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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세상 1803

왜성 재발견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산지니, 2016)은 한겨레 기자인 신동명, 최상원, 김영동 세 기자가 지면에 연재한 기사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나도 부산과 경남 일대에 산재한 왜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치욕스런 역사의 상징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자들은 왜성에 대한 그런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책을 통해 주장한다. 치욕의 상징물이 아니라 "16세기 말 우리 조상이 절체절명의 국난을 마침내 극복하고 얻은 전리품으로 왜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왜군이 남해안에 집중적으로 성을 쌓은 배경을 지적한다. "성에 의지해 조명연합군의 공격에 최대한 버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안전하게 철수"하기 위해 왜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부지방엔 없다. 서해, 동해안에도 없다. 어쨌든 ..

경남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 이렇게 시작됐다

노치수 경남유족회장으로부터 경남지역의 민간인학살이 알려지게 된 계기와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된 과정을 정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2018년 4월 30일 마산 올림픽기념관에서 열리는 경남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 합동추모제 행사에 배포할 책자에 실어 유족들에게도 그 과정을 알리겠다는 취지였다. 마침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한 번쯤 기록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김주완의 개인적인 기억과 확인된 기록으로 재구성한다. 1999년 5월 6000여 시민주주의 힘으로 경남도민일보가 창간되었다. 1990년부터 기자라는 직업으로 살아온 나는 정말 이런 신문사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자본과 권력 눈치 보지 않고 취재하고 싶은 모든 걸 할 수 있는 신문. 모든 기자에게 꿈같은 일 아닌가. 우리보다 10년 먼저 창간했던 ..

인민군 고위간부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이야기

기억은 잊히지만 기록은 역사가 됩니다 정찬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북한의 엘리트였던 그는 6.25 전쟁 발발 직후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허가이의 부름을 받고 당 고위직인 영남지방 교육위원 임명장과 김일성 수상의 신임장을 전달받습니다. 그가 받은 임무는 "인민군대를 지휘해 경상남북도의 교육체계를 사회주의식으로 바꿔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양을 출발, 서울을 거쳐 진주를 향해 남하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온갖 참상을 목격하게 되면서 이 전쟁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인민군 대열에서 이탈하지 못하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고립된 인민군 패잔병들의 비참한 도피생활, 어쩔 수 없었던 지리산 빨치산 합류, 이후 토벌군에 ..

2000년대 초반에 들은 촌지 이야기

올해 3월 기역 선배를 오랜만에 만나 이런 얘기를 했다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촌지를 밝히는 기자 이야기다. 한 번 적어보겠다. 2000년대 초반에 들은 얘기들이니 적어도 15년은 넘었다. 첫 번째 이야기히읗 기자한테서 들었다. 어느 기관이든 출입하는 기자들은 기자단을 구성하고 대표격으로 간사도 한 명 뽑는다. 따뜻한 봄날 기자단 간사한테 지역에 있는 한 공공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점심 한 번 같이 먹자는 얘기였다. 기자들 10명 안팎이 함께 밥을 먹었다. 그 기관에서는 대표와 국장급 간부 둘, 홍보 담당 하나 모두 넷이 나왔다. 이런 자리에 드는 돈은 당연히 해당 기관이 내었다. 그렇게 점심에다 술까지 한 잔 걸치고 돌아왔다. 다들 기분이 좋았다. 간사 한 명만 빼고 나머지 기자..

문재인 대통령 제주 4.3추념사 전문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

사람들 복작대는 경남 고성읍내 철뚝갯벌

경남 고성읍내에서 삼산면으로 빠져나가는 어귀에 조그만 갯벌이 있다. 주위에 갈대 억새가 우거져 있고 한가운데로 가면서 물이 고여 있어서 얼핏 보면 무슨 연못 같다. 철뚝갯벌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앞에 붙어 있는 정식 이름은 수남유수지다. 수남은 여기 동네 이름이고 유수지(遊水池)는 물이 많아졌을 때 다른 데로 넘치지 말고 잠시 머무를 수 있도록 비워놓는 땅을 이른다. 원래는 바다와 바로 이어지는 물줄기 끝자락이었다. 지금은 차단되어서 무슨 펌프장을 통하도록만 연결되어 있다. 여기가 메워진 것은 역사가 오랜 모양이다. 철뚝갯벌이라는 이름에 그런 역사가 들어 있다. 고성 철성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 가르치시다 몇 해 전 정년퇴직을 하신 김덕성 선생님은 1904년 그러니까 일제 강점 이전에 갯벌 둘레가 ..

