 아래에서 초록 이파리를 보고 신기하게 여겼던 그 눈길을 잊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가까운 데, 손에 잡히는 데, 바로 갈 수 있는 데가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추운 겨울 들풀이 내뿜은 초록으로 하늘대는 잎을 보려면, 고개 숙여 가까운 둘레에 눈길 보내야 한다는 이치쯤은 쉬이 깨달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마찬가지 장소에서 같은 날 찍었습니다.
자기하고 떨어져 멀리 있는 것을 보더라도, 겉으로 보이는 것을 보는 데서 더 나아가, 속으로 감춰져 있는 것까지도 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저어 멀리 눈 쌓인 겨울산이나 언덕 골짜기 비탈을 보면서도
반짝반짝 초록을 느낄 수 있을 테고,
수풀을 감싸돌고 골짜기를 훑어서 방죽을 뛰어넘어 웅웅거리며 내달리는 바람 속에서도
쓰러진 들풀들 다시 일어나며 내지르는, 가녀리지만 씩씩한 아우성까지 들을 줄 알겠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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