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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그들이 친일을 인정할 수 없는 이유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게 되는 가장 치졸하고도 답답한 인간형은 자신의 명백한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것도 모자라 터무니없는 궤변으로 합리화하려 하거나, 도리어 잘못을 지적해주는 사람에게 화를 내는 걸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요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가 과거 사주의 친일행적에 대해 하는 짓이 그렇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에 창업자 또는 사주였던 김성수와 방응모가 포함되자 두 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을 들고 나왔다. 동아일보의 사설 제목은 '대한민국 정통성 훼손 노린 좌파사관 친일사전'이었고,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 대회'였다. 다른 논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였을까?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바..

대통령직속기구 선정 친일파는 누구일까?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일 친일파 4389명의 행적을 수록한 인명편(전3권)을 발간한 데 이어, 대통령 직속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일제강점기 제3기(1937년~194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선정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일제말기인 이 시기의 친일혐의자들은 특히 해방 이후에도 권세를 떨친 사람들이 많아 과연 누가 여기에 포함되거나 빠지게 될 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데요. 알려진 바로는 제1기(1904~1919년)와 제2기(1919~1937년)를 합친 친일파 301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705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유족이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냄으로써 논란이 됐던 박정희와 장지연의 경우, 에는 실렸지만, 대통령 직속기구의 명단에서는 제외됐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현 이명박 정부 들..

언론·교육·문화예술계 친일파 누구인가?

발간 및 국민보고대회 관련기사를 썼더니, 오늘(9일) 아침신문을 본 독자들로부터 여러 번 전화를 받았다. '음악가 남인수도 포함되었느냐', '조연현은 어떻게 됐느냐'는 등 지역출신 인물들의 수록 여부를 묻는 전화였다. 이번에 발간된 (인명편, 전3권)에는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 4389명이 수록되어 있다. 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윤경로)는 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에 앞서 인터넷으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주요' 수록인물을 공개했다. 그러나 4389명의 전체 명단은 아직 공개하지 않아 책을 구매해 받아보기 전에는 책에 수록된 개개인의 이름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다. 나도 아직 책을 받아보진 못했으나,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4389명의 명단을 별도로 입수..

세월이 흐르면 친일문제도 잊혀질까?

민족문제연구소가 1939년 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박정희의 만주군 '혈서 지원' 사실을 입증했을 때, 내가 궁금했던 건 소위 얼치기 '보수세력'의 반응이었다. (※관련 글 : 박정희, 만주군에 '혈서지원' 사실로 확인) 인정할까, 침묵할까, 아니면 반박하고 나올까? 반박한다면 과연 어떤 논리를 들고 나올까?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의 혈서지원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듯 하더니, 이어진 발간에 대해선 '대한민국 정통성 다시 갉아먹은 친일사전 발간대회'(조선일보 사설)라며 치고 나왔다. 예상했던 바다. 아무런 논리도 없다. 논리로 친다면 차라리 이 블로그의 '박정희 혈서지원' 글에 달린 아래 댓글이 더 낫다. 나는 이 댓글에 '최고'라는 찬사를 선사했다. 과거사(친일) 청산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갉아먹는다'는 논..

친일인명사전, 박정희·장지연이 고맙다

마침내 (인명편, 전3권) 편찬이 완료되었다. 8일 숙명여대 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민보고대회는 갑작스런 장소대관 거부와 경찰의 원천봉쇄로, 인근 효창원 안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진행됐다. 연합뉴스와 뉴시스 등에 뜬 사진을 보니 오히려 백범 묘소가 친일인명사전 국민보고대회의 자리로 훨씬 어울렸다. 백범 선생 묘소에 책을 헌정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니, 훨씬 모양새가 났다. 현장에 있던 지인과 민족문제연구소 간부들도 '차라리 잘 됐다'며 이구동성이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에서 막판까지 국민의 관심을 끌게 해줬던 것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지연 경남일보 주필의 유족들이었다. 유족들이 법원에 친일인명사전 게재 및 발행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오히려 이날 국민보고대회가 더 큰..

마산 민간인학살 희생자 명단 공개합니다

요즘 나에게 민간인학살 사건 희생자 명단에 자신의 아버지가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는 전화가 가끔 걸려온다. 올들어 마산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지고, 이후 결성된 마산유족회(회장 노치수)가 48년 만의 합동위령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확인해 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명단을 공유하기 위해 블로그에 올려놓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올리는 명단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이 당시 유족회로부터 받아 7월 23일자에 보도한 것이다. 이 명단이 실린 신문스크랩 덕분에 이번 진실규명 결정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분이 희생자로 확인될 수 있었다. 물론 이 명단이 ..

박정희, 만주군에 '혈서지원' 사실로 확인

'만주군 장교였지만 친일파는 아니다'는 논리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인명사전 게재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던 아들 박지만 씨의 주장이 무색하게 됐다. 박정희가 치안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혈서(血書)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마침내 드러났기 때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5일 오후 12시 23분, 홈페이지를 통해 일본에서 입수한 혈서지원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사본을 공개했다. 연구소가 공개한 일본어 신문기사는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

박정희가 해직시킨 교사 3008명 아직도…

박정희·전두환 등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뭘까?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정권 찬탈 음모에 걸림돌이 될만한 사람들, 즉 이른바 '운동권'을 싸그리 잡아들여 조지는 것이다. 그걸 일컬어 이른바 '예비검속'이라고 한다. 법적 근거도 없고 구속영장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그건 명백한 '불법 구금'이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5·16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한 일도 바로 전국의 '운동권 세력'을 '일망타진'하는 일이었다.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그들은 이틀 뒤인 18일부터 교원노조, 양민피학살자유족회, 민족통일학생연맹,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 등 사회단체는 물론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등 진보정당 간부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예비검속..

검사와 재판장이 치고받고 싸운 사연

'5·16쿠데타 직후의 인권침해사건'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당시 혁명검찰부부장과 혁명재판소 재판장이 민간인학살 유족회 간부들에 대한 유죄판결 여부를 놓고 재판소 복도에서 치고받고 싸운 일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은 이번 결정문에서 당시 경상남북도와 금창(김해·창원), 동래·창원·경산·밀양 피학살자 장의위원회 사건의 주임검찰관이었던 이OO의 진술을 공개했다. 이OO 전 주임검찰관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피고인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박창암 혁명검찰부 부장과 심판부 제5부 재판장이 혁명재판소 건물 복도에서 치고받으며 싸웠습니다"라고 진술했다. ※관련 글 : 60년대 진보인사들 명예회복 길 열렸다 이 전 검찰관에 따르면 당시 이택돈 심판..

마산 도심에 남아있는 진주가도

나는 1992년 3월부터 마산에 살기 시작했다. 따라서 햇수로 18년이 되었지만, 마산 도심에 '진주가도'라는 도로가 있는 줄은 몰랐다. 내 딴엔 그래도 마산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아마도 해방 후의 현대사에만 천착하다보니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내 관심이 그만큼 얕았다는 것일게다. 어쨌든 경남대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참여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유장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진주가도는 '창원부에서 진주부에 이르는 경남의 요로'였다고 한다. 경남의 요로는 밀양부에서 창원부, 창원부에서 진주부에 이르는 길이었는데, 원모습은 개항기와 일제 초기까지 존속되었고, 일부는 오늘날까지 잔존해 있다. 지형상 대부분 고개를 통해 연결되는데, 밤밭재, 마재 등으로 통한다. 마재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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