나향욱 파면과 안희정 제3 미투 반응에 대한 생각

나향욱 파면이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나향욱이 고위 관료로서 신문기자들에게 "민중은 개돼지"라고 발언한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그래도 파면은 지나치다는 요지였다. 1심과 2심에서 같은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에 가도 뒤집기 어렵다는 법무 판단에 따라 교육부가 상고를 포기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향욱이 파면당하는 순간에 이미 나와 있는 결론이었다. 당시 대중은 태산보다 더 크게 분노했다. 이를 가라앉히려면 파면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해임도 아닌 파면은 처음부터 지나친 것이었다. 이전에 같은 언행을 상습으로 되풀이했거나 또는 다른 비위·부정까지 함께 저질렀다면 모르지만. 사람들 심정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나향욱에 대한 파면을 그대로 유지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올라 있다..

지방소멸이 도시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요?

제 고향은 남해군입니다. 고향에 집이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비어있습니다. 논도 있지만 이웃 어른이 부치고 있습니다. 산 기슭에 있던 밭은 방치한 지 오래되어 사라졌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에는 이제 아이나 젊은이가 아예 없습니다. 그나마 젊은 사람이 70대고 나머지는 모두 80대 이상입니다.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우리집처럼 대부분 빈집이 될 겁니다. 이웃마을도 대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자라던 시절 남해군 인구는 10만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4만 5000명이 채 안 됩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전국 228개 지방자치단체 중 85곳이 소멸 위험지역입니다. 이대로 두면 30년 안에 시군구의 37%, 읍면동의 40%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평창올림픽에서 전 국민을 열광케 했던 여자컬링..

옛 농사 이야기-소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전희식 선배가 쓴 책 를 읽었다. 이다. 석 달 전에 읽었는데 글은 이제야 쓴다. 나는 게으르다. 옛날 사람들이 지었던 농사를 돌아보면서 오늘날에 되살리자는 이야기였다. 사실 지금 농사는 농사가 아닌 것이 맞다. 거의 공업 수준이고 논밭은 공장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모종은 공장 같은 육묘장에서 길러진 녀석을 산다. 논밭에는 비료와 농약을 정해진대로 집어넣어 땅심이 아니라 비료힘으로 자라게 한다. 그렇게 일정 기간 기른 다음 뽑아내어 내다판다. 기후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하여 치는 비닐하우스는 상식이 되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모작 삼모작이 최대치였지만 요즘은 심한 경우는 27모작까지 한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원래 농사가 갖추고 있던 여러 미덕들을 그대로 실현하려면 옛날 농사로 돌아가는 것 말고는 답..

부산과 창원 사이에서 김해는 변방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은 시·군 단위로 자급자족이 기본이었다. 군청이나 시청 소재지를 중심으로 동일 생활권으로 묶여 있었다. 시·군은 그 자체로 일상생활을 충분히 꾸릴 수 있었다. 읍내만 나오면 어지간한 일들은 다 해결이 되었다. 읍내에는 목재소·가구점도 있었고 라디오전파상도 있었고 편물공장도 있었고 술도가도 있었다. 오뎅공장도 과자공장도 아이스케키공장도 국수공장도 통닭튀김가게도 있었다. 양복점과 의상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과자공장과 아이스케키공장은 롯데제과나 해태제과의 대리점이 되었고 목재소와 가구점은 현대가구 등의 대리점이 되었다. 라디오 전파상은 삼성·금성·대우전자의 대리점이 되었다. 편물공장·의상실·양복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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