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1년만에 밝혀진 미군의 곡안리 학살

기록하는 사람 2010. 12. 1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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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4일)는 참 기분좋은 날이었다. 기자로서 정말 뿌듯한 날이기도 했다. 1999년 10월 4일 처음으로 '곡안리 재실(齋室)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을 세상에 알린 후, 약 11년만에 한국정부 차원의 공식 진실규명 결정이 난 사실을 다시 우리 신문지면으로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산 곡안리 학살 '진실' 확인 : 경남도민일보)

최초 보도에서 마무리까지 11년이란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신문이 둘 다 단독보도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1999년 5월 11일 창간된 경남도민일보의 창간기획으로 지역현대사를 발굴해 보도하는 '지역사 다시읽기'라는 기획시리즈 기사를 20회째 연재 중이었다. 그 해 여름부터는 1950년 마산지역에서 발생한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을 내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노근리 사건과 곡안리 사건은 전혀 차이가 없는데...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된 피해자를 찾아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까지 들어갔는데, 그 마을은 보도연맹 학살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이 이중으로 중첩돼 마을 사람들이 거의 몰살되다시피 한 아픔을 안고 있었다.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군과 경찰, 우익단체에 의한 학살사건이고, 곡안리 재실 사건은 미군에 의한 학살사건이다.

1999년 10월 4일자 첫 보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획시리즈는 100회까지 연재되었는데, 곡안리 학살사건도 원래는 연재기사를 통해 차근차근 보도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AP통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보도됐다. 곡안리와 노근리 사건은 미 25사단의 '전투지역에 있는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한다'는 지침에 의해 무고한 주민들이 학살된 것으로 거의 똑같은 사건이다.


계획을 바꿔 곡안리 사건을 기획연재 순서와 관계없이 곧바로 보도하기로 하고, 10월 4일부터 1면 머릿기사로 연속해 내보내기 시작했다. 전국의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우리 기사를 받아 적었고, 월간 <말> 11월호에도 나의 기고글이 실렸다. 그 글은 오연호 기자(현 오마이뉴스 대표)가 쓴 <노근리 그 후>라는 단행본에도 다시 수록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도 희생...이후 독립운동 서훈 받아

취재과정에서 기미독립운동 때 일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치른 독립운동가 이교영 선생도 이 곡안리 학살 때 미군의 총격에 숨진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교영 선생은 독립운동가 서훈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생사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이유였다.

경남도민일보는 이 문제도 지속적으로 제기하여 마침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덕분인지 정부도 노근리 사건과 함께 곡안리도 진상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다.

이와 달리 노근리 사건의 경우 미국의 통신사에서 보도했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의 사과도 이뤄졌고, 우리나라도 특별법까지 제정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하고 있다. 노근리 평화공원도 조성됐고, 영화까지 제작됐다.


그러나 86명의 목숨을 앗아간 곡안리 학살사건의 경우, 미국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한 탓인지 흐지부지되는 듯 했다.

2002년 곡안리사건을 취재중인 BBC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필자가 인터뷰하고 있다.


물론 영국의 BBC가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기도 했다. 그 때 어처구니없는 일도 한국언론에서 벌어졌다. BBC가 영어로 학살이 벌어진 성주 이(李)씨의 문중 재실(齋室)을 지칭해 'shrine'이라는 영어단어를 썼는데, 대다수 국내언론은 '성당'이나 '절'로 번역해 보도했던 것이다.

'재실'을 '성당'으로 번역해 보도한 한국언론

 
BBC는 한국의 재실을 'church'나 'temple'로 옮기지 않고 가장 적절한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를 다시 국내언론이 엉뚱하게 번역하는 바람에 황당한 오보를 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BBC 다큐가 방영된 이후인 2일자 보도에서도 <연합뉴스>를 비롯한 상당수 언론은 마산의 곡안리를 영어발음 그대로 '고간리'로 표기했다. <연합뉴스>를 전재하지 않고 자사기자의 이름으로 베껴쓴 신문들도 '고간리'로 보도하는 헤프닝을 빚었다. 세상에 자기 나라의 재실과 마을 이름을 외국언론 보도에 의존해 엉터리로 번역해 보도하는 멍청한 언론이 한국 말고도 또 있을까?

어쨌든 이런 무식한 한국언론 탓인지 곡안리 사건은 흐지부지 뭍히는 듯 했다. 그런데 다행히 노무현 정부 들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됐고, 2005년 12월부터 집단학살 희생자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다. 2006년 곡안리 학살사건 피해자와 유족들도 신청을 했다.

그로부터 다시 5년이 지나 마침내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서'를 받은 것이다. 진실위는 당시 내가 집계한 사망자 83명에 추가로 3명을 더 찾아 모두 86명을 희생자로 확정했다.

86명의 목숨을 앗아간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 학살현장. 마당의 우물 테두리석에는 아직도 그날의 기관총 탄흔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이처럼 국가기관의 공식 진실규명을 받았지만, 노근리 사건과 달리 곡안리 사건 피해자와 유족이 받은 결과는 허무하기 짝이 없다. 피해보상 한 푼도 없고, 추모공원이나 영화를 찍을 돈도 없다. 다만 유족들이 나서서 위령제를 열겠다면 위령제 비용 몇 백만 원 지원해주는 게 전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결정서에서 △미국과 피해보상 협상 △국가 사과와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부상 피해자에 대한 의료 지원 △제적부·가족관계등록부 등의 정정 △역사 기록의 수정 및 등재 △외교적 노력 및 인권의식 강화 등을 권고했지만 현 정부가 제대로 권고사항을 이행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미 진실규명이 먼저 이뤄진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등의 예로 보아 뻔하다.

오늘(15일)자 신문 1면에 우리는 학살참극이 벌어진 곡안리 재실을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자는 기사를 내보냈다.(☞곡안리 학살 현장을 문화재로 : 경남도민일보) 노근리 학살의 현장이었던 쌍굴이 이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듯, 재실이나마 잘 보존해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리고 내년 8월 11일에는 너무 늙어(유족 대부분이 80대를 넘었다.) 행사를 실무적으로 추진할 힘이 없는 노인들을 도와 처음으로 공식 위령제라도 지내드릴 생각이다.

※1999년 당시 내가 썼던 기사를 찾아봤으나 우리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PDF도 없었다. 인터넷 검색 끝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이트 자료실에서 다행히 내가 썼던 기사들을 보관해두고 있었다.(☞당시 기사들 보기)

거기서 다운받은 기사 파일 하나를 기록삼아 여기에도 올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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