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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학살 114

민간인학살 피해배상 판결문 전문을 보니...

울산 보도연맹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은 1심 승소, 2심 패소, 대법원 승소로 결론이 났습니다. 지난 6월 30일 대법원 1부의 판결이었지만, 판결문 전문이 나온 것은 최근이었습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한국 현대사의 미해결 과제 중 하나인 민간인학살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덕분에 울산 이외지역에서도 유사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과거 관련기사 : 민간인학살 상반된 판결 왜 나왔나? ☞과거 관련기사 : 민간인학살 국가상대 손배소 줄 잇는다 ☞과거 관련기사 : 국가가 입 막아놓고 이제 와서 시효소멸? 이번 소송에서 가장 핵심은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를 언제로 볼 것이냐는 것이었는데, 이번 대법원 재판부..

이들 유족에게 이승만은 학살자일뿐이었다

51년 전 피학살자유족회 선언문을 보니...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물러나자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가족들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한국전쟁기를 틈타 사회불안 요소 제거 차원에서 재판도 없이 산골짜기에서 총살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한 사람은 최소 수십만 명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피학살자 유족들은 10여 년간 공포정치에 억눌려 피해 사실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그제서야 각 지역별로 유족회를 결성하고 진상규명 운동에 나섰다. 4·19 직후 경상도에서 먼저 시작된 진상규명 운동은 그해 10월 20일 서울에서 전국유족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

진실화해위원회 직원들의 마지막 호소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12월 출범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이 31일을 끝으로 공식 종료되는군요. 1999년부터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해왔던 저로서도 참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착잡한 이유는 이번 활동 종료가 위원회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고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은 갈수록 위축되어 왔고, 급기야 뉴라이트 계열의 위원들이 대거 자리를 차지하면서 오히려 진실이 축소 또는 왜곡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제 메일로 진실화해위원회 공무원직장협의회(대표 임채도)의 편지가 들어왔군요.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의 기자회견과는 사뭇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침울해졌습니다. ..

11년만에 밝혀진 미군의 곡안리 학살

어제(14일)는 참 기분좋은 날이었다. 기자로서 정말 뿌듯한 날이기도 했다. 1999년 10월 4일 처음으로 '곡안리 재실(齋室)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후, 약 11년만에 한국정부 차원의 공식 진실규명 결정이 난 사실을 다시 우리 신문지면으로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산 곡안리 학살 '진실' 확인 : 경남도민일보) 최초 보도에서 마무리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신문이 둘 다 단독보도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1999년 5월 11일 창간된 경남도민일보의 창간기획으로 지역현대사를 발굴해 보도하는 '지역사 다시읽기'라는 기획시리즈 기사를 20회째 연재 중이었다. 그 해 여름부터는 1950년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내보내고..

달동네 골목의 태극기가 쓸쓸해 보였다

어제(9일)는 한글날이었지요. 어쩌다 마산 무학산 만날재에 있는 당산마을이라는 그야말로 달동네에 가봤습니다. 통영 동피랑에 가보진 않았지만, 이곳 달동네도 거기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밝은 색상의 벽화가 산동네 주민들의 고달픈 삶을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듯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을을 보며 60·70년대의 힘든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날 내 눈길이 머문 곳은 태극기였습니다. '국가는 지금까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뭘 해줬을까?' '이런 달동네 주민들에게 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한국전쟁 때 이승만 정권의 군경에 의해 무자비하게 불법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부모형제의 목숨을 빼앗아간 살인마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유족회 총회나 위령제 행사를 할 때..

그 자리에 진보 노동운동가는 없었다

'한국노동운동의 선구자 고(故) 소담(昭潭) 노현섭 선생 추모회'라는 긴 제목의 모임이 2일 오후 6시 마산M호텔에서 열렸다. 노현섭(1921~1991) 선생이 타계한 지 20년, 누명을 쓰고 투옥된 지 50년만에 처음 열린 지역사회 차원의 추모행사였다. 묻혀진 노동운동의 선구자 추모행사 참석자들의 면면을 기록삼아 적어 보면 이렇다. 김재윤 전 경남대 교수, 이순항 전 경남도민일보 대표이사, 홍중조 전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 황창규 전 항운노조 위원장, 김명호 경남항운노조 위원장과 간부들, 최광주 경상남도 새마을회 회장, 백한기 3·15의거기념사업회장, 김종배 전 3·15의거기념사업회장, 조민규 합포문화동인회 이사장, 김종대 창원시의회 의원, 허진수 전 경남도의원, 김영만 전 열린사회희망연대 대표, 권광..

20년만에 열린 한 노동운동가의 추모행사

고(故) 소담(昭潭) 노현섭 선생은 마산시 구산면 안녕마을 출신으로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마산보통상업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3개 부두노조를 통합한 단일지역노조인 대한노총 자유연맹 마산부두노조를 결성,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마산자유연맹 위원장과 전국자유연맹 위원장으로 한국 노동운동을 주도했으며, 노동자 자녀를 위한 마산고등공민학교와 노동병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했던 마산노동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또한 6·25 때 친형인 노상도 씨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후, 1960년 3·15의거로 학살책임자인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운동에 뛰어들어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를 결성한 데 이어 전국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이 때문..

학살유족들 "반성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아래 글은 내가 관여하고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경남지역 유족회' 대표들이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과 각 정당에 호소하는 기자회견문입니다. 초안은 제가 잡았고, 저와 함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서봉석 전 산청군의회 의원, 그리고 마산유족회 노치수 회장님이 감수했습니다. 오늘 이 내용을 갖고 경남지역 유족회 대표님들이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회견장에서 특히 KBS 기자가 질문을 많이 했는데 오늘 저녁 TV뉴스에 어떻게 나올지, 그리고 내일 아침 신문에 얼나마 보도될 지 궁금하네요. 유권자가 직접 나서 후보자와 정당들을 상대로 이런 공약을 해줄 것을 요구한 이 글은 과거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유권자의 자세에서 나아가..

감사원의 진실화해위 감사결과가 반가운 이유

오늘 낮, 후배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감사원이 진실화해위원회 등 과거사 관련 기구에 대한 감사결과를 발표했는데, 그게 감사원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으니 한 번 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MB 정권의 감사원이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 정권이 사사건건 과거사 진실규명에 발목을 잡아온 전력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뉴라이트 계열에서 활동하던 보수인사들을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과 위원으로 임명하고 있다. 과거사 진실규명에 반대해온 인사들에게 그 일을 담당하는 기구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넌센스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감사원 홈페이지에서 감사결과를 열어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내용이 달랐다. 용역 예산 정산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몇 몇 지적사항과 함께 '발굴..

열 일곱 학생까지 학살, 의혹이 사실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이 중·고생까지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학살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2001년 이같은 의혹을 를 통해 제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국가기관으로부터 공식 확인된 것입니다. 이같은 사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위원장 이영조)가 최근 유족들에게 통보한 '경남 마산·창원·진해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밝혀졌습니다. ☞관련 글 : 집단학살 진실규명 결정을 보는 특별한 감회 진실위 결정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초순경 마산중학교 4학년생이던 당시 창원군 내서읍 감천리 송규섭(17·호적상으로는 1934년생) 군이 학교 교문 앞에서 해군방첩대 요원에게 연행되었으며, 이후 행방불명된 사실과 참고인들의 진술로 보아 보도연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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