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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대통령은 '사과'했는데 장관은 '유감'인가

16일 오후 마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무고하게 집단학살된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사과문도 발표되어 눈길을 끌었다. 위령제 자리에서 국가가 공식 사과하는 것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권고사항'에 근거한 것이다. 진실화해위의 권고사항 제1번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화해를 위한 국가의 조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1) 국가의 공식 사과 본 사건은 한국전쟁 직후 부산·마산·진주형무소의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예비검속자들이 계엄 하 국가의 명령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다. 비록 계엄 하 전시상황이라 하더라도 형무소 재..

조선왕조보다 못한 대한민국의 기록관리

가끔 한국 현대사에 얽힌 새로운 사료(史料)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를 접했을 때, 그 자료의 출처는 어김없이 미국 국립문서기록보존소인 경우가 많다. 이런 보도를 보면서 '왜 우리나라의 역사자료가 국내엔 없고 미국에만 있을까' 하고 의문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러던 중 불과 몇년 전 '기록학'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도서관(library)이나 박물관(museum)과는 또 다른 기록관(archives)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도서관이 인쇄된 책을 보관하고, 박물관이 유물을 보존하는 곳이라면, 기록관은 말 그대로 문서를 비롯한 각종 역사자료를 보존하는 곳이다. 선진국에는 이 기록관이 박물관이나 도서관의 숫자만큼이나 많다는 사실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보..

조선시대 왕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경남 마산의 근대문화유산인 일제시대 헌병분견대 건물이 노무현 정부 시절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최근 또다시 몇몇 보훈유관 친목단체 등에 무상임대될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이 블로그에서 전한 바 있다. (☞ 문화유산을 왜 특정단체에 무상임대하나?) 나는 그 글에서 마산 헌병대 건물이 근현대 문화유산인만큼 문화재의 용도에 맞게 '근현대 마산 역사기록관(아카이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사무국장이 올린 글을 보니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에 설립될 예정이던 대통령 기록관도 사실상 무산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 전진한 : 향후 퇴임 대통령 기록은 관리 안하겠다?) 정권이 바뀌고 나니 조선시대 이후 단절된 기록문화를 되살리겠다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지는 간단히 부..

문화유산을 왜 특정단체에 무상임대하나

경남 마산에는 83년 전인 1926년 일제가 지은 일본 헌병분견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인 1909년 12월부터 일제 헌병은 마산에 있었으나 분견대 건물이 지어진 것이 1926년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1945년 해방 때까지 20여 년간 헌병대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에서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당했을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해방 후에도 이 헌병대 건물은 국방부 소유가 되어 군 정보기관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지금은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로 이름이 바뀐 옛 보안사의 마산파견대가 '해양공사'라는 간판을 달고 각종 사찰활동을 해왔겠죠.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헌병대가 해방 후에는 민주화운동가들을 사찰하고 고문하는 정보기관으로 탈바꿈 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1990년 윤..

이젠 독재의 증거물이 된 '국민교육헌장'

모처럼 아침 산책을 나가봤다. 집앞에서 보이는 산을 따라 걷다보니 저절로 산호공원이라는 델 오르게 됐다. 말이 좋아 '공원'이지 규모가 작아 인근 주민들이 아침 운동삼아 오르는 곳일뿐 일부러 놀러 갈만한 곳은 아니다. 인근에 사는 나로서도 참 오랫만에 찾은 곳이다. 산정에 충혼탑이 있는 공원이라서인지 이런 저런 비석과 조형물들이 많다. 마산과 이런 저런 관계가 있는 시인들의 시비도 있다. 그런데 오늘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석물이 하나 있었다. 박정희가 국민을 '황국신민'쯤으로 보고 만들었던 '국민교육헌장'이 빼곡히 검은 돌에 음각되어 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에서부터 "서기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

국문학자가 밝혀낸 역사의 불편한 진실

내가 지금까지 기자노릇을 해오면서 가장 답답하게 여겼던 일이 '민간인학살' 문제였다.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분개하고,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 경악할 줄 아는 한국사람들이, 그리 멀지도 않은 시기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서 100만 민간인학살 만행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선 무심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 탓으로 봐야 할까, 내 치부를 보지 않으려는 비겁한 외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체험과 그 트라우마로 인한 의도적 망각일까. 신경득 교수의 돈 안되는 연구 아직도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학살자의 자식들이 '좌익으로 몰..

장지연 친일명단 제외? 착각하지 마라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경남일보 초대주필을 지낸 장지연(張志淵·1864~1921)을 최근 조사대상자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8월 29일 연합뉴스에 먼저 보도됐고, 이어 경남일보도 31일자 1면에 장지연 초상화와 함께 보도했다. 마침 경남도민일보에도 진주의 추경화 씨가 장지연의 조사대상 제외를 환영한다는 취지의 독자투고를 해왔다. 그는 이 글에서 '중단되었던 기념사업도 다시 시작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지연의 친일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추모 및 기념사업을 하는 데 대해서는 누가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업을 하기 위해 정부나 자치단체에 손을 벌리는 것은 납세자의 한 사람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국가기구인 반민규명..

쿠데타정권의 황당한 판결문 보셨습니까?

무조건 잡아 가둬놓고, 처벌위한 법률 만든 군사정권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2조 1항) 또한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3조 1항) 이런 대한민국에서 국군과 경찰에 의해 내 부모 형제가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학살당했다. 언제, 어디서 왜 죽였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그 숫자만 줄잡아 수십 만 명이다. 하지만 학살된 희생자의 유족들은 10년 동안 입도 벙긋하지 ..

49년만에 열리는 위령제 '제2회'인 까닭

1950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학살된 마산지역 희생자들에 대한 합동위령제가 1961년 5·16쿠데타로 중단된 지 49년만에 다시 열린다. 또 박정희 군사쿠데타 세력의 소급입법으로 부당하게 옥고를 치른 민간인학살 유족회와 교원노조 간부들에 대한 명예회복도 마침내 이뤄질 전망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마산유족회(회장 노치수)는 29일 오후 경남도민일보에서 임원진회의를 열어 1961년 이후 단절됐던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오는 10월 16일 오후 1시30분 마산공설운동장 내 올림픽기념관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유족회는 또한 1960년 8월 27일 당시 마산역 광장에서 1000여 명의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노현섭(현 노치수 회장의 작은 아버지) 씨의 주도로 열렸던 제1회 위령제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49년만에 열..

사진·영상으로 보는 학살 유해발굴 현장

어제(30일) 또 민간인학살 암매장 터 유해발굴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하도 이런 현장을 많이 봐서 이제 무덤덤해질 때도 되었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멍멍해집니다. 경남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에서 산으로 좀 올라가면 가늘골(아랫법륜골)이라는 야트막한 골짜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감나무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 과수원의 주인이 산을 매입할 때 전 주인으로부터 학살 매장터가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그곳은 감나무를 심지 않고 공터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 감나무 과수원 주인의 제보로 진실화해위원회의 용역을 받은 경남대박물관 유해발굴팀(책임연구원 이상길 교수)이 발굴했습니다. 기록으로 남깁니다. 지난 11일 처음 유골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당시의 모습입니다. 장맛비가 와서 이렇게 덮어놓았습니다. 19일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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